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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설교자의 자세, "거짓과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말라"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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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연구(6) * 


 

 

박동현 박사의 ‘예언서 예레미야에서 배우는 설교'

 

2014년 7월 4일 기사

 

“성공과 번영과 풍요를 약속하는 말을 함부로 내뱉고, 잘못된 길을 옳은 길이라 인정해 줌으로써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말을 하는 예언자(설교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공동체가 더 나빠진다.”

“설교자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이 곳에서 자신을 통해 하시려는 말씀을 해야 한다.”

박동현 박사(장신대 퇴임교수)는 “옛 시대에 하나님이 말씀의 일꾼들을 통해 말씀하심, 또는 그렇게 하신 말씀을 예언이라 한다면 오늘의 설교 뿌리는 예언에서 찾을 수 있다”며 “오늘의 설교자의 뿌리도 구약의 예언자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언자와 설교자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다. 그 때 그 때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예언자라면 설교자는 이미 주어진 본문을 밑바탕으로 하여 그 말씀이 각 시대에 뜻하는 바를 알리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예언서인 예레미야에서 설교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예레미야서는 주전 6세기 말부터 40여 년간 활동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뒤이어 그의 전통 안에서 수백 년 동안 예레미야의 예언을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이해하고, 발전 확대시켜 선포한 내용까지 들어있는 만큼 오늘날의 설교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박동현 박사가 제시한 ‘예레미야에서 배우는 설교의 모범’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1.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라

“꿈을 꾼 예언자가 꿈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말을 받은 예언자는 충실하게 내 말만 전하여라”(렘 23:28).

예언자는 원래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므로 자기 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예언자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예언자들은 결국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로 헛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16절).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다(25절).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한다(26절).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한다(27절).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이다(32절).

오늘 말씀의 일꾼된 설교자들도 설교할 때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전해야지 자기가 꾼 꿈 이야기,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하면 안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이 곳에서 나를 통해 하시려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할 때 보통 맨 먼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성경 곳곳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꿈, 하나님이 주신 꿈도 있지만 사람의 욕심을 채우는 꿈도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교역자인 우리 각 사람이 꾸는 꿈이 사람이 제멋대로 꾼 나쁜 꿈인지, 하나님께 받은 좋은 꿈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레미야 23장 9~32절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잘못된 예언자들은 평소에도 잘못 살아간다. 못된 짓을 한다. 심지어 성전에서도 그리한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해 잘못된 길로 가는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릇된 성공과 번영과 풍요를 약속하는 말을 함부로 내뱉고, 잘못된 길을 옳은 길이라 인정해 줌으로써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을 돕는다.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말을 널어놓는다. 결국 이런 예언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공동체가 더욱 더 나빠진다.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도 자칫 잘못하면 이런 거짓 일꾼이 될 수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이야기, 내 꿈이 아닌 하나님의 꿈, 내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아간다.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로 돌아오게 이끈다. 함부로 만사형통을 약속하지 않는다. 복음을 값싸게 팔아넘기지 않는다.

2.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라

예레미야 시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렘 23:18)고 한탄하신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은 보내신 적이 없다고 한다(렘 23:21). 예언자는 자신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당신의 말씀의 일꾼으로 삼으셔야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 있어야 내가 예언할 수 있다. 그래서 예언자는 예언하기에 앞서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말이, 자기 꿈 이야기, 자기 마음에 있는 말뿐이다.

오늘 말씀의 일꾼인 우리도 남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에 앞서 들려줄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씀의 일꾼은 죄악된 삶에 지쳐 힘들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여 일으켜 세울 사람인데, 그러자면 먼저 늘 하나님께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먼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이 있어야 한다.

3. 올바른 전통을 보존 계승하라

그런데 거짓 예언자일수록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참 예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면서 참 예언자를 못살게 군다. 예레미야 27장~28장에 나오는 하나냐가 그런 사람이다.

백성들의 고난이 오래 지속되리라고 하는 예레미야의 예언보다는 곧 고난이 끝난다고 하는 하나냐의 예언이 백성들로서는 훨씬 더 듣기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맡기시는 예언을 전하는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올바른 에언 전통을 바탕으로 하나냐를 꾸짖는다.

 

 

예로부터 예언자들은 주로 재난을 예고해왔듯이 자신도 그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냐가 지금 곧 재난이 끝난다고 예언하는 것은 이러한 전통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문제는 예언의 내용이 성공과 번영이냐 실패와 재난이냐에 있지 않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예언하느냐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임금이나 백성이 하나님을 거스르면, 실패와 재난을 예고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이나 백성에게 그저 평화를 예언한다면 이것은 다른 까닭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언자 자신이 그 사람들에게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아합 시대에 북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왕궁의 덕을 보던 사람들이었다. 이는 갈멜 산에서 엘리야가 맞선 850명의 예언자를 가리켜 “이세벨에게 녹을 얻어먹는”(왕상 18:19) 예언자들이라고 한 데서 잘 나타난다.

예레미야와는 달리 곧 구원과 회복의 시대가 오리라고 예언했던 하나냐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임금과 높은 관리들이 바빌로니아로 사로잡혀 가는 엄청난 사건이 눈 앞에서 일어났지만 모든 것이 다시 이전처럼 잘 되리라는 식으로 말함으로써 하냐냐는 유다 백성에게 희망을 품게 해주는 훌륭한 예언자로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평화를 예언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예레미야보다 한 백 년 전에 예언활동을 했던 미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미 3:5).

결국 성공과 번영의 예언을 할 것인가, 실패와 재난의 예언을 할 것인가는 하나님이 그 예언자에게 맡기신 말씀의 내용이 아니라 예언자 자신에게 비칠 이익에 따라 정해졌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일꾼인 설교자에게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판단을 따라 그저 회복과 성공, 번영을 약속하는 설교를 하고 싶은 유혹이 늘 있다. 그럴 때마다 설교자의 본분은 올바른 예언의 전통을 따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전하는데 있음을 새롭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해, 심지어는 내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제쳐 놓고 듣기 좋은 말로만 설교하는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아보며 삼가야 한다.

4. 오해와 박해가 예상되더라도 정직하게 설교하라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하실 말씀을 그대로 전하다보면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사람들이 엉터리라고, 잘못된 교역자라고 하며 외면하거나 내칠 수 있다. 따돌릴 수 있다. 아예 없애버리려고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을 그 누구보다도 예레미야는 뼈저리게 험했다.

예레미야 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 등 예레미야의 고백이라고 이름붙인 탄식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유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붙잡히기도 했고, 매를 맞기도 했으며, 목숨을 빼앗길 처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의 잘못을 꾸짖었다.

결국 오늘 우리 말씀의 일꾼인 교역자들은 예레미야에서 알 수 있는 예레미야의 예언과 삶에서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보다 무엇을 설교하는가가 더 중요함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설교는 하나님이 오늘 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려는 말씀을 잘 알아듣고, 잘 전하는 것인 만큼 그렇게 설교했을 경우에 듣는 사람들이 보일 반응이나 자신에게 미칠 영향에 너무 마음 쓸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에게서 오늘 우리는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청중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 때문에 내게 큰 어려움이 닥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정직하게 설교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4장 3~5절의 권고가 이를 뜻한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5. 삶 전체의 설교, 특별한 행동의 설교

예레미야는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려다가 한평생 괴로움을 겪는다. 결국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는 괴로움이 예언자의 삶 가운데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예레미야는 고난으로 가득 찬 한 평생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린 것이다. 그는 말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로 예언했다.
오늘날의 설교자인 우리들도 예배 시간에만, 그것도 입으로만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한 교역자의 삶 전체가 하나의 설교일 수 있다. 메시지일 수 있다. 또한 그 삶 가운데서 때때로 별난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땅에 알리시고자 하는 뜻을 인상 깊게 드러낼 수 있다.

히브리서 1장 1절~2절에서 하나님이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오늘의 설교자도 말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도 설교해야 한다. 또 설교 시간에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서, 아니 한 평생의 삶으로서 설교해야 한다.

#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 좋은 전통을 계승해 발전시키는 설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할 때 이스라엘의 여러 예언 전통을 잘 계승해 발전시킨 예언자다. 특히 예레미야는 북왕국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왕국의 전통만 지키려고 고집한 것은 아니다. 지난날 남왕국에서 예언했던 선배 예언자들의 예언도 예레미야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한 교단의 전통을 존중해 보존하고 계승하여 발전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만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속한 전통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다른 여러 전통을 잘 살펴 좋은 것은 받아들여 활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진보 성향의 사람들이 전통적인 성경공부나 기도생활 등에 이전보다 더 정성을 들이는가 하면,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정의 실현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런 노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2. 여러 가지 문학 형식을 잘 활용하는 설교

구약의 다른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는 여러 가지 문학 형식이나 표현방식을 활용한다. 예레미야서에는 시로 되어 있는 예언뿐만이 아니라 산문으로 되어 있는 수난의 이야기, 소명 이야기, 상징행위 이야기도 들어있다.

전해 받은 말씀을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해 설교조로 말하는 글도 있다. 편지 형식의 글도 있다. 예언자나 백성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탄식이나 탄원의 글도 적지 않다.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늘 한 가지 형식으로 설교하기보다는 여러 문학 형식을 활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다. 보통은 연설체로 설교하지만 때로는 시도 읽을 수 있다. 남의 이야기를 마치 나의 이야기체로 바꿔 이야기할 수 있고, 나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고쳐 말할 수 있다. 탄식의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도록 애잔하게 말하기도 하고, 희망과 용기나 느껴지도록 밝고 강하게 말할 수도 있다.

* 한편, 위의 내용은 연세대 신과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이 지난 2014년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설교자가 묻고 성서가 답하다’를 주제로 개최한 2014년 미래교회 컨퍼런스에서 발표된 박동현 박사의 ‘예언서 예레미야에서 배우는 설교’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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