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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본문

선교와 신학

[원문] 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데오스앤로고스 2015.12.14 12:03

 

이형기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공적신학연구소소장) / 2014년 5월 7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5월 2일(2014년) ‘부산총회 이후 WCC의 영성’을 주제로 개최한 ‘제21회 영성포럼’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제공 단체(자)와의 협약에 의해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1982년 ‘선교와 전도’와 2013년 마닐라 ‘선교와 전도’의 비교 연구 
이형기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공적신학연구소소장)


들어가는 말

CWME는 2006년 포르트 알레그로 제9차 WCC 총회 이래로 하나의 새로운 선교와 전도신학 성명서 작성을 향하여 연구하고 기여해 왔다. 이 새로운 성명서는 2013년 부산에서 열리는 제10차 WCC 총회에 상정되었다. 1961년 뉴델리 WCC 총회에서 IMC와 WCC가 통합한 이래로 WCC 중앙 위원회가 인정하는 유일무이한 선교와 복음전도 신학지침서는 1982년의 ‘선교와 복음전도: 하나의 에큐메나칼 확언’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작성된 본 마닐라 지침서는 중앙 위원회에 의하여 2012년 9월 5일에 공인되었다. 본 문서의 목적은 변화된 지형 속에서 ‘선교와 전도’에 대한 하나의 새로워진 이해와 실천을 위한 비전과 개념들과 방향들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 본성명서는 WCC 회원 교회들과 관련 기구들의 울타리를 넘어서 매우 넓은 범위의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에게 대한 호소력을 지닌다. 그리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하나님에 의하여 인도되어 지는, 모두를 위한 생명 충만을 향하여 함께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CWME의 역사상 첫 ‘에큐메니칼 세계선교와 전도 신학지침서’가 1982년에 나왔고, 두 번째 것이 2013년에 나왔다. 전자가 1928년 예루살렘 IMC 이후, 그리고 1963년 멕시코 CWME, 1973년 방콕 CWME, 1980년 멜보른 CWME의 결과물들을 담아 낸 ‘지침서’라고 하면, 후자는 1989년 산 안토니오 CWME, 1996년 살바도르 CWME, 그리고 2005년 아테네 CWME의 선교와 전도신학을 담아낸 지침서이다. 이제 우리는 2013년의 지침서가 1982년 지침서와의 어느 정도로 연속성을 보이고 있고, 그 이후 30년 동안 일어난 변수들에 따른 신학을 잘 담아내고 있지를 살피려고 한다.

Ⅰ.1982년 선교와 전도 신학지침서의 신학적 특징들

1982년(󰡔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 Mission and Evam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의 신학적인 특징들을 간단히 짚고 넘어 가려고 한다. 그 이유는, 1982년 지침서와 2013년의 그것이 그것들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1982년 지침서(이하 ‘확언’)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확언’은 18-19세기적 ‘복음주의’ 전통의 ‘복음전도’와 WCC 전통의 선교신학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확언’은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교신학을 제시한다. 즉, 복음주의적 회개와 순종으로의 부르심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라들, 집단들 및 가정들의 호심과 순종도 언급한다. 교회는 전쟁에서 평화로, 부정의에서 정의로, 인종주의에서 연대성(solidarity)으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변혁되어야 할 필요성을 선포해야 한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란 그의 나라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하나님의 선교 안에 있는 교회와 교회일치’, ‘그리스도의 방법에 따른 선교’, ‘6대주 5대양 안에서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선교’, 그리고 ‘현존하는 종교들의 사람들 사이에서의 증언을 논하고 있다.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에서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전통에 입각한 넓은 의미의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서 주장한다.

‘확언’은 ‘하나님의 선교’와 같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을 비판하고 나온 1974년의 ‘로잔 복음주의 세계대회’와 ‘온전한 복음, 전 인격, 전 교회, 온 누리’를 주장했던 1975년 WCC 총회의 통전적 측면을 염두에 두면서 복음 설교를 통한 개인의 회심과 개 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부각시키면서 하나님의 선교로 나갔다. 그러나 라이저의 논지대로 ‘확언’은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론 및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으로의 패러다임 이동을 보여주지 않고 있으며, 아직 ‘JPIC’에 대하여도 다루지 못했다.

Ⅱ. 2013년 ‘마닐라 세계선교와 전도신학지침서’

1. 30년 동안 변화된 상황

이 글은 아래에서 7가지 변화된 상황들을 제시하면서 WCC가 각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신학적으로 대응하였나를 살피려고 한다. 그 목적은 ‘마닐라 지침서’ 역시 그와 같은 변화된 상황들에 대한 ‘선교와 전도’의 신학적 응답이었음을 밝히는 데에 있다.

1) 창조세계보전과 생명

1972년 유럽의 경제학자와 과학자, 기업인 등 36명으로 구성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와 ‘스톡홀름 유엔인간환경회의’가 출범하면서, 지구환경문제는 글로벌 이슈가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1975년 나이로비 WCC 총회가 교회의 사회참여를 위한 이상(理想)으로서 “정의롭고 참여가능하며 지속가능한 사회”(JPSS: a 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를 제시했고, 1979년 MIT ‘교회와 사회 세계대회’가 그것을 숙성시켰으며, 1983년 밴쿠버 WCC 총회의 ‘정의평화 창조보전’(JPIC)을 등장시켰고, 1990년 서울 ‘JPIC 세계대회’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창조세계의 보전’(integrity of the creation)의 틀 안에서 ‘생명의 신학’이 신학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창조세계보전’(IC)의 문제는 ‘정의와 평화’ 문제와 맞물려 있다. 과학과 기술에 의한 자연에 대한 탐욕적 정복,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자연환경파괴, 무한경쟁과 무한 소비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글로벌화로 인한 자연착취, 이로 이한 기후변화와 자연재해 등은 경제적 부정의의 예증이요, 세계 제1, 2차 대전과 같은 전쟁과 핵 실험으로 인한 자연에 대한 오염 등은 모두 반(反) 평화의 예증일 것이다.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의 보전’(JPIC)운동이야 말로 교회와 인류가 추구해야 할 ‘샬롬의 생명공동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건강한 ‘창조의 세계’만이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인류 공동체 역시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 공동체와 ‘창조세계 안에 있는 생명체들의 공동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집 역시 ‘생명’의 집이다.

2)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글로벌화: 글로벌화 과정 속에서 교회와 신학의 주변화

우리는 글로벌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와 정보통신 역시 글로벌화 되었다. 온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변형되었고, 글로벌 시민들은 컴퓨터를 통해 빠르게 소통하고 있다. 바로 이 시기 동안에 사람들의 주변화(빈익빈 부익부), 환경의 주변화, 그리고 교회 및 기독교 신학의 주변화가 초래되었다. 또한 교회와 기독교 신학은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났다. 주변화 된 나라와 지역의 교회와 신학은 이중적인 주변화와 사사(私事)화(privatization)와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미 등 종전의 기독교 종주국들 안에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급감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의 중심축이 북반구로부터 남반구로 이동하고 주변부의 세력화가 부상하고 있음을 본다.

그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도전에 대하여 계속해서 응전해 왔다. 이 부분은 󰡔기독교 신앙과 오늘의 세계경제󰡕(1992), 󰡔하라레 총회 보고서󰡕(1998), 그리고 󰡔아가페 문서󰡕(2006)에 잘 나타났다. 또한 1998년에 나온 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Today는 “글로벌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새로운 선교신학지침서의 새로운 변수라고 언급하였다.

3)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우리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정보통신’의 글로벌화로 인해 초래되는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 이슈를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다양성, 미시담론들, 보편(universals)이 아닌 특수(particulars), 다름과 차이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네트워크와 파트너십과 연대성이 아니라 흩어짐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다문화 글로벌화 시대 속에서 자신의 문화전통과 정체성을 귀하게 여기면서 타문화 공동체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문화적 코이노니아를 추구하고, ‘다문화 공동체들로 구성된 하나의 인류 공동체’(the Community of humankind of diverse cultural communities)를 구축해야 한다. 한 문화가 타문화 속에 침투하는 페리코레시스를 추구하면서도, 타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다양성을 뭉개서 제3의 무엇을 만들지 않는 다양성 속에서의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는 문화 공동체를 성취하여 하나님 나라를 앞 당겨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1996년, 살바도르 CWME의 보고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에 대한 WCC 선교신학의 공식적인 응답이었다. 첫째로 하나의 복음과 종말론적 소망이라고 하는 통일성의 축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다양한 문화로 표현되는 기독교라는 다양성의 축이 살바도르 CWME의 선교적 비전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살바도르는 다가오는 종말론적 새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역사의 지평 속에 있는 다(多)문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복음에 의해서 이 다(多)문화가 개변될 것을 촉구한다. 둘째로 살바도르는 인종, 성, 종족, 나이 등 한 사회 안에 있는 특정 집단들에 관련된, 문화의 구조적 요소들, 즉 ‘정체성’의 문제를 ‘공동체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논한다. 살바도르는 인종, 성, 종족, 나이로 인한 소외를 극복하고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 동아시적 가치(불교와 유교와 힌두교 등)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도 글로벌 공동체의 가치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정체성과 공동체성의 문제이다.

4) 오순절주의를 비롯한 세계기독교의 지형변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기독교의 지형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여파로 이민과 민족이동이 글로벌화 되었고 지구는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지구 남반구와 동쪽에서 오순절교회들과 은사주의 형태의 기독교들이 선교적 열정을 보여주고 있고,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뻗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풀뿌리 대중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 인구의 역전을 가져왔다. 이는 세계기독교를 더욱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선교운동과 대중운동은 기성 제도권 교회의 지도 없이 자발적 선교활동으로 표출되었고, 때로는 통일성을 무시하는 다양성을 지향하기도 했다. 향후 기독교의 과제는 이러한 새로운 선교운동들과 흐름들이 어떻게 기존의 교회들과 화해하고 조화롭게 함께 나가는 ‘세계기독교’를 구축할 수 있는가에 있다. 따라서 ‘마닐라 선교지침서’는 성령의 새로운 바람에 교회가 응답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와 같은 글로벌 남쪽과 동쪽에서 일어나는 기독교적 운동이 ‘하나의 세계기독교’의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세계에 있어서 변화의 바람은 확실히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바람이 되라고 요청한다. 그와 같은 교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은 오직 이 세상의 삶 속에 다시 새롭게 성육신되는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히, 대중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유와 존엄성을 지닌 삶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는 맥락 안에서 그렇다. 그런데 밑에 깔려 있는 교회를 향한 핵심적인 도전은 권력의 문제이다. 주류에서 벗어난 혹은 주변에 있는 글로벌 남반구 안에 있는 교회들의 목소리들과 어젠다가 국제선교 및 에큐메니칼 협력 안에서 아직 충분이 인식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제95항)

5)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보편주의

필자는 본 주제에 대하여 『세계교회 협의회와 신학』‘Ⅳ. WCC와 삼위일체론’과 ‘Ⅶ. WCC와 종말론’에서 충분히 논하였다. 간단히 약술하면, 1991년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와 󰡔1991년 캔버라 WCC 총회 보고서󰡕를 계기로 그 이전의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가 ‘삼위일체론’으로 패러다임 전환하였고, 종말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에 정향된 종말론으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의 보편주의’에 정향된 종말론으로 패러다임 전환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삼위일체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를 폐기처분한 것은 아니지만.

6) 미래 지향적이면서도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마닐라는 라이저의 삼위일체론적 패러다임 전환에 더하여 미래 지향적 종말론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틀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1990년대의 신앙과 직제 문서들에서 교회론을 비롯한 다른 신학적인 주제들에 접근할 때에 삼위일체론과 종말론에 주목해야 한다.

미래 지향적이면서도 현재적인 종말론은 1950년대 WCC와 IMC문서에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종말론이 매우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교회론(신앙과 직제)과 사회윤리(삶과 봉사)를 하나로 묶는 󰡔교회와 세상: 교회의 일치와 인류 공동체의 갱신󰡕(1990)부터였고, 1991년 캔버라 WCC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본 캔버라 총회는 성령을 ‘생명의 부여자’(the Lord and Life-Giver,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보면서 성령의 성부 성자와의 관계적 독립성을 부가시켰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하지 않는다. ‘창조주 아버지’와 ‘창조의 영’(Creator Spiritus)의 구별 그리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의 부여자로서의 성령’의 구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 성자 성령의 페리코레시스 통일성 혹은 다양성 속에서의 코이노니아가 중요시되었다. 특히, 우리는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고백된 사도적 신앙에 대한 하나의 에큐메니칼 해설서󰡕(1991)에서 삼위일체론과 미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한 주장들을 발견한다.

7)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세계선교와 복음전도’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

1982년의 󰡔선교와 복음: 에큐메니칼 확언󰡕의 시기와는 달리 1990년대 접어들어서면 ‘신앙과 직제’와 ‘삶과 봉사’가 신학적으로 합류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1993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는 대회 총 주제(Towards Koinonia in Faith, Life and Witness)에서 ‘사도적 신앙’(Confessing the One Faith: An Ecumencial Explication on the Apostolic Faith as it is Confessed in 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381), 1991)을 고백하는 코이노니아, ‘세례 성만찬 직제’(1982년에 BEM Text가 출판)를 상호 인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코이노니아, 그리고 삶과 봉사 및 CWME 전통을 아우르는 ‘증언’을 통한 코이노니아를 다루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과 직제’와 ‘삶과 봉사’ 그리고 ‘세계선교와 전도’가 상호 교류하고 침투하며 상호 의존하고 상호 불가 분리한 관계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1990년대 ‘Costly Unity’, ‘Costly Commitment’, ‘Costly Obedience’ 문서도 ‘신앙과 직제’와 ‘삶과 봉사’의 신학적인 합류에 다름 아니고, 2005년 󰡔교회의 본성과 선교/사명󰡕은 교회론을 ‘삶과 봉사’ 및 ‘CWME 전통’과 긴밀히 연결시켰고, 2005년 아테네 CWME 문서 역시 이 세 운동을 포괄하였다. 나아가서 2012년의 마닐라 선교지침서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그대로 나타났다.

2. 2013년 ‘마닐라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신학지침서’의 특징들

여기에서 필자는 2013년 문서가 1982년 문서와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7가지 변수에 따른 신학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것을 추적하려고 한다.

1) 창조세계보전과 생명에 관련하여

제1-11항은 마닐라 지침서의 주제(Together Towards Life) 전체를 소개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앞서 제시한 ‘창조세계보전과 생명’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보편주의의 패러다임 이동’을 발견한다. 본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도 아이디어(leading ideas)로 하여 삼위일체론적 성령, 생명,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새로운 신학의 초석으로 깔고 있다. 1982년 지침서가 여전히 기독론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면, 2012년 지침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론적인 성령, ‘생명’,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같은 ‘신앙과 직제’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복음의 우주적 범위, 선교와 전도의 중심축의 이동, 신자유주의의 맘몬 숭배에 대한 대응, 복음과 종교간 대화의 문제 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삶과 봉사’ 전통이 본 문서의 ‘선교’부분뿐만 아니라 ‘전도’의 모든 부분에도 스며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와 전도 신학’ 자체의 패러다임 전환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제12-35항은 앞에서 지적한 삼위일체로적 성령론을 바탕으로 ‘선교의 성령: 생명의 숨결’이란 제하에 ‘성령의 선교’(제12-18항), ‘선교와 창조세계의 번영’(제19-23항), ‘영적인 은사들과 분별력’(제24-28항), 그리고 ‘변혁적 영성’(제29-35항)에 대하여 논한다. 이제 이글은 ‘성령의 선교’와 ‘선교와 창조세계의 번영’에 대한 부분만을 소개한다.

⑴ 성령의 선교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보편주의’와 ‘창조세계보전과 생명’의 신학적 틀이 반영되어 있다. 본문은 동방정통교회의 영 기독론(Spirit-Christology)과 서방교회의 기독론적 성령론(Christological Pneumatology)을 종합하고 있다.

영 기독론은 창조세계와 보편사 속에서 현존하시고 사역하시는 구약의 ‘루아흐’ 야훼께서 부활 이전 예수님의 위격과 사역에 선행하시면서 사역하셨다는 것이며 기독론적 성령론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사도들과 교회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성령의 선교(혹은 경세)는 “창조세계 안에서의 성령경세의 보편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실현하는 성령의 특수성으로서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성령의 선교로 이해되어야 한다.”(제15항) 끝으로 제18항은 ‘종말 이전의 지평’(the pen-ultimate)인 교회와 세상에게 성령을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이 성령에 의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의 핵심에 놓여 있는 사랑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의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끊임없이 선포하고 항구적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된 온 세계에의 참여를 긍정하는 기독교적 증언이다.(제18항)

⑵ 선교와 창조세계의 번영

이 부분은 주로 ‘창조세계보전과 생명’에 관련된다. 여기서 성령은 삼위일체론의 틀 안에서 창조의 영이고, 창조보전을 지탱하는 영이고, 생명을 부여하고 살리는 ‘생명의 영’(the Lord and Life-Giver)이시다. 제19-23항은 우리의 선교가 영혼구원 만을 위한 선교 혹은 이분법적 선교가 아니라 ‘창조된 모든 세계’에 대한 선교라고 선언한다. 인간의 구원과 창조세계의 구원은 불가분리하기에 선교는 ‘삶과 봉사’ 영역을 포함한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흘러넘침이다. 창조세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은 상호 엮어 짜여 있다. 하나님의 영의 선교는 항상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행동 안에 우리를 포함한다. …”(제19항). 따라서 루아흐 야훼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창조된 생명과 우리의 화해된 관계’(제19항)를 이루며 ‘새 하늘과 새 땅’(제20항)을 지향하고 있다. 즉, 루아흐 야훼께서 창조세계 속에 현존하시고 사역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사역(구속사역)이 인간 중심주의와 교회중심주의를 넘어선다고 하는 뜻이다.

2)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글로벌화 과정 속에서 교회와 신학의 주변화와 관련하여

제36-54항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그에 따른 주변화의 심각성을 논한다. 본 항목은 ‘해방의 성령: 주변으로부터의 선교’의 제하에 본 주제에 대한 개관(제36-37항), ‘왜 주변들이고 주변화인가?’(제38-42항), ‘투쟁과 저항으로서 선교’(제43-45항), ‘정의와 포용성을 추구하는 선교’(제46-49항), 그리고 ‘치유와 온전성으로서 선교’(제50-54항)를 말한다. 본 지침서는 ‘해방의 성령: 주변으로부터의 선교’에서 선교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종말 이전의 지평’ 안에서 ‘주변’의 의미와 중요성을 본다. 즉, ‘중심’과 ‘주변’의 변증법은 ‘종말’과 ‘종말 이전’의 그것이지, 칼 마르크스적인 유물론적인 역사적 변증법이 아니다.

선교의 목적은 인류로부터 특수한 사람들의 영혼만을 구원하거나 가난하고 소외되었으며 주변화 된 특수 계층의 사람들만의 해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과 지혜로 창조하신 것을 재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제36항)에 정향(定向)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이 ‘중심’을 정복하는 것과 같은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한 본문은 “생명 충만이 모든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들에게 주어지는 그와 같은 세계를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영”(제37항)을 언급하고, 예수께서 주변화 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이들을 우선배려하신 것은 “이들의 상황들이 이 세상의 죄 성을 증언하였기 때문이다.”(제36항)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본 마닐라 지침서에서는 1981년 멜보른 CWME(특히, 제3 섹션)의 해방신학적 색깔이 전적으로 삼위일론,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생명, 그리고 보편주의적인 하나님 나라에로 재 정향(定向)된 것으로 보인다.

‘투쟁과 저항으로서 선교’: 본문은 “역사와 창조 안에 있는 구체적인 실재들과 맥락들 속에서 행동하시고 정의와 평화와 화해를 통하여 온 땅의 생명 충만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전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착취하고 노예화하는 마귀들을 분별하고 노출시키는 것을 포함 한다”고 한다.(제43항) 그리고 본문은 가부장적(온정적인) 이념들의 해체, 토착민들을 위한 자결권 확보, 그리고 인종주의와 카스트 체제의 사회적 뿌리에 대한 도전과 같은 것들을 악마적인 것에 대한 응전으로 본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서적 하나님의 본성과 주권 그리고 특히 예수님의 선교의 길이 ‘주변’이고 그것에 반대되는 길이 ‘중심’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단순히 칼 마르크스와 해방신학 전통의 갈등구조로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와 포용성을 추구하는 선교’: 투쟁과 저항으로서 선교는 잘못된 ‘중심’에 반대하는 운동이고 결국 “하나의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계의 구현”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특히, “포용성이란 인격들과 창조 간의 상호 인정 그리고 각자의 성스러운 가치에 대한 상호 존중과 지탱을 지니고 있는 인류와 창조의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로운 관계를 양육시킨다.”(제46항) 따라서 선교는 단순히 ‘중심’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고 포용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이와 같은 포용성은 각 사람으로 하여금 공동체의 삶에의 충만한 참여를 촉진한다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세례”에 대하여 언급한다.

‘치유와 온전성(wholeness)으로서 선교’: 2005년 아테네 CWME문서는 “교회의 치유사역”(Preparatory Paper 11)에서 ‘통전적 치유’를 주장한다. 본문은 의료와 의약과 보건, 그리고 오순절 교회의 치유사역을 포괄하면서도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전망에서,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와, 창조와 인류 모두의 완성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치유를 이해한다. 현 창조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치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학적인 전망으로부터 교회의 치유사역에 대하여도 통전적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치유되고 화해된 온전한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주변’이요 ‘주변화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본문은 “개인인격들과 공동체들의 생명과 삶의 치유와 온전성을 향한 행동들이 다름 아닌 선교의 중요한 표현이다.”(제50항)라고 한다. 즉, 복음서의 치유은사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고전 12:9; 행 3)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는 한편 기도, 목회적 돌봄, 전문적인 보건, 그리고 다른 한편 고통의 뿌리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 부정의를 일삼는 구조들에 대한 변혁 및 의술과 의약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 등을 포함하는 생명양육 선교를 위하여 교회에게 능력을 실어 주신다.”고 하였다.
따라서 장애인이나 환자는 뭔가 ‘결핍된 개인’(제52항) 혹은 죄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제자리를 차지해야 할 매우 고귀한 인격이다. 그런즉, “치유란 결핍으로 이해된 그 무엇을 교정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온전성(wholeness)의 회복에 대한 것이다.”(제52항) 그리고 “온전해 지기 위해서 소외된 부분들은 다시 되찾아질 필요가 있다.”(제52항)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치유되고 온전해 진’ 궁극적인 생명공동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이자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해방을 갈망하고 있는 창조세계의 일부로서 교회”(제54항)는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이 된다.

3) 포스트모더니즘과 다 민족 다문화 다 종교와 관련하여

제80-100항은 ‘오순절의 성령: 모든 인간과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복음화로의 부름’(제80-85항), ‘그리스도의 방법에 따른 복음전도’(제86-92항), ‘복음전도, 종교 간 대화 그리고 기독교적 현존’(제92-96항), 그리고 ‘복음전도와 문화들’(제97-100항)에 대하여 선언하였다. 여기에서 ‘오순절의 성령’은 ‘루아흐 야훼’가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약속을 따라 파송하신 성령이시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신 기독론적이고 구원론적이며 교회론적인 성령이시다. 그런데 이 섹션의 제목에서 “오순절의 성령”을 ‘복음’의 보편성과 일치하는 “모든 인간과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좋은 소식”이라고 표현하였다.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 민족 다문화 다 종교’의 이슈가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두 섹션만을 소개한다.

‘복음전도, 종교간 대화 그리고 기독교적 현존’: 본문은 루아흐 야훼로서 “하나님의 영이 생명을 긍정하는 모든 문화들 속에서 발견된다.”(제93항)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여러 다른 신앙들과 이념들과 확신들의 사람들”과의 대화하고, 파트너십을 맺고 연대할 것을 주장한다. 다문화 다종교의 “다양한 생명살림의 영성(diverse life-giving spiritualities)들 안에 본유적 가치들과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빙성 있는 선교란 타자를 선교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로 삼는 것이다.”(제93항)라고 한다.

본문은 위와 같은 논지를 가지고 “대화”와 “복음전도”를 정의한다. 우선 종교적 차원 이외의 대화도 루아흐 야훼의 보편적인 현존과 사역을 전제로 하는 바, 그와 같은 대화는 인류와 창조가 함께 사는 생명 공동체를 목표로 삼는다. 즉, “대화란 생명의 긍정과 창조보전 차원에서 우리의 공동 생명과 목표들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타종교들과 대화에 관하여는, 루아흐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 역시 구약과 신약이 증언하기 전에 그리고 교회가 만나기 전에 타종교들 안에 이미 선재(先在)하고 있었다고 하는 전제를 강하게 내세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타종교들에게 하나님을 운반해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재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해야 한다.”(94항)고 한다.

그리고 ‘복음전도와 대화’의 차이점과 관계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복음전도와 대화는 차이가 있지만 상호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에 도달하기를 희망하고 기도하지만, 복음전도가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대화란 또한 ‘헌신들의 상호 해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나눔은 대화 안에서 합당한 자리를 갖는다.(제95항)

끝으로 본 섹션은 “소수 종교 집단과 종교적 자유를 보호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의 선(the common good)에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제96항)고 한다. 그런즉, 모든 문화들과 이념들과 종교들이 창조와 어우러지는 하나의 지구생명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 가지이다.

‘복음전도와 문화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거기에(cosmic Christ가 다문화와 다종교 등 안에: 역자 주) 현존하시고 하나님의 영(루아흐 야훼)이 거기에서 사역 하신다”(제97항) 라는 전제를 가지고 “복음은 특수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실재들에 참여하면서 상이한 맥락들 속에 뿌리를 내린다.”(제97항)고 한다. 따라서 본문은 18-19세기 서구와 북미의 문화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 복음전도를 비판하면서, 서구와 북미의 “선교주체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소유권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소수자들과의 파트너쉽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들 소수자들의 신학적인 자원들과 비전들에 의하여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제98항)고 한다. 본문은 모든 인간들과 모든 문화와 종교들에게 바벨탑의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을 반대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에 제자들의 설교가 개인의 특수성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손상하지 않고 존중하는 통일성을 가져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4) 오순절주의를 비롯한 세계기독교의 지형변화와 관련하여

본 논지(a thesis)는 매우 중요하다.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미국의 일부와 유럽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기독교 물결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반구는 기독교의 내리막길을 그리고 남반구를 오르막길은 걷고 있는 것 같은 요소 역시 지형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마닐라 지침서가 작성되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세계 기독교의 지형변화인데, 거기에 오순절 교회도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제55-79항은 “공동체의 성령: 움직이는 교회”라고 하는 제하에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생명과 삶(제55-58항),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일치’(제59-66항), ‘하나님께서 선교하고 있는 교회에게 힘을 주신다.’(제67-71항), 그리고 ‘개체교회들: 새로운 창의적 주도성’(제72-79항)에 대하여 논한다. 그런데 본 마닐라 지침서는 본 ‘교회’에 대한 선언에 24개 항목을 할애하면서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필자는 이 중에 우리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제72-79항을 살펴본다.

‘개체교회들: 새로운 창의적 주도성’: CWME는 여기에서 WCC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소홀히 여기기 쉽고 도외시 하곤 하는 ‘개체교회들의 새로운 창의적 주도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구원과 개 교회주의와 ‘교회주의’(ecclesaisticism)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본문에 따르면 세속화된 북반구 교회들은 ‘새로운 수도원주의’, ‘이머징 처치’, ‘신선한 표현들’과, 젊은이들의 ‘팝스와 커피 점 혹은 개조된 극장’에서의 모임과, ‘온라인 예배참여’와 같은 새로운 맥락적 상황들에 직면하면서, ‘새로운 형태들의 맥락적 선교’를 생각해야 한다며,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도 소중하지만, 각 지역 교회들(혹은 개체교회들)이 성령에 의하여 그들 자신의 특수한 맥락적 실재들에 응답하도록 인도되는 방법들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제72항)고 하였다. 그러니까, 교회들의 통일성과 다양성 문제에 있어서 ‘다양성’의 새로운 면모들과 새로운 다양한 선교적 맥락들이 클로즈업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본문은 위와 같은 새로운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염두에 두면서, “사도행전의 초기교회처럼 개체 교회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의하여 특징 지워지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시킬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제73항)고 하고, “그러므로 개체 교회들은 선교의 성령에 의하여 끊임없이 갱신되고 영감 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개체 교회들은 선교의 최 일선이요 우선적 대행자들이다.”(제73항)라고 한다. 이어서 본문은 “예배와 성례전들은 변혁적 영성과 선교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개체 교회들이 자신들이 처한 맥락에 적용하기 위한 성서해석을 함으로써 맥락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메신저들과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즉, “교회본당에서의 예배예전이 온전성을 갖게 되려면,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선교를 몸으로 살아내야 할 것이다.”(제74항)라고 한다.

그리고 본문은 개체교회들이 문화적이고 인종적인 경계선을 넘는 것을 강조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며, 그와 같은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다양성을 “성령의 선물들”로 알고, “지역 차원에서 간 문화적이고 다문화적인 교회들”(제75항)이 생겨나야 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그리하여 본문은 “모든 교회들은 상이한 문화적 공동체들이 함께 모이고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간 문화적 선교의 맥락적 표현들을 위한 놀라운 기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제75항)라고 한다.

끝으로 “인권, 성 정의, 기후 정의, 일치와 평화” 그리고 “정의변호”는 국가별 교회들의 총회나 중앙 사무국들의 역할만이 아니라 개체교회들의 것이기도 하고(제77항), 개체교회들은 “섬김의 힘을 나태 냄으로써 지배세력을 부끄럽게 하는 하나의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제78항), 진실로 “개체 교회가 하나의 선교하는 공동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심오하게 발견할 때, 그것의 외형적인 성격은 복음전도로 나타나는 것이다.”(제79항). 이처럼 본문은 ‘선교’와 ‘복음전도’를 이분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동체로서 개교회의 정체성(예배예전, 성례, 그리고 삶)을 강조한 것이 매우 돋보인다. 더 나아가서 이 개교회가 다문화 다종교와의 대화의 최 일선에 있고, “인권, 성, 정의, 기후 정의, 일치와 평화” 그리고 ‘정의변호’ 같은 ‘삶과 봉사’차원의 사명도 최 일선에서 감당해야 한다고 하는 선언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선교’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개체교회들: 새로운 창의적 주도성’은 상당히 최근 개신교회들의 맥락들을 감안하고 있다. 보편교회(the Church)를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와는 대조적으로 개신교는 교회들(the churches)과 개별 교회들을 귀하게 보기 때문이다. 본문은 최근 교회들의 새로운 현상들을 반영하면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 혹은 ‘다양성 속에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다양성 차원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것은 미시담론에 속한다. 본문은 이러한 다양하게 변화되는 새로운 선교의 맥락을 언급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5)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보편주의와 관련하여

콘라드 라이저의 논지(a thesis)에 따른 이 주제는 마닐라 지침서 도처에서 발견된다. 전체 주제를 설명하는 제1항에서 본 지침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의 창조자요 구속자요 지탱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오이쿠메네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이 생명을 긍정하시고 안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 안에서 항구적으로 사역하신다.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이신(요 3:16) 예수 그리스도 곧 이 세상의 생명을 믿는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관심과 선교는 충만한 생명을 긍정하시는 것이다(요 10:10). 우리는 생명의 부여 자이신 성령, 곧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생명을 지탱하시고 힘 있게 하시며 창조세계 전체를 새롭게 만드신다(창 2:7; 요 3:8). 생명에 대한 거부는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살리시는 선교로 초대하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유를 위한 풍요로운 생명과 삶에 대한 비전을 증언케 하신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시는 사역을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분별할 것인가?

제11항에선 이상과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안에서 ‘성령의 선교’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론적 성령의 선교는 본 지침서의 근간이다. 결국, 본성명서의 4가지 주제가 모두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즉, 본 지침서는 ‘선교의 성령: 생명의 숨결’, ‘해방의 성령: 주변들로부터의 선교’, ‘공동체의 성령: 움직이는 교회,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 모든 사람들과 만유를 위한 기쁜 소식’에 대하여 선포한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성령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강조는 1991년 캔버라 WCC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6) 미래 지향적이면서도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필자는 지금까지의 에큐메니칼 운동 전체를 통하여 이 논지를 추적한바 있다. 방금 제5항의 긴 인용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이 나오고 있는 데, 본 지침서는 도처에서 이와 같은 미래 지향적이면서도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제101-112항은 “생명의 축제: 결론적인 확언들”의 제하에 끝맺음하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 바, 이미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매우 응축시킨 확언들이다. 본문은 제101항에서 모든 ‘선교와 복음전도’의 종말론적인 목적을 선언하고, 제112항은 이 종말론적인 목적을 향하여 만유를 초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고백으로 끝맺음한다. 우리는 제101항과 제112항의 본문을 소개한다.

우리는 모든 인류와 창조세계, 특히 생명의 충만을 갈망하는, 억압받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선포하는 사명(the mission)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증언으로서 선교(Mission)란 ‘하나님 나라의 잔치’(눅 14:15)로의 초대이다. 교회의 선교란 그와 같은 잔치를 준비하고 모든 사람들을 생명의 축제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 축제는 풍성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창조와 그것의 풍성한 열매를 축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교의 목적인, 창조세계 전체의 해방과 화해의 한 징표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 함이다.’(요 10:10)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사 65:17)라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전을 긍정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모든 창조세계를 생명의 축제로 초대하신다. 우리는 겸허와 희망 속에서 만유를 다시 창조하시고 만유를 화해케 하시는(who recreates all and reconciles all) 하나님의 선교에 함께 헌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한다.


7)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세계선교와 복음전도’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미 언급한 ‘선교와 창조세계의 번영’(제19-23항)은, 다름 아닌 JPIC와 같은 ‘삶과 봉사’운동 차원의 과제를 다루었다. ‘변혁적 영성’(제29-35항)도 마찬가지이다. 이 항목들은 생명파괴의 권세를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글로벌화(제31항)로 예증한다. 그리고 성만찬의 경험에 비추어서 변혁을 주장하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개인구원론적 차원 혹은 개인성화론적 차원으로 축소하지 않고, “억압과 차별과 상해의 상황들에서 ...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제32항)이라고 한다. 즉 “십자가는 선교와 교회 안에서의 잘못된 권력사용과 남용에 관하여 회개를 요청한다.”(제33항)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생명경험이야 말로 충만한 생명경험이다. 우리는 이로써 생명을 향한 운동에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제34항)라고 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자체 내의 변혁과 아울러 밖을 향한 선교에 헌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이 이미 논한 “해방의 성령: 주변으로부터의 선교”는 ‘신자유주의의 글로벌화’의 역기능에 반대하여, ‘종말’과 ‘종말 이전‘의 변증법으로터 ‘중심’과 ‘주변’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주장한다. 이상은 ‘삶과 봉사’(Life and Work) 전통에 다름 아니다.

끝으로 본 지침서는 전체주제를 설명하는 제10항에서 교회가 ‘일치 안에서 선교에 참여’해야 할 것을 선언한다.

교회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이 세상의 변혁을 위하여 이 세상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의 선교는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요 우리의 세상 속에 임재 해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믿고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요 17:21) 우리들 사이에 있는 분열들과 긴장들을 극복하는, 일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코이노니아로서 교회는 하나의 포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이 세상에게 치유와 화해를 주기 위하여 실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일치’(제59-66항)는, 믿는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속한 형제자매들”이고, “교회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 안에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전을 미리 맛보고 그것을 증언한다.”(제59항)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다름 아닌 선교참여의 하나의 중요한 길”(제59항)이라고 한다. 본 문서는 ‘신앙과 직제’ 전통을 자기 것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1961년 뉴델리 WCC 때에 IMC와 WCC가 통합한 것은 선교를 교회들의 일치와 하나로 묶었다는 의미가 있다. 그 후 1990년대 이후 ‘신앙과 직제’와 ‘삶과 봉사’는 신학적으로 합류하고 있다. 본 문서는 “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선교와 일치는 동일 귀속 한다”(요 17:21)(제60항)고 보고, “그 둘은 서로 함께 엮어 짜여 있다.”(제61항)고 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류와 창조에 대한 선교는 교회의 일치를 인류의 일치와 창조의 일치로 확장시킨다.(제61항) 그리고 교회들은 부족하지만 이미 주어진 일치와 “하나님이 주신 진리와 삶의 은사들”(제63항)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물량적 토대로 다른 교회를 억누르지 말고 “다양성 속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들이 상호 존경하고 책임을 지는 복음전도의 형태들을 포함하는 파트너십과 협력의 정신으로 공동증언의 방법들을 확인하고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제63항)고 선언한다. 그리고 교회들과 유사교회들(para-churches)의 연대도 강조하면서 “유사교회들의 구조는 교회들에게 자신들의 역동적인 사도적 성격을 망각하지 않게 한다.”(제64항)고 덧붙인다. 그후 ‘선교와 일치’의 신학에 관하여 CWME는 로마가톨릭교회, 정교회, 성공회, 그리고 로잔 운동 및 WEA(세계복음주의 연맹) 및 다양한 개신교들의 견해들에 대해 열려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온 교회(the whole church)가 온 누리에게 온전한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하는 공통관심사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제65항)이라고 한다. 그리고 끝으로 성령께서 다름 아닌 교회들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밝힌다.(제66항) ‘일치 속의 선교’ 혹은 ‘선교 속에서 일치’는 매우 오래된 에큐메니칼 운동이 모토이기도 하다.

결론

따라서 우리는 이상의 논의에서 2013년 지침서가 ‘복음전도’(evanglelism)에 관련하여 1982년의 지침서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7가지 신학적 변수들’을 잘 담아내고 있음을 확인 하였다. 특히, 본 문서는 전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생명,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신학적인 전거의 틀로 삼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전거의 틀은 적어도 1990년 이래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가지 흐름(신학, 봉사, 선교) 안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 7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부터 삼위일체 중심적 보편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과 ‘미래 지향적이면서도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로의 신학적인 패러다임 이동이다. 그리고 이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는 것은 동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과 합류한 것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정교회의 “영 기독론”(the Spirit-Christology)이다. ‘영 그리스도론’ 혹은 ‘루아흐 야훼’ 혹은 ‘주님이시요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the Lord and life-Giver)(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에 대한 신앙은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창조세계의 갱신과 관련하여 그리고 복음과 다문화 다 종교와의 관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끝으로 본 문서가 ‘선교와 전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펴본다. ‘오늘의 일치 속에서 선교와 복음전도’(2005년 아테네 CWME문서 중, 준비문서 No.1)는, 어떤 교회들은 선교와 복음전도를 동일 개념으로 그러나 또 다른 교회들은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선교’란 하나의 통전적인 이해이다. 즉, 그것은 케뤼그마, 행동(diakonia), 기도와 예배, 기독교적 삶의 매일 매일의 증언(martyria)에 의해서 복음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나누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의 하나님 관계와 그들 상호 관계를 세우고 강화시키는 교육이요, 사람들을 코이노니아로 인도하는 온전성과 화해로서 치유이다. 여기에서 코이노니아란 하나님과, 사람들과, 그리고 창조세계 전체와의 그것을 말한다. ‘복음전도’란 선교의 여러 상이한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누리고 제자의 도를 실천하는 것을 포함하여 복음의 명시적이고 의도적인 목소리 내기에 초점을 맞춘다.(Preparatory Paper No.1. a and b.)

위의 ‘선교’와 ‘전도’에 대한 정의는 2013년 마닐라 CWME 선교신학 지침서(Together Towards Life: ...)에서도 사용되었으니, 그 정도로 신빙성이 있는 진술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와 같은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선교’에 관하여는 ‘삶과 봉사’(Life and Work) 전통과 중첩되는 바, 이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른 기독교적 삶 전체를 포함할 수 있다.

*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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