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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원문]시민사회에서의 교회의 공적 역할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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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에서 교회의 공적 역할 / 정재영 박사(실천신대)

 

2014년 11월 24일 기사

 

아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가 지난 11월 22일(2014) '한국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을 주제로 개최한 제14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학회의 원문 제공으로 데오스앤로고스에서 서비스하지만 저작권을 비롯한 모든 법적 권한은 해당 학회에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시민사회에서 교회의 공적 역할
정재영 박사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1. 들어가는 말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이후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선출, 기독당 출현, 땅 밟기 사건 등 그 어떤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개신교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이 개신교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어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렇게 개신교가 부정적으로 비쳐진 까닭은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일련의 일들에서 볼 때 개신교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하나의 이익집단과 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받는 비난의 원인 중에 하나는 그동안 한국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상대방을 단순히 전도 대상자로 여기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절대 진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는 전도의 대상자와 타협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를 낮잡아보기 쉽다. 이렇게 자신의 집단 안에 매몰된 사람은 더 넓은 사회의 지평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 생활에 열심일수록 사회에 대한 의식수준은 더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는 일부 오해도 있고, 개신교 쪽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못한 데서 오는 이해의 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각인되고 있다면, 개신교에 대한 공신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2005년 인구주택 총 조사 결과 개신교 인구가 감소한 것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기윤실의 사회신뢰도 조사 결과에서도 보듯이, 보다 큰 문제는 단순히 개신교 인구의 감소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신교가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공신력 약화는 교회의 활동이 공공성을 상실한 데에 기인한다.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공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보다는 교세 확장과 교회 건물 건축, 교권 유지 그리고 교회 세습 등으로 세상과는 벽을 쌓고 자기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전래 초기 한국 개신교는 사회 부조리를 혁파하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제시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오늘날의 개신교에서 공공의 선이나 선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시민사회에서 감당할 공적인 역할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시민사회의 개념에 대하여 살펴보고, 교회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논의한 후에 시민사회에서 바람직한 교회의 역할을 제안해 보도록 하겠다.

2. 시민 사회 개념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시민 사회에 관한 의제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이후에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방법들에 대한 논의들이다. 이것은 형식상의 제도는 법의 원리를 따르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편법과 부정, 그리고 각종 비리가 횡행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적 차원을 포함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이나 정신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따라 움직이는 물질문명 시대에 자신의 욕심만 채우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함께 고민하며 씨름하고 있다. 이러한 의제들은 주로 시민 사회라는 개념을 통해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시민 사회의 성격과 내용은 ‘시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시민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이해하면, 시민 사회는 시장과 같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영역이 될 것이다. 반면 공공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시민을 인식하게 되면, 당연히 시민 사회는 공공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과제와 문제가 다뤄지고 처리되는 영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시민 사회 개념에 대한 설명은 이해관계를 인간 행위의 동기로 이해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설명해야 한다. 이때가 시민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등장한 때이고, 나아가 시민 사회 개념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고대 도시 국가에서 ‘시민’은 관직과 공공 생활에 대한 참여를 통해 정치 결정권 행사하였던 성인 남성들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노예 노동을 바탕으로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말하는 시민과는 그 뜻이 다르다. 또한 서양 중세에서 시민은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가리키는 개념이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상공업자였기 때문에 상공업자를 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서양 근대사에서 시민은 근대 사회의 이상인 자유와 평등 사상의 옹호자였다. 절대주의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창한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시민은 부르주아 등과 같이 특정한 사회 계층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개념으로 확장되어, 근대 국가의 구성원 일반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사용되는 ‘시민’이란 용어는 특정한 부류의 계층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특정한 가치와 행위를 뜻하는 말로 더 자주 사용된다. ‘시민다움’이란 말이 그러한 예이다. 이때 시민은 ‘시민다움’의 가치와 그 가치에 바탕을 둔 시민지향성의 행동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시민이란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토론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민성’”을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공의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시키고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민 사회란 바로 이런 시민들의 상호 교섭의 공간이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 사회란 중세의 전통, 신분, 종교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민들의 존재를 전제하며, 외부의 어떤 강제도 부정하고 시민들의 자율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국가 영역과 대비되어 사용된다. 또한 각각의 개인들이 사사로운 필요와 이해관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적 영역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논의되고 스스로 살아갈 질서를 만드는 곳이라는 점에서 공공 영역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시민 사회는 개인과 공동체, 사사로움과 공공성이 서로 충돌하고 조절되는 공간으로 이해되었다.

비판 이론의 전통에 속하는 위르겐 하버마스는 현대 시민 사회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학자이다. 그는 자유주의 또는 다원주의의 시민 사회 사상과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통합하고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하버마스는 그 이전의 헤겔과 마르크스의 전통을 따라 시민 사회를 시장 사회의 영역으로 파악하지만, 동시에 국가와 시민 사회 사이를 매개하는 ‘공론 영역’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그에게 ‘공론 영역’이란 경제 활동이 일어나는 시장 사회도 아니고, 통치 행위가 일어나는 정치 사회와도 구별된다. 이 공론 영역은 자유로운 인간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국가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18세기에 확립되었다. 하버마스가 이 공론 영역에 주목하게 된 것은, 개인의 인격에 의하여 지배가 이뤄지던 이전의 통치 체계와는 달리, 이성적 토론과 합의를 통하여 공권력을 합리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것은 서구에서의 의회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성하였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분석이었다.

최근에는 국가와 시민 사회라는 2분 모델에서, 국가/시장/시민 사회라는 3분 모델이 정착되어 가는 상황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3분 모델의 시민 사회 개념 대신에 제3섹터, 공동체 영역 등의 개념을 쓰기도 한다. 이는 근대 시민들의 자유스러운 활동 공간이 모두 시장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반성으로부터 나왔다. 이제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는 활동 영역은 크게 3부분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곧, 정부의 통치 활동이 일어나는 정치 사회 영역으로서 국가, 이윤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경제 주체들의 활동 공간인 시장, 그리고 시민들의 자유스러운 참여와 결속, 토론과 합의, 그리고 사회운동의 영역으로서 시민 사회 등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 스스로가 시민 사회와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공론 영역’을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시민 사회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의 담론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데, 첫째로 공공의 담론은 공동의 것과 관련된다. 여기서 공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똑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살기 위해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에 대한 공동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존 듀이가 “우리의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말을 썼을 때 의미하는 것인데, 낯선 사람들(이방인들)조차도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동의할 때 공동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과 공동선을 공유한다면 통일성 있는 사회를 함께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 둘째로, 공공의 담론은 단순히 공동의 것이 아니라 공동선과 관련된다. 이런 점에서 공공 담론은 도덕적인 담론이다. 선한 삶과 시민의 미덕, 도덕적인 의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 사회학자인 로버트 우스노우는 공공의 담론을 “집합의 가치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셋째로, 공공의 담론의 양식은 강요나 조작이 아니라 이성과 설득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공동체”를 공공의 포럼과 실천적인 담론에의 참여라고 규정하고 규범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이성을 수용하고 규범이 옳다고 규정하는 것에 대한 확신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공론의 장으로서의 시민 사회는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억압이나 통제받지 않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 준다. 시민사회는 법과 정치의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사의 자유가 적용되는 자원의 영역이고, 이윤과 이기심보다는 헌신에 의해 동기 부여되는 삶의 영역들과 관련된다. 이러한 시민 사회 영역을 공공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공공 영역은 사회 구성원들이 기존하는 삶의 망을 조정하고 재조정하는 참여의 마당을 가리킨다. 이 마당은 그 나름의 가치와 규범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나름의 정당성에 터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그 사회에 어울리는 상징과 가치를 제도화하고 있는 참여의 마당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하며, 시민은 곧 이 마당에 참여하는 주체를 뜻하는 것이다.

 

 

3. 교회와 시민사회 그리고 공공성

(1) 교회와 시민사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관점에 따라 시민 사회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의에 따르든지, 토크빌(Charles Alexis Clérel de Tocqueville)이 이미 한 세기 반 전에 미국 사회에 대하여 지적한 바와 같이, 자발 결사체가 시민 사회의 중요한 일부이며, 따라서 다른 종교 조직들과 함께, 교회 역시 시민 사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사회과학계에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민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이른바 ‘제3섹터’로 불리는 비영리·비정부 영역이 국가와 시장에 대한 대안의 패러다임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시장 경제 체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교회는 당연히 제3섹터이자 시민 사회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토크빌 이래 사회학자들은 민주주의에서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인식해왔다.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교회가 많은 사회 운동을 위한 조직적이고 철학적인 기초를 제공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토크빌의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퍼트남은 사회 자본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사회 자본이란 협력 행위를 촉진해 사회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 조직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회학자인 퍼트남은 사회 자본은 생산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해 준다고 말한다. 곧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보이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많은 것을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퍼트남은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라는 책에서 미국에서 볼링리그의 감소가 자발적 시민 결사체를 통한 공동체의 참여가 급감하고 있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볼링장에서 맥주와 피자를 들면서 사회적 교류를 하고 공동체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자기만의 여가를 즐기려는 나 홀로 볼링족만 북적대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사회 자본의 감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퍼트남은 시민의 참여가 세 가지 측면에서 사회 자본의 주축 형태라는 것을 인식한다. 첫째로, 시민의 참여는 자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헌신에 의존하고 공공 생활에 도덕적인 덕목의 중요성을 들여온다는 것이다. 둘째로, 시민의 참여는 지역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인들에게 그들의 공동체에서 영향력이 있게 할 수 있다는 의식을 부여한다. 그리고 셋째로, 시민의 참여는 사회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필요조차도 다른 사람과의 교제 속에서 가장 잘 추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 활동은 이러한 시민의 참여를 촉진하는 사회 자본의 한 형태이다. 종교 모임은 다른 시민 조직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대인 기술을 얻고, 직업, 후원 집단, 공공 행사에 절대 필요한 정보가 의존하는 연결망을 발전시키면서 사람들이 서로 교섭하고 신뢰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원자화된 개인들이 운동 경기를 보듯이 모여 있는 교회 구성원들이, 공공의 문제를 토론하는 사회관계를 발전하게 된다면, 시민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자본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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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에 몇몇 학자들은 종교성에 터한 참여가 다른 형태의 시민 참여를 위한 통로가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교회는 시민 사회 내의 중요한 자원 결사체의 하나이며, 개인의 극단적인 이기성을 제어할 수 있는 공동체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민 사회 논의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와 관련 단체들이다. 벨라는 미국 사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기독교 전통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고, 위에서 언급한 퍼트남 역시 교회 및 그 관련 소그룹들을 미국 공공성의 중요한 범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로버트 우스노우(Robert Wuthnow)는 아예 「기독교와 시민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통하여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자원 때문이다. 개인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정하고 타인에 대한 헌신이나 돌봄 등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 안에서 본래부터 내재한 것들이다. 따라서 사회의 공공성 실현이라는 과제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교리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개인 사이의 신뢰가 사회 전체의 신뢰 구조를 만들어내는 선순환의 구조가 있듯이 사회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 단체의 사회 참여와 봉사는 다른 자발적 결사체에 자원을 공급하기도 하고 다른 조직들의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이것은 종교 단체가 신자들의 신앙에 영향을 주어 신자들의 사회 참여와 봉사를 유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개인 단위의 자원봉사가 아니라 집단 단위의 자원봉사가 시민 공동체 만들기에 더 큰 기여를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교회와 같은 종교 단체의 사회봉사나 사회 참여는 중간 집단이나 매개 집단의 활성화를 통해 지역 사회 또는 시민 사회의 조직화, 공동체 만들기에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신자들이 비종교적 사회단체에 참가하도록 촉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시민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조직이다.

최근에는 시민 사회와 관련하여 ‘시민 공동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시민 공동체는 가족이나 혈연, 민족 등 타고난 지위에 기초한 전통 공동체와 달리, 시민의 덕성에 초점을 둔 현대 사회의 새로운 공동체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지역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자발성을 갖춘 참여에 터하여 구성원들의 상호 의무에 헌신을 요구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와도 공유하는 특성이다. 오늘날에 시민다움의 특징이 곧 성서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안 사람’의 특징인 바, 교회 공동체는 연고주의를 넘어 시민다움의 가치를 보존하는 신앙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스노우는 공동체보다는 시민사회가 더 바람직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법률을 포함하여 정부의 역할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데 비하여, 시민 사회는 오직 정부와의 관계에서만이 의미를 갖는 그런 관계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또한 그것이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특징들―책임, 상호 교섭, 상호성, 공동 정신 등―을 자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보기를 들어, 공동체의 이상이 실제로 서로를 알고 규칙적으로 상호 교섭을 하는 거주자들 사이의 감정적 유대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이웃이란 공동체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는 반대로 보통 시민 사회는 이웃, 자발 결사체 등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더 바람직한 것이다.

우스노우는 교회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시민 사회가 규범적으로 선하며, 사회적 삶 가운데 보존할 가치가 있는 바람직한 차원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도덕 가치, 개인의 통합성, 그리고 시민의 책임 등은 보통 선한 사회를 위한 조건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법률이란 사람들의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무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치를 가르치는 역할로서 가족, 학교, 교회, 그리고 공동체 조직 등에 주목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시민 사회는 항상 정부와 개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정부의 강압으로부터 개인 자유의 존엄성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개인들을 서로 서로 묶어주어 국가와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2) 종교의 공공성

이러한 시민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종교의 공공성과 관련된다. 종교의 공공성은 뒤르케임(Emile Durkheim)으로부터 파아슨스(Talcott Parsons)와 벨라(Robert N. Bellah)를 거쳐 내려오는 종교 사회학의 주요 주제이다. 일찍이 뒤르케임이 종교의 근원을 사회라고 본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종교 신념은 전부 개인의 것이고 사사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영성은 개인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수준에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벨라는 이러한 개인주의 종교의 출현과 확산에 대해 우려하면서 시민 종교를 강조하였다. 시민 종교는 장자크 루소에게서 시작되어 뒤르케임을 거쳐 벨라에 의해 이론화된 개념이다. 시민 종교는 시민 개인이 사사롭게 가지고 있는 종교 신앙과는 다르며 시민들의 심성 속에 존재하는 궁극의 의미와 자체 인식의 내용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시민 종교는 정치 종교와 같이 국가가 행사하는 종교 차원의 역할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 가능성을 자체 속에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시민 사회는 거기에 어울리면서 그것을 떠받쳐주는 종교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시민 사회의 건강은 시민들이 시민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민 종교는 그들에게 어떤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찾아야 한다.

‘공공 교회'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마틴 마티(Martin E. Marty)는, 교회가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공공의 이익을 명료화하고 이 공익에 대한 관심을 지향하는 공익 우선의 신앙에 공헌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논의는 한편으로 개인과 정부 사이,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대중 사이를 중재하는 제도 없이는 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염려했던 토크빌의 정신 안에서 교회의 역할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스노우는 ‘공공’이라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공공은 첫째로, 개방 또는 접근 가능성을 의미한다. 종교의 맥락에서 어떤 것이 공공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주관 의식 속에 묻혀 있기보다는 열려진 공간에 나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공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공존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사람들이나 집합성과 관련이 된다면, 그것은 또한 개방되어 있고 접근 가능한 것이다.

 

 

공공이라는 말은 셋째로, 우리가 어린이에게는 기대하지 않는 성인의 책임감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 종교를 말하는 것은 개인들이 사사로운 영성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사회의 선을 위해 책임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들의 집합 가치에 대한 성스럽고 초월의 모든 것에 대해 공공 영역 자체가 개인들 사이에 책임감이라는 의미를 강화해야만 한다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스노우는 한 사람의 신앙은 개인의 것이고, 신념의 문제이고, 그 사람의 기본 인생관의 일부인 믿음이지만, 종교 믿음이 개인의 것이고 사사로운 것이라고 말할 때 믿음이 지닌 공공의 차원을 무시하게 되는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교회의 공공성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 수준에서 표출되기 어려운 구조적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교회 공공성의 약화는 종교의 세속화와 맞물려 일어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세속화는 “종교가 신앙과 의식 그리고 인간의 일상생활에 대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쇠퇴하고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근대 이후 국교 폐지로 교회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교회 출석 빈도, 성직자 수가 감소하여 세속화는 일면 사실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화의 관점에서 보는 종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달리, 서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세속적 이념들이 종교적 이념들을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급속한 사회 변동의 시대 속에서 종교의 성격이 변형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피터 버거조차 최근에 세속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재고하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사회적 중요성이 약화되고 신앙의 개인주의화가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지만, 모든 사회 종교 현상이 사사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탈세속화’를 주장하는 일련의 학자들은 세속화론의 단선적 명제가 가지는 한계와 문제를 제기한다. 탈세속화 테제는 근대화와 세속화를 동류 현상이라고 여겼던 모던적 개념에 대항해 세속화 현상과 더불어 반세속화 현상 또는 재신성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주목한다. 새로운 세속화론자에 속하는 카사노바는 세속화에 대한 현대 이론에서 공격할 수 없는 핵심은 “분화 논제와 종교적 제도와 규범으로부터 세속적인 영역의 해방”이라고 주장하고, 종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질 운명에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카사노바의 공헌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사사화(privatization)에 대한 그의 주장이다. 19세기 전반부에 현대 종교를 특징짓게 된 사생활 중심주의(privatism)는 종교에 상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공공의 신뢰를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 장기간의 사회 과정의 결과였다. 사생활 중심주의는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의도적으로 제한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만큼 독실하게 믿고 원하는 만큼 적극적으로 신앙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종교가 공공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직화된 종교적인 노력 자체를 통해서보다는 다른 기관들에서 독실한 개개인들의 참여를 통해 공공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조장했다.

 

 

이에 대한 카사노바의 핵심 요지는 “근대성의 구조를 규정하는 구조적 흐름인 제도적 분화와 달리, 종교의 사사화는 역사적인 선택 문제, 확실히 ‘선호된 선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선택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국가들에서 사사화라는 역사적 선택을 거부하는 “공공 종교”의 등장을 목격했으며,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종교의 ‘탈사사화’(deprivatization)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한다. 탈사사화라는 말은 카사노바가 처음 사용한 말로, 전세계의 종교 전통들이 세속화론 뿐만 아니라 현대성 이론들이 종교에 대해 말하는 주변화되고 사사화된 역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현대 사회의 두 주요 체계인 국가와 시장의 전통적인 생활 세계로의 침투의 증가와 함께 종교의 탈사사화는 식민화로부터 생활 세계를 방어하고 외재적인 전통 도덕규범과 관계없이 자체의 내재적인 기능주의적인 규범에 따라서 기능 하려는 국가와 시장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고 경쟁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탈사사화는 시민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한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4. 시민사회에서 교회의 역할

(1) 교회의 공적인 역할


한국교회 역시 시민 사회에 관한 의제들을 제기하는 노력에 참여해왔다. 여러 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우리 사회의 주요 주제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사회 참여를 해왔고, 사회 복지 활동에도 다른 종교 기관에 비해 높은 참여를 나타내왔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활동은 교회 안에 있는 일반 구성원들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주로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과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시민 사회는 시민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이고, 풀뿌리로부터의 실제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들이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울타리 밖의 사회와 의사소통하며 참다운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거나 기껏해야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교회 구성원들이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참여자가 될 수 있도록 어떻게 동기를 부여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에서 선교 초기에는,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공부하며 설교를 들었던 동네 가옥의 사랑방이 교회의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 여자 선교사들은 안방에서, 남자 선교사는 사랑방에 들러 각각의 공간에서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으나 이후에 안방이라는 사사로운 공간에 갇혀 공공의 자리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여성들도 교회의 공공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토론회가 활성화되었으며 자원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면서 공공의 공간으로서 수평의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시민들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에 속한 교인은 공공의 공간에 참여하는 자를 뜻하였고, 초월의 가치에 자신을 이어 기존하는 관행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새로운 삶에 헌신하겠다며 공중 앞에서 선서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의 기독교인이었다.

교회는 지금도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기초 단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민 사회 조직이다. 전국적으로 교회는 6만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다른 종교 단체를 압도하고 있다. 또한 전국 동·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가 4,000여 개이고 공공 행정, 국방 및 사회 보장 행정 기관을 모두 합한 행정 기관 수가 1만 2,000여 개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은 수치인지 알 수 있다. 전국에 있는 사회 복지 시설도 2만여 개 정도이다. 물론 이것은 교회가 너무 많다는 뜻도 되지만, 이렇게 많은 교회가 협력해서 활동한다면, 전국의 지역 사회를 모두 엮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된다면 교회는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지 못하는 전국적인 민간 차원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스노우는 시민사회에서 교회의 역할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이고 두 번째는 실용적 보편주의, 세 번째는 시민 비평(civil criticism)이다. 먼저,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은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흑인, 히스패닉, 페미니스트,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자신들이 억압받는 소수자라고 주장하는 집단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하였다. 정체성 정치는 우리가 살고 있는 다문화주의 세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차이에 대한 공식적 인정을 포함하여, 차이에 대한 깊은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다수 대중들의 사고에 도전하고 있다. 소수자 집단의 개별 성원들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 혐오증, 그리고 다른 편견들과 싸우기 위해서 서로 뭉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성 정치는 새로운 주장이 논의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시민 사회를 확장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늘어가는 미국 사회의 다양성에 대하여 종교 집단들이 취할 수 있는 두 번째 방식으로 우스노우가 제시한 것은 실용적 보편주의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우스노우는 이 용어를 이러한 입장을 가진 신학 그 자체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포괄성의 지향(inclusive orientation)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용어를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포괄성이 현실적인 이유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우스노우는 이러한 대응과 정체성 정치 사이의 대비점은 벽돌과 스폰지 사이의 차이로 비교한다. 벽돌은 주위 환경의 영향을 쉽게 흡수하지 않는다. 만약 주위 환경들을 싫어한다면, 그것을 뽑아서 던져버리는 것이 벽돌과 같다. 반면에, 스폰지는 쉽게 흡수한다.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타나면, 아무 문제 없는 듯이 그것을 빨아들이는 것이 스폰지와 같다. 최근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배적인 미국 기독교인의 대응은 벽돌이라기보다는 스폰지였다고 할 수 있다. 늘어가는 다양성에 직면하여, 기독교인들은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아무 문제도 없으며, 우리는 그 다양성을 잘 다룰 수 있고, 또 실제로 그것을 환영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안에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들의 평등, 교회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도,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보편 사상 등을 강조하는 강력한 전통이 존재한다. 시민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관련하여 볼 때, 문제는 실용적 보편주의가 너무 스폰지 같이 흡수만 하기 때문에 사회 문제에 대하여 구별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종교가 다원화된 사회에서 시민 비평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문화주의가 차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곧, 시민 사회에의 참여는 시민들로 하여금 지성 세련됨(sophistication)을 가지고 이러한 차이들에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핵심 용어는 ‘차이’와 ‘지적 세련됨’이다. 차이와 지적 세련됨을 함께 조화롭게 수용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예언자적 역할을 회복하면서 어떻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그리고 실제 그러한 비판을 제도화할 수 있는 참신한 방법을 어떻게 제시할 수 있을지, 그 구체적인 대안들을 고려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스노우는 종교 분야의 분명한 하나의 측면으로서 비평은 과거보다, 특히 종교 담론이 대중 시장의 영향에 종속되어 있는 지금, 더 많은 주목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비평은 가장 일반적인 형식의 종교 담론인 설교와는 구별되는데, 설교는 자의식적인 비평의 행위라기보다는, 일종의 공연(performance)에 더 가깝다. 설교자는 연극에서의 배우와 같이 공연자(performer)이며, 같은 맥락에서 이들에게 비평가로서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 반면에, 비평은 대중문화 또는 다른 교파나 종교 표현들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비평은 또한 종교에 관한 학술적 연구와도 다른데, 비평은 학자적 전문지식에 의존하지만, 자기 고백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거나, 또는 종교와 시민 사회의 관계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외부자의 관점으로부터 발언을 한다는 점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시민 사회와 관계된다.

 

 

그것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공공 신학이라고 구체화했던 것과 유사한 것으로,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와 피터 버거(Peter Berger)와 같은 사회과학자들의 몇몇 작품이나, 빌 모이어(Bill Moyers)나 마야 앙겔로(Maya Angelou)와 같은 유명 인사들의 몇몇 작품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라는 책에서 마크 놀(Mark Noll)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만약 「뉴욕 서평」(New York Review of Books)과 비슷한 문화 비평 잡지를 가질 수 있다면, 시민 사회에서 더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놀은 그런 잡지를 출간하는 데 산파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록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할지라도, 이런 아이디어는 분명 장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평가의 역할을 제도화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시민 사회는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하고 또한 조정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교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초월성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우스노우가 제시한 이러한 원리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참 이웃, 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민다움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죄를 가진 인간의 본성은 자기중심적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도덕성을 상실하고 있다. 흔히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하듯이 바른 ‘시민’ 덕성도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선하고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들 뿐만 아니라 바른 시민을 만들기 위해서도 노력해야만 한다.

(2) 소그룹을 통한 시민 사회 참여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퍼트남은 전통적인 사회 자본이 쇠퇴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가 새로운 사회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의 소그룹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 소그룹들은 집단 구성원들의 대면 교섭을 통해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공동체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반 사회의 대규모 집단이나 조직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친밀한 교섭을 소그룹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한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 형성이 공동체 의식을 표출하게 된다. 전통의 공동체가 무너진 후 파편화되고 불확실성이 증가된 사회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형성을 필요로 하는데, 소그룹 안에서의 친밀한 교섭을 통해 이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 불확실성이 감소함으로써 공공 활동에 함께 참여하기도 더 쉬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시민 사회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시민 사회는 법과 정치의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사의 자유가 적용되는 자원의 영역이고, 이윤과 이기심보다는 헌신에 의해 동기 부여되는 삶의 영역들과 관련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공공 영역에서 사람들 사이에 사회 교섭을 증가시키고 도덕성에 대하여 동기 부여할 수 있는 집합적인 가치들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 소그룹이 주목을 받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소그룹이 실제로 많은 점에서 전통적인 시민 결사체로서 기능한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소그룹은 교회 자체를 공동체화 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가 사회와 접촉점을 만들 수 있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우스노우는 특히 종교가 완전히 사사화되어서 사람들이 더 이상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때, 소그룹 안에서의 사회 교섭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곧 공동체주의 운동의 지지자들과 자원 결사체의 지도자들이 했던 것처럼 사회 교섭을 더 많이 증진시키는 것이다. 우스노우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 공동체 환경에서 서로 교섭할 때 대인 신뢰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감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관점에서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며, 시민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의 일원인 기독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이 신뢰받을 수 있다고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며 소그룹 운동은 이런 식으로 기독교인들이 시민으로서 종사하게 되도록 북돋는다는 것이 우스노우의 분석이다.

소그룹의 사회적 실천에 대해서는 교회 차원에서의 적절한 지원이 요구된다. 소그룹이 교회와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소그룹을 한다고 해서 공동체성이 저절로 형성되고 사회성이 저절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소그룹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이를 적절하게 운용하는 것은 교회 및 소그룹 지도자들의 몫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서양과 같은 강한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사회 연결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교회 소그룹이 또 하나의 끼리끼리의 집단이 되지 않고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그룹의 구성원들이 사회성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교회 차원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교회 소그룹이 사회적 실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한국 개신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원론식 사고방식을 견지해 왔다. 곧 교회 안에서의 생활에 일차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일상생활의 영역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죄악이 가득하고 썩어 없어질 세상”으로 치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원론식 사고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사회생활에 올바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여 기독교인들을 분리주의자 또는 배타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이 사회는 비록 죄악이 넘쳐난다고 해도 포기하고 방치되어야 할 곳이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구현되어야 할 공간이다.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의 삶에만 높은 가치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엄격한 윤리 기준을 모든 기독교인들의 사회생활에도 확대하여 적용해야만 한다. 교회에서는 세속 사회의 모든 활동에 대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부여하고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하는 윤리적인 지침을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소그룹 활동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전개될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소그룹 참여자들이 사회의식을 갖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사회생활에서 양심 있는 시민이 되도록,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세우고 운영하기 위해 주도권을 쥐도록, 정치 문제들에 대해 잘 알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지지하거나 반대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소그룹 참여자들은 개인으로서 그들이 관심 갖는 시민 단체, 사회 운동 단체에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도록 권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할 때마다 자신이 속한 소그룹과 연계 또는 연합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개인의 활동은 보통 그 효과 측면에서 제한을 받기 때문에 사회 안의 특별한 필요들에 관심을 갖는 소그룹을 형성해서 참여하고, 적절한 활동을 조직하도록 장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전체로서의 교회가 할 수 없는 일들이며 소그룹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와 함께 소그룹을 통한 사회봉사 활동도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봉사에 대한 방법론은 변화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사회 참여 방법은 제도 차원의 대규모 지원으로부터 스스로 공급할 수 있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여기서도 소그룹 활동의 중요성이 확인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사회봉사에 대하여 교회 차원의 거창한 사업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대형 교회일수록 몇 억, 또는 몇 십억 이상의 거대 자금을 동원하여 거대한 시설을 설립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전체 교회 수준에서 거대 조직을 필요로 하는 일이며 이 조직 안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소수의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되게 마련이다. 교회 구성원 누구라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 참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생각을 바꾸어 소그룹을 통해 접근한다면, 사회봉사가 반드시 거대 자금이 필요하다거나 대형 교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몇 억의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 조직보다는 백만 원을 후원할 수 있는 백 개의 소그룹 또는 십 만원을 후원할 수 있는 천 개의 소그룹을 통한 봉사 활동이 훨씬 더 효율성과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보다 더 많은 자발성과 주체성을 가진 개개의 사람들이 직접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그룹 자체가 하나의 선교와 봉사 집단(missional group)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3) 실천 방법으로서 지역 공동체 운동

소그룹을 통한 시민 사회 참여 방법 중의 하나는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 역시 교회가 터하고 있는 지역 사회에서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기업, 주민 등과 더불어 지역사회의 주요한 구성원이다. 교회는 그 지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진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지역사회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 실존의 근거가 바로 지역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지역사회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교회는 지역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지역사회 활동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구성원들의 지역사회활동에 대한 인식과 참여의향을 조사하여 지역사회활동을 전담할 수 있는 전략팀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교회 소그룹을 TF팀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교회 전체가 지역 사회 활동을 하기는 어려우나 각종 소그룹들이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보다 더 자발성이 있고,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하게 되어 훨씬 더 많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이 소그룹 TF팀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를 조사하고 직접 실천 주제를 작성하도록 하는 것이 권장된다. 그리고 교회 재정의 일정 부분(대략 10% 정도)을 지역사회 활동비로 정하고 소그룹을 지원대상자와 연결시켜 이들의 필요를 도울 수 있는 책임봉사제를 실시하는 것도 중요한 원칙이 될 것이다.

교회가 공공성을 견지하며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한다고 할 때, 최근 시민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마을 만들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는 주로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지역사회 주민들의 자주적인 참여와 주도적 노력으로 지역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추구해왔다. ‘참여’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동체주의 운동 활성화가 필요해지면서, 지역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다양한 기관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순히 경제 발전이나 개발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사회의 공동체 형성(community building)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개인주의 사회가 경쟁을 앞세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원리가 지배한다면, 공동체 운동은 배려와 관심으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추구한다. 마을 만들기는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지역 사회를 재구조화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된다.

 

 

마을 만들기 운동은 일종의 주민자치운동으로 여기서 ‘마을’이란 시민 전체가 공유하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고 공동으로 이용하며 활용할 수 있는 장을 총칭한다. 그리고 ‘마을 만들기’란 그 공동의 장을 시민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는 ‘눈에 보이는 마을 만들기’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 만들기’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마을’이란 말 그대로 물질로 구성되어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형성되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 만들기’는 ‘사람 만들기’를 포함하는데, 곧 시민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의식을 개혁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 운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시민의식은 기독교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며,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재조직하는 일에 당위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기능을 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기독교 사회운동들이 대개 교계 지도자 중심의 운동이었던 데 반해, 지역사회 공동체 운동은 일반 기독교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풀뿌리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예배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속에 존재하는 시민공동체이기도 하다. 하나의 의례행위로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 윤리의 행동 지향성이 삶의 무대인 사회생활에서 표출되어 나타나야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개교회 내부 결속력은 강하지만, 다른 교회와의 협력이나 지역사회에서의 연계 활동은 부족하므로 이에 대한 노력이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물질과 제도 자원이 지역사회를 위해 효과 있게 활용될 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다른 교회나 시민 단체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시민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지역사회가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공신력도 회복하게 될 것이다.

5.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하여

포스트모던 시대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는 종교와 같이 절대 가치를 주장하는 담론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대화된 가치 또는 다원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근대 계몽주의 이래, ‘세속화’ 논제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어 왔다. 근대 사회의 등장 이후, 현대 사회에서 사회의 많은 영역이 종교로부터 더 자율성을 갖게 됨으로써 사회에서 종교 권위가 쇠퇴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세속화는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더욱이 종교 의식조차도 소비자 중심주의와 치유의 동기에 적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교회들은 물질의 풍요로부터 많은 이득을 보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웃들과 다르게 살도록 도전하기보다는 편하게 느끼게 함으로써 번성해왔다. 교회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교인들이 성서의 원리에 따라 비기독교인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도록 구체적으로 조언하기보다는 사회 문제에 대하여 추상적으로만 설교를 할 뿐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종교 신앙은 더욱 더 사회 수준에서보다는 사사로운 개인의 영역에서만 중요성을 갖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종교를 다시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오느냐의 문제가 관건이다. 시민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종교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이 글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교회는 시민 사회에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종교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무시되고 있는 도덕의 차원을 다시 공공 영역으로 들여옴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갖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시민 사회의 힘에 기여할 수 있다면 세속화 과정에서 사사로운 영역으로 물러난 교회가 다시 공공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의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회 스스로 공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제도화 및 관료제화와 함께 효율을 강조하며 무시해왔던 의사소통의 구조를 회복시켜야 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들이 의사결정에 함께 참여할 수 있어야하고 속도는 더디더라도 공동의 의식을 바탕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여 주요한 사안들을 결정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이익과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닫힌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를 향해 열린 공동체여야 한다.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할 때에는 교회 중심의 사고를 지양하고 교회 역시 지역사회 구성원의 하나로서 동등하게 참여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가 연계하고 필요에 따라 지역 사회의 시민 단체와도 연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보다 그것이 세상에 ‘보냄 받은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인식으로 묵묵히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럴 때에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게 되고 사회로부터의 공신력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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