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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

[원문] "한국교회, 성경적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4. 11:55

 

지형은 목사 / 성락성결교회 / 2014년 5월 1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4월 11일(2014년) ‘한국 교회 윤리적 삶을 진단한다’를 주제로 개최한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한국교회의 윤리적 삶을 진단한다: 영성과 사회성의 신학적 틀과 연관하여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영성을 신앙의 본질이라고 보고 윤리적 삶을 그 본질에서 나오는 외연의 활동이라고 본다면 이 주제는 교회사에서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저 유명한 신앙과 행위의 문제입니다. 특히 종교개혁과 연관돼 있는 이 주제는 칭의와 성화, 믿음과 윤리, 신앙과 정치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주제는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문제와도 연관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보수적인 쪽이 믿음을 많이 강조해 왔다면 진보적인 쪽에서는 행동을 많이 강조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는가?’ 하는 것은 우문(愚問)이 됩니다.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려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는 것은,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보수 쪽의 믿음 또는 칭의 강조와 진보 쪽의 행동 또는 윤리 강조라는 표현이 너무 도식적인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논의하는 주제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90년대 중반 이후와 2천 년대의 처음 10여 년에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한국 교회 안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의 대립각이 군사독재 시절에 비하여 둔화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치 사회적인 상황의 변화라는 것은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민주화와 인권 투쟁의 치열함이 약해졌고 또 전선도 불분명해진 것을 가리킵니다. 이와 연관하여 진보적인 그룹에서는 민주화 인권 투쟁에서 좀 더 부드러운 쪽 곧 창조 세계의 보존이라는 환경 문제나 영성의 문제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보수적인 그룹에서는 그동안 사회적 책임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자성이 뚜렷해지면서 여러 방향에서 사회적 활동을 모색하고 강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관심이 보수든 진보든 전체적으로 사회봉사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으로 수렴되었습니다. 신학적 목회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를 진지하게 인식하지 않고는 한국 교회의 미래가 없다는 절박한 인식이 뚜렷해졌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교회 침체와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판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부흥을 경험하고 사회적 리더십을 가지려면 사회윤리에 대한 각성과 인식의 전환, 총체적 전략과 종합적 접근, 현장의 실천과 이를 위한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는 데 교계 리더들 사이에 전반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사회윤리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오직 믿음으로’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그룹의 신앙 일변도에 대한 자성 또는 비판이 또 일반적인 공감을 얻은 듯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기독교(개신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강조하다가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행동의 문제를 소홀히 했다는 교회사적 지적은 이런 논의에서 으레 따라붙는 얘기입니다.

이런 상황과 연관하여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려고 합니다. 믿음과 기독교적 실천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신학적 표현으로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입니다. 기독교적 실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있듯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감격에서 기독교적인 사랑 실천의 동력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행동의 동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실천과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나오는 원천인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좋은데 윤리적 삶이 나쁘다’는 논리는 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서 믿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묻기 전부터 선행을 해왔고 또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1520년에 출판된 ‘그릭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는 믿음이 그 안에 윤리적 행동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같은 것을 말씀하신다. 곧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마12:33). 이것은 마치 ‘좋은 열매를 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공적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신앙으로 시작하게 하라. 그것은 신앙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선행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선을 다하여 이것을 소중히 여기며 가르친다. 우리가 업적을 정죄하는 것은 그 업적 자체 때문이 아니고 거기에 덧붙여진 이러한 사악한 부가물과 이것을 통하여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외람된 생각 때문이다.”(지원용역, 종교개혁3대논문, 288-290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로마가톨릭과 치열한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믿음과 상관없는 선행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반박했습니다. 루터의 삶의 자리를 감안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읽는다면 루터가 그리스도인 선행의 중요성을 몰랐다든지 과소평가했다든지 하는 것은 바른 평가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14장에서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믿음과 선행의 관계에 대해 논하면서,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선행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15장, 16장에 칼빈의 논의가 이어지는데 16장 1절에서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그들(교황주의자)은 이신칭의를 통해서 선행이 폐기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선행에 대해서 얼마나 열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추악한 생활로 온 세계를 제 마음대로 더럽히면서도 이렇게 떠드는 그들을 우선은 내버려두겠다. 믿음을 찬양하면 행위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하면서 그들은 이 일을 슬퍼하는 체한다. 만일 행위를 장려하려 강화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곧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곧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분이요 우리의 믿음은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와 거룩함이 문제가 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더 자세히 말하려 한다. 우리는 둘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시며,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기독교강요 중권, 생명의말씀사, 338-339).

성경에 근거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루터와 칼빈은 얼마나 정확하게 같은 이해를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이 이미 그 안에 선행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17-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에서도 뚜렷합니다. 경건주의의 창시자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당시 교회가 타락한 원인이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Der wahre und lebendige Glaube)이 없기 때문이며 갱신과 부흥을 위해서는 이 믿음이 회복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페너가 말하는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은 교리와 삶, 말씀과 삶, 믿음과 실천이 한데 어우러진 것을 뜻합니다. 복음적인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강조함으로써 스페너는 일반적인 선행과 기독교적인 선행을 구분합니다. 일반적인 선행을 인정하고 격려하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에서 나오는 믿음의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나 갱신과 부흥을 경험하려면 ‘윤리적인 삶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성서적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 오늘날 삶의 현장과 역사적 흐름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바로 그 믿음이 약하다고 지적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성과 사회성, 믿음의 확신과 윤리적 삶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교회의 자기 정체성’이 영성 또는 믿음의 확신에 연관된 문제라면 ‘교회의 타자 연관성’은 사회성 또는 윤리적 삶의 문제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습니다. 교회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타자 연관성을 실천합니다.

교회의 갱신과 개혁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이 필요합니다. 영성이라는 개인의 심령 변화와 사회성이라는 사회 구조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한 가지 근원에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확신과 윤리적 삶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에서 통전적인 구조로 작동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적 동력이 작동할 때는 늘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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