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국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알려진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우리에게는 마포삼열(馬布三悅)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그의 사역과 신학을 탐구하는 시간이 진행됐다.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오덕교 박사/전 합신대 총장)가 지난 3월 25일(금) 오후 2시 유나이티드문화재단 더글라스 홀에서 '마포삼열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선교사 사역탐구 시리즈 강좌(1)를 열었다.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으로 진행된 이날 강좌에는 이상규 박사(고신대 명예교수/백석대 석좌교수), 박응규 박사(아신대 교수, 역사신학), 이승구 박사(합신대 교수, 조직신학) 등이 발제자로 참여했다. 발제자들의 발표 내용 중 일부를 정리했다.
마포삼열은 누구인가?
'마포삼열의 내한과 한국선교: 평양지부의 개척, 평양신학교의 설립, 한국장로교의 건설자 사무엘 마펫'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상규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마포삼열(마펫) 선교사는 1890년 1월 25일 자신의 26번째 생일날 내한해 1936년 9월 24일 한국을 떠나기까지 46년간 조선에서 살며, 서울(1890-1893)과 평양(1893-1934)에서 44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1934년 1월 25일 은퇴하였다.
또한 내한 이후 첫 3년간 서울에 체류하면서 조선어를 공부하고 후일 경신학교로 발전한 예수교학당 책임자로 일했다. 이 기간동안 서울 이북지방을 순회 전도하여 평양을 관서지방 선교거점으로 인식하여 1893년 평양으로 이거하였고 평양에서는 ‘사랑방전도’'사랑방전도'를 시작으로 1893년 평양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첫 장로교신학 교육기관인 조선야소교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24년간 교장으로 활동했다. 또 평양의 중요한 교육기관인 숭실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숭의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학교교육에 관여하여 교육선교사로 활동했고, 1907년 독로회장을 비롯한 장로교 치리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한국에서의 장로교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한국에서의 생애 전반에 걸쳐 마포삼열의 사역을 전반적으로 소개한 이 박사는 "그는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좀 더 광의로 말하면 건실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경의 완전 영감설과 신봉했고, 역사적 기독교, 혹은 장로교 전통을 따라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고수하였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를 신뢰했다. 특히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중시했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마포삼열에게 '십자가의 도'는 늘 강조했던 가르침과 설교의 중심이었다"라며 "한국에서 체류하는 45년 동안 십자가의 도를 전한 선교사였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34년 1월 25일 은퇴 후에도 평양에 거주했지만 1936년 7월 3일부터 14일까지 소래로 휴가를 다녀온 후 열사병에 걸려 언어장애가 왔고, 요양차 9월 24일 한국을 떠났다"라며 "10월 13일 켈리포니에아 후버에 도착하여 치료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그의 아내 루시아 마펫의 병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39년 10월 25일 켈리포니아 주 몬로비아(Monrovia)에서 75세를 읽기로 세상을 떠났다"라고 설명했다.
마포삼열과 평양대부흥운동
'마포삼열(Samuel A. Moffett)과 한국장로교회의 부흥'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박응규 박사는 마포삼열의 선교사역과 평양대부흥운동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마포삼열이 한국장로교회의 부흥의 중심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박 박사는 "1907년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마포삼열을 비롯한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에 진력하면서도, 기독교 교리와 신앙고백에 토대를 둔 바른 신학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라며 "특히 사경회를 통해서, 철저한 말씀에 대한 연구와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 그리고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복음전도의 열정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마포삼열이 평양에 도착한 직후, 착수한 것은 바로 전도활동이었다. 가가호호 방문하고, 개인전도, 노방전도, 사랑방전도, 그리고 문서 전도 등의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줄기찬 전도활동을 전개해 나갔다"라며 "특히 그는 '사경회'를 통해서 전도와 교육을 병행시키면서 한국 장로교회 안에 부흥의 기운이 튼튼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라고 설명했다.
마포삼열과 한국장로교회 부흥
박 박사는 마포삼열이 한국장로교회 부흥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기도 했다.
첫째, 평양 선교본부 활성화와 민주 선교사역과의 연관성 확립이다.
즉, 마포삼열은 의주와 평양, 선천, 그리고 황해도 재령 등지를 방문하면서 그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복음의 확산 현상을 목격했고, 자발적 교회의 생성과 한국인들에 의한 교회 개척이 서북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번져 가리라 기대하는 등 서북지역뿐만 아니라 북한 및 한국 전체 지역을 복음화하고자 하는 강력한 소망과 확신을 갖고 사역했다는 것.
둘째, 마포삼열은 복음전도의 우선성과 사회개혁적 사역의 중요성이다.
박 박사는 "마포삼열은 누구보다도 한국인의 영혼을 사랑하고 복음전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기도했던 인물이었다"라며 "기도를 통하여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지속적인 교제 없이는 성령의 능력이 선교사의 사역에 나타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자신과 동료 및 후배 선교사들에게 권면하였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마포삼열은 철두철미하게 복음전도에 우선성을 두는 선교사역을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교육을 비롯한 사회적 차원의 다양한 선교사역의 중요성도 충분히 숙지했고 실시하였다"라며 "그러나 모든 선교활동의 초점은 '영혼을 구원하고, 영혼을 양육하는 사역'에 있었고, 복음전파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해 나가는 것이 모든 다른 사역보다 우선순위에 놓아져야 하며, 항상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선교활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라고 강조했다.
셋째, 평신도 지도자 육성, 자립교회 및 장로교 신학교육의 기반 조성이다.
박 박사는 "그는 성경적인 신앙을 토대로 복음전도에 열정적인 토착교회를 세우기 위해, 한국어 사용을 매우 강조했고, 선교지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동역자들로 삼았으며, 그리고 자립하고 자전하는 교회로 세우기 위해 전심전력했다"라며 "이러한 배경에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시행한 네비우스 선교 방법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마포삼열의 신앙교육에 의해 남녀 차별을 극복하고 여성 성도들도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봉사와 전도의 역할에서 그 사회성이 고양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평양의 교회부흥에도 지대하게 기여하였다"라며 "여자 신학교를 통해서 여성 전도자를 양성했으며, 다양한 사역에 여성들의 비중이 매우 컸다. 이러한 결과, 조선 시대에 교회가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의 주된 영역이 되었고, 여성들도 교육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라고 평가했다.
박응규 박사는 "마포삼열은 한국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신학적 토대, 즉 개혁신앙의 교리와 신앙고백을 준수하면서도, 개혁주의적 경건주의를 한국의 상황에 맞게 조우시킴으로 당시의 영적 침체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라며 "한국장로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할 수 있는 토대를 놓은 마포삼열의 삶과 사역을 본받아 현재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와 위기를 극복해나가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복음주의 신학 토대 마련한 마포삼열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승구 박사는 "그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 좋은 복음주의적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한국장로교회가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좋은 복음주의적 토대를 갖도록 했다"라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특히 "마포삼열은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를 비롯해 평양신학교 등 많은 학교를 세워 교육하면서 성경적 신학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에 큰 기여를 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교회 중심의 신학으로 성경대로 살려는 열심의 실천을 낳았다. 마포삼열은 언제나 교회 세우는 일 위주로 선교사역을 했으며, 신학교육을 할 때도 교회의 요청이 무엇인지 파악해 그에 부응한 교육을 실시했다"라고 강조했다.
마포삼열의 두 가지 과오
하지만 이 박사는 마포삼열을 비롯해 초기 선교사들의 과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첫째, 한국장로교회 안에 세대주의 뿌리를 내렸다는 것.
이 박사는 "마포삼열을 비롯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세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라며 "마포삼열은 매코믹신학교 재학 때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 한국선교사로 자원했다. 따라서 무디의 세대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받은 마포삼열에 의해 초기 한국장로교회도 세대주의 영향 하에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윌리엄 스왈론 선교사(한국명:소안론)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의하면 4장 1절의 '이 일 후에'라는 구절을 교회의 휴거(“예수께서 교회를 데려가심”) 후라고 단언하고, 4장-19장을 7년 대환난기로 보고 교회는 그 환난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세대주의적인 도식을 철저하게 따른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선교사(한국명:이눌서)가 종말론 교과서로 사용한 중국인 교수 가옥명의 내세론에서도 그리스도의 공중 강림시 신자들이 공중에 끌어올려져(携擧)(携擧) 혼인잔치를 하는 사이, 지상에서는 7년간 대환난(전 3년 반, 후 3년 반)이 있을 것이고, 그 후에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일어나고 그때에 유대인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환영할 것이며 비로소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한다.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은 상당히 세대주의를 용인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러므로 상당수의 한국 목사님들의 종말론이 세대주의적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둘째, 부흥회적 예배 강조로 인한 예배 문제의 소홀성이다.
이 박사는 "마포삼열을 비롯해 초기 선교사들은 교회의 예배를 일종의 부흥회적 예배에 있도록 방치했다. 무디의 부흥집회에 익숙한 선교사들이니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여 한국 사람들이 예배할 때 그저 부흥회적 예배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라고 주장했다.
즉, 개혁주의자들의 예배의 규정적 원칙 등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엄숙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것.
이 박사는 "마포삼열은 한국장로교회를 낳은 아버지로서의 공로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세대주의 뿌리를 한국 교회에 내리도록 한 책임과 부흥회식 예배를 그저 용인한 부분이 있는 만큼 분명한 문제의식도 함께 가져야 한다"라며 "한국교회가 바른 신학적 토대 위에서 선교사를 훈련시켜 파송함으로써 해외 교회들이 든든한 성경적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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