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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쇼 박사가 전하는 ‘성경해석의 기본기’ ⑦ 본문

성경과 신학

벤자민 쇼 박사가 전하는 ‘성경해석의 기본기’ ⑦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17:56

편견 없애고, 성경과 믿음의 유추에 부합하는 성경해석 필요

데오스앤로고스  |  thelogos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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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14  15: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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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서창원 목사)이 지난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양의문교회당에서 ‘제2기 개혁주의 설교전문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미국 그린빌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벤자민 쇼(Bengamin Shaw) 박사가 주강사로 나서 ‘개혁주의 신앙고백적 성경해석학:성경해석의 기본기’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심포지엄의 주된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편집자 주>

   
 
<제7강> 성경의 유추, 믿음의 유추 및 성경의 한 가지 의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9항에서 다음과 같은 성경해석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해석의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의 참되고 온전한 뜻에 관하여 의문이 생길 때 보다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다른 곳에서 그 뜻을 찾아 알도록 해야 한다(벧후 1:20~21, 행 15:16)."

전통적으로 이 원리는 두 가지 구별되는 문구로 표현돼 왔다. 성경의 유추와 믿음의 유추가 그것이다.

# 성경의 유추

일반적으로 이 문구는 성경의 어느 특정한 본문의 의미에 의문점이 있을 때 다른 관련된 구절들을 참고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든다면 골로새서 2:16~17절의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의 안식일 개념을 부인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을 언급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그 본문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구절들이 있는 성경을 상고하고 살피는 것인데, 관련성 있는 구절을 두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에스겔서 45:17절과 호세아 2:11절이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의 절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절기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유대인 절기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절기들을 더 이상 지키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 절기들을 성취하셨으니 이제는 다 소멸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골로새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유대주의 절기들을 굳게 붙드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자들임을 생각할 때, 바울이 여기서 유대인의 절기 성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언급했다는 것이 더욱 명확해 진다.

성경 유추는 성경 사전과 관주와 같은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도구는 한 성경말씀의 관련된 구절들을 발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 벤자민 쇼 박사(미국 그린빌신학교 교수)
# 믿음의 유추


성경의 유추와 믿음의 유추라는 용어는 상호 교환적으로 종종 사용된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경의 유추가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구절들을 살피는 것이라면 믿음의 유추는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즉, 어느 특정한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지를 고민할 때,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구절들을 찾아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이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유추라는 말은 특별한 본문의 해석에 대한 지침으로서 교회가 붙들고 있는 교리에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 원리가 적용된 한 사례는 디모데전서 2:5절을 해석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은 사람과 관련을 맺고 계신 한 하나님 중보자가 계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 중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더불어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이이시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 성경의 한 가지 의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9항에는 "성경의 참되고 온전한 뜻에 관한(그 이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 뿐이다)"이라는 묘사가 있다.

삽입구가 주지하는 것은 중세시대에 발전되어온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에 대한 언급이다. 즉, 그들은 어떤 성경이든 네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 네 가지 의미를 언급할 때 사용된 라틴어는 'quadriga'라는 단어다. 성경에 이 단어가 적용되면서 한 가지 본문에 네 가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의 해석은 갈라디아서 4:25~26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중세시대 해석자들은 예루살렘을 위한 네 가지 가능한 의미를 설명했다. 첫째는 문자적 해석으로서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도시라는 점이다. 둘째는 풍유적 해석으로서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뜻한다. 셋째는 도덕적 해석으로서 예루살렘은 인간의 영혼을 의미한다. 넷째는 신비적 해석으로서 하늘의 예루살렘을 뜻한다.

따라서 어떤 성경이든지 네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적 의미 외에 풍유적, 도덕적, 신비적 해석 등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영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 방법의 문제점은 어떤 성경 구절이든지 그 결과는 핑계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성경이든지 그 의미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라고 신앙고백서가 분명하게 삽입하고 있다는 것은 네 가지 해석 방법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이후로 대다수 개신교 성경해석자들은 성경 본문은 한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봤다. 19세기 세대주의 해석자들은 이것을 극단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예루살렘'(특별히 예언서에서)은 언제나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도시를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총회 총대들은 특별한 성경 본문은 항상 그 단어 하나에게 엄격한 문자적 의미만 한정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 그들은 '참되고 온전한 의미'라는 문구를 삽입한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해석자들에 의해 신중하게 다루어졌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명확한 해석을 취한 이는 'Elentic Theology'(논박신학, 두 번째 토픽의 질문 19번)를 쓴 프란시스 튜레틴일 것이다.

그는 성경의 참된 의미는 단순한 것이든지 아니면 혼합적인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의미를 지닌 성경의 실례로서 그가 언급한 것은 다양한 율법들이다. 레위기 11장에 언급돼 있는 부정한 짐승들의 목록은 유대인들이 피해야 할 동물들의 유형들을 말한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고 봤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이 목록을 종종 풍유적인 해석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레니우스는 정결한 동물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나타내고, 부정한 동물들은 이방인들과 유대인, 이단들을 예표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하지만 다양한 법들과 교리적 진술들과 비슷한 구절들은 언제나 한 가지 의미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혼합적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경우는 예언서와 예표론적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유대인들을 위해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 이 제사법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가까이 하느냐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들에는 예표적인 의미가 있다. 모두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내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의 예표적 의미는 그들에게 첨가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제도들을 그들에게 주셨을 때, 본래 의도돼 있는 일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혼합적인 의미와 네 가지 의미의 해석 차이는 갈라디아서 4:25~26의 말씀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첫 번째 의미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 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붙들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예루살렘 도성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듯이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 이 경우 예루살렘은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도 한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한 가지 의미는 문맥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두 경우에서 예루살렘을 예표론적으로 해석하고자 할 때, 성경의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진다는 말과 정면충돌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단지 그러한 해석의 한 시례가 되는 것일 뿐이다.

예표론은 성경 본문의 참되고 온전한 뜻을 고려할 때 중대한 요소다. 구약의 여려 요소들은 이중적인 목적을 담고 있도록 의도된 것들이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교훈을 위해 주신 것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이든지, 아니면 사역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월절 양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명확하게 이야기하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다. 성전은 교회에 대한 예표였으며, 바울은 이 교회를 성령의 전으로 종종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약속은 예표로서 이삭을 지칭하며, 모형으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어린 양의 뼈마디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출 12:46)은 어린 양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예표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9:36).

성경의 많은 본문들은 한 곳 이상의 연관을 맺고 있다. 그 모든 연관된 구절들이 함께 참되고 완전한 의미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는 성경 전체에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특별한 본문이 더 명확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을 때, 다른 본문들이 이 점을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약성경에 있는 많은 인용문구들이 구약 본문의 온전한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또한 더 명확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본문은 후기 구약본문 안에서 종종 언급돼 나타난다.

선지자들은 종종 제사들을 공격했다(이사야 1장 참고). 그러나 그들의 요점은 제사들,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백성들이 제사의 참된 목적을 망각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제사 자체가 죄사함을 위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사가 효과적인 것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드려질 때다.

그리고 온전하고 풍성한 제사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믿음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효력적인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 9장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단순한 반복적인 제사 그 자체는 오직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들이라는 점을 백성들에게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단번에 제사를 완전히 드릴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성경해석, 이것을 명심하라

튜레틴은 성경해석자들을 향해 이 같은 조언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의 참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석이 필요하다 … 그 의미는 개인의 사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의 최고 해석자요 가장 확실한 것으로서 성경 자체로부터 모아지는 의미여야 한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열렬히 기도한 후, 자료들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원어에 대한 지식과 적합한 단어들과 상징적인 단어들 사이의 구분, 상황과 범위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 등이 필요하다. 분문들의 연합, 문맥 전후를 살피는 것, 편견을 제거하고, 믿음이 유추에 부합하는 해석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의 신학적 해석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힘을 다하는 수고를 요구한다. 해석자는 성경의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신학의 근본적인 견해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원어를 이해하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지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해석자는 반드시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창조적인 생각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성경의 본문으로부터 신비적인 내용들을 쉽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양들의 영혼을 위해 영적인 음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영적인 사람뿐이다.

구약의 중요한 본문들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설교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은 그 자료들을 청중들에게 명확하고 신실하게 적용하는 일이다.

구약성경을 역사 교훈을 위한 변명거리로 다루는 일이 빈번하다. 이미 회중들은 그 본문이 뭘 말하고 있는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지 혹은 그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12장을 설교할 때, 설교자는 출애굽의 날짜에 대해, 이집트를 떠날 때 그들이 걸었던 행로들에 대해 엄청난 이야기들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설교자는 유월절의 교훈, 장자의 죽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다 묶여져 있는지 등에 대해 완전히 지나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 낸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에 대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있다.

그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 장자를 의미하고 있음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이집트인들의 장자들이 죽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의 자리에서 대신 죽을 유월절 어린 양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월절 어린 양은 장자다. 그러므로 장자 어린 양은 그의 백성들이 머문 곳에서 죽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요점은 그의 백성들을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위대한 그림이다. 그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는 날, 해마가 그 사실이 부각된다. 그들이 매년 그 음식을 취할 때마다 보다 더 위대한 유월절이 장차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했다.

그러므로 유월절과 출애굽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그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사실을 보게 한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한다. 설교자가 출애굽기 12장에서 이 놀라운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그 본문을 제대로 다루었다고 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설교에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다룰 때, 그 이야기 내용 뒤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목사는 단순히 그 이야기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중에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백성들과 하나님이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눈여겨 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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