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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원문]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에서 발견되는 공공신학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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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의 관점에서 본 공공신학의 의의 / 정광덕 박사(샬롬의교회)

 

2014년 11월 24일 기사

 

아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가 지난 11월 22일(2014) '한국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을 주제로 개최한 제14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학회의 원문 제공으로 데오스앤로고스에서 서비스하지만 저작권을 비롯한 모든 법적 권한은 해당 학회에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의 관점에서 본 공공신학의 의의

정광덕 박사 (샬롬의 교회)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신앙은 공공의 사회. 정치영역에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어떤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우리 자신에게 던져진 이 과제를 이미 200여 년 전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후기저서인 Fata Magna에서 유사한 질문을 던졌다. ‘서구의 기독교와 동양의 이교도적 종교의 문화가 만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과연 평화를 가져올까? 아니면 전쟁과 충돌을 일으킬까?’ 라는 물음이었다.

 

그가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칼빈주의 강연’을 발표하였을 때 칼빈주의는 네덜란드뿐 아니라 서구 세계내에서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 즉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등 새로운 발전의 추진력과 같은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왔다고 믿었다(칼빈주의 강연, 92). 칼빈주의는 서구 사회에서 철저하게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발전과 성숙시켜왔음을 주장하였지만 오랜 이교적 종교의 삶에 고취되어 온 아시아에서 만큼은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이 동양적 가치관의 사회. 정치영역에서는 그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다는 그의 예견은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빗나갔다. 우리사회에 끼친 초창기 기독교의 사회문화적 영향은 너무나 지대하였다. 정치제도, 사회제도, 인권, 교육, 문화 등 거의 모든 면에 있어서 기독교의 신앙이 가져온 변화는 큰 것이었다.

 

 

이 사실은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신앙이 공공의 영역에서 어떤 역할과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 시대의 개신교가 직면해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직시하며 올바른 신학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아울러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시도 역시 당연한 우리의 몫일 것이다. 이 과제를 푸는 방법은 개신교의 과거와 현재를 철저하게 분석을 한 후, 개신교가 현재 직면해 있는 문제들을 바르게 깨닫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인 삶을 안내해 주는 신학에 관한 점검이 필요하다. 위의 문제들에 봉착한 교회에게 신학과 신앙이 공공의 영역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학과 신앙이 공공신학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개신교는 내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혼란함과 성장 중단, 그리고 비기독교인들로부터 점차 외면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교회가 처한 곤혹스러움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 처방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흔히들 염려하듯이 한국교회의 추락 원인은 교회의 내적인 부패구조와 배타적 신앙의식에서 찾는다. 전자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세상보다 못하다는데 있으며,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세속화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의 탁월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고 진단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모습, 세상문화와 세상적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대조성과 대비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지지의 소리가 있다.
 
이러한 흐름은 ‘대안사회로서 교회’ 재세례주의적 신학전통의 기독교윤리학자인 요더(J.H.Yoder)와 스탠리 하우워스(S. Hauwerwas)의 신학사상에 잘 드러난다. 그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미국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기독교와 그 신앙적 가치가 기존사회와 국가질서에 너무나 잘 순응내지 동화되어 있어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더 철저히 결별되질 때만이 신앙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시도를 ‘재세례주의의 교회론적 대안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안은 교회가 지난날처럼 세상을 변혁하고자 세상으로 뛰어드는 행동주의가 아니라, ‘교회의 교회됨’을 찾으려는 것, 다시 말해 교회 본래의 존재방식인 도덕공동체로서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와 다른 방법의 신학적 견해와 주장이 있다. 한국 개신교와 그 신앙의 문제는 배타적 신앙의식에 있으며, 교회의 내적 문제와 사회변혁은 교회가 공공의 영역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 역할을 할 것이냐는 공공신학을 통하여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당을 둘러싼 울타리를 걷어내고, 세상과 소통하며,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도 교회의 언어와 논리가 설득력 있게 들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대두되는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은 이런 흐름을 담아내는 신학으로 신앙과 교회의 공공성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공공신학 혹은 공적 신앙(公的 信仰, public faith)이란 이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 주변의 사람들과 공존하며 기독교적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여 드러내면서 공공의 유익과 공동의 선을 이루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때 마침 서구의 신학계처럼 한국의 교계에서도 공공신학(public theology)에 대한 관심과 토론이 점증하고 있다. 프린스턴의 신학자 맥스 스택하우스(Max Stackhouse) 박사는 이 분야의 논의를 활성화시킨 학자이며 한국교회에도 적지 않는 그의 신학적 영향을 끼쳐왔다. 그는 ‘세상과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 속에서 에토스(전통, 문화)를 제공하는 것이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공공신학의 뿌리는 오래전 프린스턴 신학에서 ‘칼빈주의 강연’으로 소개되었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해석에 근거하는 것이다. 공공신학의 연구와 성도의 공적 신앙에 대한 소양의 제고는 이제까지 사회 속에서 균형 잡힌 소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주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안으로 요청된다.

흔들리지 않는 복음적 기반을 가지고 사회에 참여하며 기독교적인 대안을 추구하는 신앙의 모델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공공신학에 기반을 둔 신앙인의 모습이라 믿어진다. 실제로, 공공신학의 의미, 방향, 영역에 관한 신학적 토론들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본 글은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위에 서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을 공공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교회론이 내포하고 있는 공공신학의 근거와 방법은 무엇인가를 조사하는 것이다. 카이퍼의 신학적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와 사회에 합당하도록 수용하며 또한 우리 사회가 좀 더 도덕적. 문화적으로 성숙되고 발전된 사회에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비판적 검토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카이퍼의 방대한 저서들 가운데 ‘칼빈주의 강연’과 ‘일반은총론’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1. 공공신학의 토대와 근거 - 칼빈주의 강연과 하나님의 주권

카이퍼는 칼빈주의를 삶의 체계(life-system), 즉 포괄적인 세계관(Weltanschauung, wereldbeschouwing)으로 제시한다. 칼빈주의를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원리로서 ‘삶의 체계’를 세우는 세계관으로 보았다. 그의 ‘칼빈주의 강연’은 이런 글귀로 시작된다. “인간 삶의 진보보다 우리에게 더 고귀한 것은 인생을 고상하게 하는 영예이다. 그리고 여러분과 나를 위한 고상한 인생의 영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 아래 들어있다. 그 영예는 우리의 공동유산이다. 인생의 중생(重生)은 헬라나 로마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엄청난 변화는 베들레헴과 골고다에서 기원한다” 라고 하였다.

즉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며 전 삶의 모든 분야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을 고백하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정체성 앞에 서야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카이퍼에 의하면, 프랑스혁명이후 서구 세계는 두 삶의 체계가 서로 강력하게 투쟁하고 있으며 하나는 인간의 이성과 자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계를 건설하려는 현대주의와 온 세상 왕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경외심으로'기독교 유산'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세계관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현장은 세계관 간의 투쟁이 펼쳐지고 있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칼빈주의 강연」은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싸움을 싸워야 하며, 어떻게 거룩한 투쟁을 벌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며 살아 갈 것인가? 올바른 세계관을 가질 때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왜곡되거나 편협됨이 없이 잘못된 이념들과 가치들에 미혹되어서 넘어지지 않은다. 그런 진정한 세계관은 칼빈주의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고 카이퍼는 본다. 우선, 그는 칼빈주의에 관한 역사적 오해들을 몇 가지로 명확하게 서술을 한다. 첫째, 칼빈주의는 역사적으로 루터파, 재세례파, 소시누스파와 구별되는 무리로서 명명된 것이다. 둘째, 칼빈주의를 칼빈의 신학적 체계를 고수하는 철학적 흐름으로 이해한 것이다. 셋째, 전통적 칼빈주의를 수호한 이들은 정치적 세력화된 정치운동으로 칼빈주의를 바라 본 것이다. 실예로, 프랑스에서 위그노들, 네덜란드 북쪽지역의 빈곤층들, 영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필그림 개척자들은 입헌적 정치체제를 통하여 자유를 보장 받고자 하였다. 국민으로서 자유를 얻기 위한 정치적 운동의 추진력으로서 전통적 칼빈주의를 오해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오해들은 로마 카톨릭이나 유대주의자들이 칼빈주의 옹호자들을 분파주의자들로 여기는 것이며, 또한 예정교리를 극단적으로 지지하는 편협된 고백주의자들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타의 교단과 구별하는 교단적인 의미로 씌여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이퍼에게 있어서 인간의 삶은 종교, 정치, 학문, 예술, 미래 등 포괄적인 영역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런 포괄적인 삶의 체계를 올바르게 세우는 것이 칼빈주의라는 것이다. 카이퍼는 칼빈주의가 통일된 삶의 체계를 제공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장하기 위하여 그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삶의 체계로서 충족되기 위해서는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근본 관계에서 확실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그 세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이다[29]. 그에 의하면, 모든 영역을 포함한 인간의 삶의 체계는 근본적인 세 가지의 관계성 안에 존재한다.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은 피조물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존재임을 말한다. 성경의 전통적 계시관에서 이탈된 인간 주권의 유일성을 을 주장하는 현대주의와 이교적 세계관에 맞선 칼빈주의의 하나님 주권사상이다.(강연, 43)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는 이교도처럼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이슬람교처럼 하나님을 피조물과 분리시키지 않으며, 로마 가톨릭처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매개적 종교단체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위엄 가운데 계시지만, 성령 하나님으로서 피조물과 직접 교제를 맺으신다. 이것이 칼빈주의의 예정 고백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그리하여 로마교에 대한 칼빈주의자의 반대는 무엇보다도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매개적 존재인 교회를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강연 31).

카이퍼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규정된다. 이교는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 갇혀있다고 믿기에, 신적 우월성이 인간에 따라서 차등이 생겨나 계급구조가 만들어진다(일예-카스트 제도). 한편, 현대주의는 모든 차이를 부인하고 모든 구별을 공통의 수준에 놓으려고 한다[37].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서로 동등한 자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권위와 재능 외에 서로 간에는 어떠한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권위와 재능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주시는 것이다. 카이퍼는 프랑스혁명이나 칼빈주의 모두가 민주주의 발전과 평등 이념을 확립하는데 기여했으나 근본적인 차이는, 프랑스 혁명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 통일을 이룬 반면,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통일된 열정 속에 하나님의 주권 앞에 복종하였다는 것이다(강연 38-9). 여기서 통일성이란 인간은 서로 상호간에 긴밀한 신뢰성 속에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들은 지위나 자격에 있어서 동등하며 주어진 권위나 재능이 외엔 차별이 인정되지 않으며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통일되어 있다는 뜻이다.

세계를 향한 태도에 관한 카이퍼의 칼빈주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이교는 때때로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세상을 너무 높게 평가한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세상을 지나치게 평가절하 한다. 로마교는 교회와 세계를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보았다. 교회는 거룩되지만 세상은 저주 아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세상은 교회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아야했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세상구원이라는 고상한 가치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교회를 부패시켰고 교회는 세상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강연40). 칼빈주의는 로마 가톨릭의 이러한 사상과 개념에 개혁을 가져왔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피조물인 세상을 구분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직접교제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주장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 존중되어야 한다. 구원을 이루시는 특별은혜와 창조주로서 자신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베푸시는 일반은혜가 있다는 위대한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세상 생활을 교회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세상으로부터 피하는 수도원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가 강조된다.[(강연 41).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는 개인적인 경건의 삶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의 모든 분야에 통일성을 세우는 위의 세 가지 관계성을 세우는 신학이다. 이 세 가지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깊은 확신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출발이 되며 사회, 정치적 지혜의 촛불이 된다.

 


카이퍼의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세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정치적 삶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한다. 첫째, 권력이나 힘은 절대적일 수 없으며 더 큰 상위의 정의로움에 영향을 받게 된다. 둘째, 인간은 사회에서 서로 상호간에 섬기기 위한 존재로 지음 받은 사실이다. 셋째,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내에서의 책임성을 요구하며 서로 다른 도덕적 행동들은 거대한 책임성들이 수반되어 하나의 공동화된 연결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절대주권을 말할 때, 여타의 권력은 모두가 상대적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존재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그 어떤 권력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설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어떤 권력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간섭하려한다거나 중재할 수 없다. 인간 사회의 권력은 처음부터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다. 하나님에 정해 놓으신 테두리 내에 제한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유의지이다. 이 자유는 그 누구로부터 그 어떤 힘으로부터 방해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양심의 자유의 기초가 되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사실 민주주의 사회의 헌법이 보장하여 주는 모든 자유들의 모체이다. 그런 양심의 자유가 지켜지기 위하여 권력이나 힘은 제한적이어야 하며 통제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죄와 타락된 세상에서는 시민들이나 정부 모두가 자신들의 제한성을 벗어나서 여타의 영역을 침범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락된 세상은 상호 견제적인 힘이 필요하며 바른 질서를 보장할 수 잇는 정부권력이 요구된다. 결국, 정부를 포함한 모는 권력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존재하며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카이퍼는 이것을 사회정치적 영역의 모든 권력들의 통전성과 투명성을 보여주는 칼빈주의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사회, 정치영역에서 ‘법의 규율’(rule of law)의 기초가 된다. 모든 권력은 더 상위의 정당성에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해 있다면 인간들은 서로 상호간에 섬기는 종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 내에서 인간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소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종들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정해 놓은 피조물들인 인간들은 모두가 동등하다. 동등한 인간들이 함께 모여서 더 큰 공동적 사회적 구조를 형성한다. 세상의 군왕들, 권력가들이나 강력한 통치자들의 손아귀에 있는 세상이 아니다. 사회는 공동적 혹은 공공의 기업체이다.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공생적인 존재이며 동역자들이다. 홉스는 사회의 구성은 계약에 의한다고 믿었다. 인간들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서로 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계약이 요구되고 강력한 정부의 간섭을 필요로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이퍼가 이해한 칼빈주의적 사회관은 언약적 관계위에 기초한다. 언약적 관계로 형성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를 공동의 삶으로 인식하며 서로를 향한 동역자적 정신을 갖는다. 인간존재는 개인으로는 너무나 약하고 쉽게 무너질 수 있기에 서로의 도움과 섬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사회는 개인이나 사적인 이익들을 위하여 건설되지 않아야 하며 공동의 이익들을 위하여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일상적인 삶속에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회적 책임성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며 사회를 위하여 다른 가치들의 공헌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사회가 공공의 기업체라고 하지만 그 사회는 구별된 책임망들로 구성된다. 이 책임망들은 자유분방하지 않다. 사회의 다른 구조들을 연결 지으며 관계를 만들어 낸다. 이것들은 규범적이어야 하며 각각 그 독특한 상황에서 타당하여야 한다. 사회 내에서 권위는 구별되어야 한다. 부모의 권위, 학교이사회의 권위, 정부당국의 권위, 시행정국의 권위, 등등. 권위는 공동의 책임성을 위하여 독특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카이퍼가 주장하는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의 개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 내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권위들은 자신의 영역에서만 그 영향력을 가지며 제한성을 가진다. 그 권위들은 서로 존중되어야 하며 독립성을 가진다. 정부, 교회, 학교, 그리고 가정은 자신의 독립된 권위를 지닌다.

정부는 교회의 업무에 간섭할 수 없으며 정부는 역시 학교의 일에 권위를 행사 할 수 없다. 다만, 모든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책임성이 주어져 있다. 카이퍼에게 있어서 영역주권은 기독교학교, 교회, 그리고 정부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권리들 때문에 고안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개념은 개인과 사회 전체를 위한 자유와 책임성을 강조하는 핵심적 사상이다. 이 영역주권은 책임성을 가진 행위들을 확립하게 되고 이런 행위들에 담겨있는 규범적인 원리들을 드러낸다. 사업가는 경제적 업무도 다루어야 하지만 윤리적, 사회적, 그리고 생태학적 원리들에도 관련되어져 있다. 올바른 사업가가 되는 것은 이런 규범적인 원리들에 대하여 책임성 있는 행동과 반응을 하는 것이다. 영역들은 인간의 행동들이 책임성이 요구되는 행동들을 확립하기 위한 사회적 배경이다. 이 영역들은 구분된 사회에서 가져야 하는 다른 책임성들을 보게 한다. 그리고 이 영역들은 규범적 원리들에 일치하는 행동들을 하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창조영역에서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비기독인들의 반대와 저항에 지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대립의 문제를 카이퍼는 그의 일반은총론과 교회론을 통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칼빈주의 강연’에서도 카이퍼는 종교, 교회, 그리고 실제적인 삶의 영역의 문제를 다루면서 좀 더 분명하게 신앙의 공공신학적인 의미와 방법을 칼빈주의가 제시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우선 종교와 실제적 삶의 영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카이퍼에 의하면 네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종교의 본질과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1. 종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2. 종교는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3. 종교는 개인적 존재와 실존의 일부분에서만 작용하는가? 아니면 삶의 전체에서 작용할 수 있는가?
4. 종교는 정상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즉 구원론적 특성을 가져야 하는가?(강연 57).

 

 

각각의 질문들에 대하여 카이퍼가 피력하는 칼빈주의의 대답은 아래와 같다.

대답 1.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의 계시에 근거하여 종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칼빈이 언급한 ‘종교의 씨’(semen religionis)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을 신지식의 감각을 통하여 종교적으로 만드신다. 종교는 오직 찬양과 경배의 감정이지,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 의존하려는 느낌이 아니다. 종교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강연 60-1).

대답 2. 칼빈주의가 말하는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어떤 종교적 매개체를 인정하지 않는다(nullis mediis interpositis).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직접적 교통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사제나 순교자, 천사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상 하나님만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에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든 모든 것에 맞서서 싸웠던 것이다. 물론 타락한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하지만, 그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는 것이 칼빈주의의 답이다(강연 62).

대답 3. 칼빈주의는 전적으로 종교의 보편적인 특성과 적용을 옹호한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져야 할 제물이다[67]. 칼빈주의는 종교를 감정이나 의지에 국한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적 의식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비춰지는 사유의 빛(이성; 로고스)을 배제할 수 없다(강연 68).

하나님은 창조 때에 이미 불변하는 존재 법칙을 피조된 모든 것에게 주셨다.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는 이 사실에 철저히 순종하며 인간은 모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데 봉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인간의 모든 삶에 임재 하신다. 어디에서무엇을 하든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 살아가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종교를 단일한 일부의 단체나 사람들 가운데 몇몇 집단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종교는 인류 전체와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뿌리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그 피조물과 관계하시며 피조물의 존재의 의미는 그 관계성 안에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특별 은총은 선민에게 끼칠 뿐만 아니라 일반 은총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베푸시는 사랑이다(강연 69).

대답 4. 칼빈주의는 종교를 비정상적으로 본다고 대답한다. 카이퍼가 말하는 칼빈주의는 불완전한 종교 형식을 창조의 결과로 보지 않고 타락의 결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최초의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에서, 순수하고 참된 종교에 의하여 고취된 상태로 지음 받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부패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왔으며 하나님과의 참된 회복은 오직 구원론적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이 결론에 따라 칼빈주의는 참된 실존을 위한 중생의 필요에 대한 근거와 분명한 의식을 위한 계시의 필요에 대한 근거를 발견했다. (강연 70-74).

종교와 관련하여 카이퍼의 주장을 요약하면, 칼빈주의가 이해하는 종교는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존재한다는 것은 말한다. 그 존재방식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의 결과인 선택을 통한 것과 모든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도 끼치시는 일반은총의 방식이라는 것이다[75].

 

 

2. 공공신학의 적용 내지 방법 - 일반은총론과 그의 교회론

카이퍼의 공공신학적 적용과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자세하게 그의 일반은총론을 통하여 진술되고 있는 교회론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교회론은 당시 개신교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13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혁명군으로부터 되찾은 네덜란드의 정치적 주권회복은 다시 한 번 개혁교회와 국가의 정부사이에 깊은 결속을 가져왔다. 일부지방의 교회협의회들은 과거 개혁교회의 위상과 부흥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들의 그런 계획은 교회의 재조직을 위한 모임들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독립된 국가의 초대왕인 윌리엄1세가 후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면서 여실히 드러났다. 교회들의 결속을 통하여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원하던 왕에게는 더욱 자극이 되었다. 그 결과로, 1815년에 윌리엄왕은 법 앞에 모든 종교단체들은 평등하다는 새로운 법안을 발표하였다. 연이어, 1816년에 발표된 윌리엄 왕의 법령에 의거하여 네덜란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의 조직을 재정비하여 정치 제도적 차원의 통합된 단일교회를 이루었다. 새롭게 형성된 이 교회는 하나의 국가교회(A Nationale Hervormde Kerk)로서 교회들 간의 신앙고백과 교리가 서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단일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단일성은 계급구조적인 교회규정을 제시하였으며 지역교회협의회들의 다양한 업무들을 정부가 감독하게 되었다. 또한 지역교회들 내에 일어나는 문제들의 최종적인 판결권은 국가총회(a national synod)에게 위임되었으며 그 총회의 구성원들은 왕에 의하여 임명되었고 지역협의회들의 임원들조차 정부에 의하여 선임되었다.

정부의 법에 의하여 형성된 하나의 국가교회(Hervormde Kerk)는 두 번에 걸친 중요한 교회분리의 사건을 격게 되었다. 첫 번째는 국가교회로부터 1834년의 분리(Afscheiding)이며, 둘째는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여 주도된 분리(Doleantie)였다. 두 번에 걸쳐서 분리된 두 교단은 1892년에 합쳐지면서 네덜란드 개혁교회(th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라는 새로운 통합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Afscheiding의 분리는 왕의 법령에 의하여 하나로 통합된 국가교회(Hervormde Kerk)의 강단과 교단이 점차 비정통 신학화 되어 가는 현상과 더불어 개 교회들의 신앙이 변질되어 감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Afscheiding은 자신의 분리의 정당성을 전통적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전통적인 교회규정들을 고수한다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리는 이 땅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함이 아니라 비 성경적인 왜곡된 신학에로 변질되어가는 ‘국가교회로부터 종교개혁과 도르트신조의 고백과 신앙에로 되돌아감(Wederkeer)’이라는 필연적인 분리로 보았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여 주도된 국가교회로부터의 분리(Doleantie)는 국가에 의하여 교회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질 때 개 교회들이 신앙의 자율성을 잃어버렸으므로 하나로 통합된 조직교회로부터 개 교회가 신앙 고백적 자율성을 회복하는 교회 독립성을 위한 노력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Doleantie의 의미는 기존의 교회를 반대하고 다른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다만 교회를 개혁하려는 시도였다.

실제로, 카이퍼의 교회론은 교회가 처해 있던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고려되고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교회론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 칼빈주의와 국가, 교회와 인간사회 전반에 걸친 이해의 토대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신학이 현대주의화(자유주의화)되었던 시대에 칼빈주의적 교회론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전반의 영역에 걸쳐서 재해석한 것이다.

그의 교회론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세 단계에 걸쳐서 수정보완 되었다. 그의 초기 교회론적 입장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로 구분을 하지만 여전히 칼빈의 전통적인 교회론과는 멀어져 있었다. 그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분을 교회와 종교적인 사회 혹은 교단으로 대치하여 이해하였다. 여기서 교회란 불가시적 교회이며 “하늘왕국과 동일한 교리적 교회(the church of the catechism)로서 마음속에 진실된 종교성을 지닌 신자들의 모임이다.” 이 교회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학식, 돈, 교리가 아니라 회개와 중생의 깨끗한 미음과 삶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진실된 이 교회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여전히 다가오고 있다. 한편, 가시적 교회로서 종교적 사회나 교단들은 또 다른 교회이다. 이 교회는 일반 사람들의 모임과 다르지 않으므로 어떤 이도 그것에서부터 자유롭게 분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시기의 교회론적 견해는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의 구분을 제도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로 구분을 한다. 가시적인 교회가 항상 불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는 면에서 두 교회의 상호 연관성을 말한다. 그는 가시적인 교회의 본질은 불가시적인 교회이며 동시에 불가시적 교회에 머물고 있다고 보았다. “불가시적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선택된 모든 자들의 유기적 연합이다” 불가시적 교회는 하이델베르그 교리 가운데 주의 날에 관한 제 21항과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선택된 자들의 모임을 뜻한다. 반면, 가시적인 교회는 두 서너 명일지라도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 곳에 존재하며 그들의 삶을 통하여 그들의 믿음이 드러난다. 이 가시적인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기관 혹은 제도의 설립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그 구성원들이 어느 도시나 어느 시골에서 살지라도 온전하고 순수한 교회의 표지들 내에서 성도로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 교제가 있다면 비록 그 방법상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거기에 교회의 본질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직된 회중들의 제도로서 외형인 교회가 필요한가 하면 그 외형 속에 담겨져 있는 교회의 본질로써 유기체가 필요하다고 피력을 하지만 이 시기의 교회론에 의하면 정치와 사회적 활동은 제도적 교회의 임무로 보았다.(De Gemeene Gratie I)

카이퍼의 마지막 단계로서 형성된 교회론에 의하면, 두 번째 시기의 교회론 가운데 유기적 교회는 불가시적 교회였으나 유기적 교회도 제도적 교회의 영역 밖에서 활동을 하는 한 제도적 교회처럼 가시적이라는 주장이다. 그가 주장하는 가시적인 유기적 교회론은 그의 책 일반은총론을 통하여 칼빈주의를 재해석한 신학으로 명명되어지며 영역주권의 개념, 국가와 교회의 관계, 교회와 일반은총의 영역의 관계 등을 해석하는 초석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삼중적인 소명을 가졌다. 이 삼중적인 소명은 그의 교회론과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진다.

첫째 소명은 말씀선포, 성례, 그리고 권징이 있는 제도적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제도적 교회와 그 일원으로서 국가나 일반 사회의 영역에 직접참여 하거나 관계할 수 없다. 다만 언덕위의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카이퍼에 의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인들과 화해하신 하나님께서 그 죄인들을 향하여 나타내신 은혜가 특별은총이다.(GG II) 이 특별은총은 선택된 죄인들이 새 언약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자가의 사건으로 절정을 이룬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구속받은 자들에게 죄 용서를 하셨으며 그런 구속하심을 사람들에게 응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그는 주장을 한다.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접하는 개인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선택된 자들의 중생됨은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전적으로 피동적인 사건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다.(GG I II) 철저하게 죄로 인하여 타락 되었던 인간의 본성이 중생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제도적 교회는 이런 특별은총의 사역에 그 임무가 제한이 된다. 이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 나라의 구속 사역을 맡고 있으며 국가나 사회와 연관하여 이 교회의 증거와 행동을 고려할 때 다만 교회론적인 행정적 업무차원에로 그 역할이 제한이 된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사회 정치적 영역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만약 제도적 교회가 자신의 외치는 말씀과 모순되는 삶을 보이게 될 때 교회의 사역자체에 방해가 되기에 일반사회의 일이나 세상의 법률을 만드는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다.

한편, 이 교회는 언덕위의 도성처럼 특별은총이 인간사회의 전 영역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례를 베풀어 기독교화시킨다. 제도적 교회가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을 세례하여 정화시킨다는 것은 선포되는 말씀의 능력과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작용하는 양심을 붙잡으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교회 자체의 빛들이 세상을 비추어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상에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덕위의 도성인 교회는 사회 문화의 발전을 가속화한다.(GG II)

 

 

카이퍼가 제도적 교회의 역할을 구속사역에로 제한을 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중세 가톨릭 교회의 오류에 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나의 정치적 기관이 되어버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의 본질과 의미를 간과한데서 출발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제도적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영적인 전권을 가진 것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가는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 또한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된다고 주장을 한다.(GG II) 만약, 국가에게 교회를 통치하는 권한이 주어질 때 국가는 우상이 되거나 전체주의 국가로 변질된다. 그 반대의 경우가 될 때 역시 교회가 우상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국가는 죄를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인 일반은총의 결과이다.(GG III)

국가의 기능은 서로 다른 영역들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하여 영역들 간의 한계를 규정짓는 업무를 맡으며, 영역들 간에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악용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법으로 보호하며, 그리고 국가의 본래적인 결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개인 모두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지우는 일이다.(GG III) 바로 여기에 국가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칼빈주의를 재해석한 카이퍼의 정치신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소명은 그리스도인들이 제도적 교회의 일원일 뿐 아니라 비신자들과 공유하며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임무이다. 이 임무는 공동적인 문화 활동의 영역들 내에서 동일한 인간성을 지닌 비신자들과 함께 일반사회의 공동번영을 위하여 협력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이것은 건전하고 건강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언급하는 것이다. 카이퍼는 칼빈주의 강연에서 기독교인들의 사회, 정치적 삶의 열매는 도덕적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신자들의 종교적 열매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참된 칼빈주의자는 도덕적 방종의 삶을 사는 이가 아니며 엄격한 율법주의자도 아니다.

삶의 올바른 길은, “그 영혼에서 개인적으로 전능자의 위엄에 놀라고 그 영원한 사랑의 강력한 능력에 복종하여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따라서 영원히 하나님께만 감사할 것을 개인적으로 확신하고서 이 위엄에 찬 사랑을 사단과 세상의 자기 마음의 세속적 태도에 맞서서 선포하는 그 사람만이 참된 칼빈주의자이며, 칼빈주의의 기치를 높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서 지킬 하나님의 최고 행동 원리로 받아들이는 결과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 앞에 떨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강연 87). 칼빈주의자의 도덕적 삶은 사회, 정치영역에서 드러나는 공공의 유익을 위한 행동이다. 그 근거를 카이퍼는 이렇게 주장을 한다. 칼빈주의는 모든 윤리적 삶은 시내산의 율법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의 심비에 거룩한 뜻을 심어주신에 하나님 자신에 관한 참된 요약으로서 시내산의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강연 90). 칼빈주의자가 하나님의 규례를 믿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삶이 창조에서 실현되기 전에 하나님 안에 먼저 있었다는 확신에 의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된 세계는 필연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법칙을 갖고 있다(강연 88).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법에 근거한 도덕적 삶이어야 한다.

칼빈주의자는 자연의 법칙이나 일반 도덕 규례, 그리고 좀더 특별한 기독교적 계명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불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도덕적 세계 질서 말고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양심 안에 종교와 윤리의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모든 것을 두는 것이다.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는 하나의 현실로서 모든 생활에, 즉 가정에, 사회에, 학문과 예술에, 개인 생활에, 정치 활동에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셋째 소명은 카이퍼의 교회론 가운데 가시적인 유기체의 교회론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과 맞서서 싸우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조직된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선 가시적인 유기체로서의 이 교회는 중생의 열매이다. 이 교회의 필수 불가결한 특징은 생명의 내재적인 원리 혹은 힘(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즉 숨겨진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새 생명의 원리는 성령에 의하여 심겨진 힘, 즉 중생이다.(GG II)

카이퍼에 의하면, 가시적 유기체인 이 교회는 생명체의 집합체로서 인류에 결속되어 있다. 인류는 원래 하나님의 전 창조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과 우주는 하나의 단위로 형성되어 있다. 원죄가 인류의 유기적 단일성을 무너뜨렸으며 그 결과로 인하여 본래적인 하나됨이 파괴되었다.(GG III)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새로운 인간 유기체를 형성하셨다. 이 회복된 인간이 유기적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적인 단일성은 종말론적인 실재로서 미래에 완전하게 드러난다. 비록 이 유기적 교회는 제도적 교회 안에 존재하지만 그 활동들은 제도적 교회의 사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유기체의 교회는 영원하다. 제도적 교회는 이 세상 이 시대를 위할 뿐이다. 게다가 유기체의 교회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조직된 형태로서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교육 등전 영역에 걸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비록 제도적 교회가 지닌 직분, 말씀, 성례, 그리고 교회행정이 결핍되어 있다 할지라도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적 삶과 자신들의 직업을 통하여 창조세계의 전 영역에서 가시적으로 창조의 질서를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임무를 가진다(GG I II III)

 

 

그에 의하면,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통한 사회변혁의 방향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창조의 신적인 법 구조들의 절대적인 타당성 위에 사회의 구조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평화로운 왕국으로서 인류 공동체 즉, 살아 있는 인간 유기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창조의 법 구조들과 일치하는 인간의 삶은 정부의 권위에 의해 건축된 기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유기체적인 구조이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평화로운 왕국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유기체적인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유기적 교회는 창조의 법 구조들에 위배되는 사회적 불균형과 마비된 발전을 보이는 것에 맞서서 경종을 울려야 한다.(GG II)

그러나 카이퍼가 추구한 사회변혁은 제세례파적인 혁명적 방법이 아니다. 새로운 사회를 겨냥한 기존체제의 전복을 시도하는 개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세워진 현존하는 질서를 창조의 질서 위에서 나아가는 사회의 점진적인 변화이다.(Pro Rege II) 기독교인의 행동은 창조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반은총 위에 부여된 창조의 법질서를 따르는 것이기에 인간사회의 전 영역에서 혁명적이거나 혹은 보수적인 무관심하거나, 혹은 삶의 영역으로부터 격리된 채 사는 시민이 아닌 최고의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한편, 카이퍼가 주장하는 가시적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추구하는 기독교 문화의 형성은 일반은총의 영역인 창조세계에 상관없이 특별은총의 임무를 맡고 있는 제도적 교회가 만든 독특한 방식의 삶의 유형이나 형태를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문화의 발전은 중생된 유기적 교회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창조의 풍부함을 개발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선 사회의 구조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은총의 영역인 창조세계에 내포된 잠재성을 높은 차원에로 고양시켜가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그는 기독교 문화를 주도하는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한다. 이런 기독교 국가와 문화를 형성하는 일은 유기적 교회인 중생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연합체로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정치영역에서는 온전히 거듭난 기독교인 정치인으로서 함께 유기적 연합을 이루어 그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육계든, 예술계든, 종교계든, 정치계든 주님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창조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카이퍼의 공공신학적 근거이며 방법인 일반은총론은 유기체로서 단일호화 된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위에 세울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창조세상의 문화적 발전에 관한 그의 강조는 오히려 교회의 창조영역에 관한 임무가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 구속의 면들을 함께 고려하지 못하였다. 종말에 이루어 질 완성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구조들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을 내포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왕국은 어떤 특별한 것에로의 근접이나 다가섬과 동일하지 않다. 교회는 종말을 바라보며 사회변혁을 위한 자신의 비전이나 책략조차도 과감히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교회론적인 비전은 현세적인 존재의 ‘아직’이라는 성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에서는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카이퍼에게 있어서 유기체인 교회의 기독교 문화형성이라는 임무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통하여 일시적이며 물질적인 왕국을 향하여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세속적인 일일 수 있다. 창조영역을 기독교적 문화에로 발전시키려는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왕국에 맞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창조문화의 발전에 관한 그의 견해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역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에 근거한 교회론적 공공신학은 신앙이 공공의 영역에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 처해 있는 개신교에게 신자의 사회. 정치적 영역의 삶을 이해하는 분명한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시대 교회들의 과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객관성을 이 사회에 드러내야 하는 책임이다. 영혼구원의 문제에 몰두하여 교회의 수적 성장만을 추구해 오던 개신교회들에게 신자의 삶의 영역이 창조의 전 영역에로 확장되어야 하는 세계관을 열어준다. 교회들이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외면하였던 수 많은 영역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워가야 할 소명의 일터로 회복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분명한 신학과 신념을 제시하여 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개혁주의적 전통의 노선에 서 있다고 하여 무비판적 수용은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답습이 직면하게 될 위험요소가 있다. 그의 공공신학에 근거 한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태도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무례하고 비난 받는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종교. 문화적으로 다원화되어 있다. 이런 다원화된 사회에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태도와 행동은 공정하고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무례한 기독교의 모습이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행동을 신앙적인 태도로 오해를 하는 경우이다. 신자들만의 교제로 이루어지는 교회 내적인 모임에서 행하여지는 일들이 공공의 영역에서 여과 없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앙의 승리주의에 도취되어 타종교의 상징을 없앤다거나 다른 종교의 영역에 들어가 종교적 기물을 손상하는 것은 종교전쟁의 불씨가 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다종교 사회가 되었다. 공적인 영역에서 십자군 전쟁과 같은 ‘승리주의’(triumphalism)의 시각으로 행동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주변의 사람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신자들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교회 밖에서도 신자로서 우리는 사랑과 배려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불신자를 대할 때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 소통의 단절을 배격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진정성 있는 배려로 이웃의 마음을 먼저 사도록 하여야 한다. 세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짐으로 교회가 사회에 대한 이해와 사랑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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