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예언과 환상, 미래를 빼앗긴 교회, 작은 교회 운동으로 새 날 열자”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728x90
반응형

 

‘2014 생명평화 교회론 심포지엄’ 개최

… 작은 세 교회 이야기

 

2014년 9월 23일 기사

 

지난 9월 16일 오후 7시 감신대 웨슬리관 1세미나실에서 ‘생명과 평화 교회론 심포지엄’이 진행됐다. 이번 행사는 2014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작은교회박람회 준비위원회가 마련했다. 
 
‘예언과 환상, 미래를 빼앗긴 한국 교회, 작은 교회 운동으로 새 날을 열자’라는 취지로 열린 이번 박람회에서는 동네작은교회(김종일 목사, 동네작은교회의 공동체적 교회개척과 분립), 새롬교회(이원돈 목사, 작지만 다양하고 역동적인 카리스마로 생명망을 짜는 작은 교회), 섬돌향린교회(임보라 목사'이웃과 함께 생명평화 일구는 작은 공동체 섬돌향린교회)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이른바 ‘작은교회론’를 지향하는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일부 정리해봤다.
 


# ‘작음’은 하나님 나라의 구조 (김종일 목사)
 
작음은 하나님 나라의 구조이다. 작은 존재로의 출발은 겸손과 섬김 그리고 약한 자와의 연대이다. 연약함과 가난함 그리고 부족함은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조건이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천국의 가치는 여전히 자본중심, 가진 자 중심, 권력중심적 세상에서 대안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현장은 바로 교회이다.

 

개척의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가능성은 교회개척자가 20명이라는 교우 확보에 걸리는 시간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 12명을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시고 3년간의 훈련의 과정을 통해 제자를 양육하시듯 개척자는 자신의 개척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어떤 사역을 중심으로 어디에서 개척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12~20여 명의 동역자 또는 영적 동반자를 만들어 내는 수고를 실제로 감당해 낼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본인의 부르심 또는 사역의 가능성 그리고 그 이후 보다 구체적인 공동체의 성격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는 교회개척 3년 후 실제로 위의 결과를 낼 수 있는 지역교회들이 많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고민에서 부터 구체적이 실제적인 목양의 컨텐츠 계발이 수립되지 않은 채로 교회를 세워나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교단의 경우 1996년 이미 개척 후 3년 이내에 자립의 구조를 확보한 경우가 2%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된다.
 
지금도 수많은 기도원과 신대원 그리고 개척 동아리 모임에서는 교회개척의 가능성을 재정확보로 본다. 필자의 체험으로는 3억! 5억! 10억!이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하며 수평적 이동을 하나의 수단으로 하기 위해서 수도권 인근 신도시를 적극 타겟팅 해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목회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필자는 교회개척을 위해 준비했고, 은사가 있는 분야가 무엇인가 뒤돌아봤다. 학부와 신대원, 대학원 과정 등을 통틀어 10여 년의 학습과 훈련 과정을 보냈는데. 내가 갖고 있는 가장 유용하고 쉬운 도구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소그룹, 만남, 설교였다.
 


교회개척의 실제는 개척자의 은사와 개척도구의 발견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0포인트에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 비그리스도인과의 접촉점 그리고 가나안 성도를 품을 수 있는 목회적 은사를 확인해 봐야 한다.
 
소그룹은 그런 면에서 쉽고 편안하게 목회적 비전을 나누고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좋은 환경이다. 내면을 오픈하고 서로에 대한 비전을 확인하고 성경을 함께 공부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는 현장을 함께 공유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인터넷 게시판
 
인터넷 게시판 문화가 크게 유행하던 시절,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 불특정 다수인을 만날 수 있는 현장은 다름 아닌 인터넷 공간이었다. 목회철학과 비전을 공유하고 대안적 교회의 가능성을 논하는 글을 올리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자들과의 만남 그리고 소그룹의 참여를 유도하는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 가나안 성도를 접촉
 
기존의 크리스챤 중에는 본인은 아니지만 개척자의 비전에 동의하여 주변의 사람을 소개해 주고 이끌어 주는 소중한 협력자와 조력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도움과 협력은 개척자가 미처 하지 못하는 새로운 불신자를 접촉하는 계기가 된다. 많이 알리고 많이 발품팔고 많이 떠드는 수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회개척에 있어서 ‘무엇을 지향할 것가’를 선택해야 한다. 건물 없이 세워지는 교회(장점:경제적 가벼움, 사람에게 집중, 지역과의 조화)를 지향했다. 지역을 섬기는 교회(지역에 필요한 공간 구성, 주중에 더 활발하게 모이는 공간, 전문가 집단의 만남의 장소)를 지향했다.
 
작은 교회는 과연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작은 교회는 태생적으로 연약함에서 출발하며 부족함을 일정기간 감내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훈련이며 현장임을 포기하지 말고 그것을 풀어내는 공동체적 결단과 시도를 끊임없이 감행해 나가게 된다. 경제적 위기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풀어내는 것을 공동체 전체가 체험하는 기회가 많을수록 교회는 건강한 경제공동체로 성장하게 된다.
 
작은 공동체가 또다시 분립해 나가는 과정은 초기의 고통스런 과정으로 되돌아가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는 과정이다. 성육신과 십자가 신학이 실제화 되는 현장을 목회자와 교유들이 함께 경험하며 자발적 가난, 가난의 풍성함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모두가 누리게 된다.
 
결연한 죽음이 아니라 끈질긴 생존력을 보여주는 교회 공동체의 근성은 성령의 도우심과 내주하심이 증명되는 영적 존귀함이다. 가난하고 부족한 현상을 반복하고 생명이 생명을 낳는 기적을 체험함으로 교회는 세상이 요구하는 욕망의 꼭대기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 존귀함을 유지하는 신비를 보게 된다.

 

 

개척교회는 진행형이다. 그래서 불안하고 조바심 나고 빨리 안정화되기를 바란다. 어쩌면 교우들보다 공동체 구성원들보다 개척자 자신이 목회자 자신이 더 급할 때가 많다. 과정 중에 있음은 결론이 보이지 않고 순간순간 예상치 못했던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보장성 없는 길 위에 서있는 리더의 불안함이 엄습한다.
 
그런 교회를 빨리 넘어서서 자립되고 예측 가능하고 두루 필요한 것을 갖추고 목회하고 싶다. 재정의 안정적인 운용과 인력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수의 성도들이 출석하고 목회자의 리더십에 순종적인 중간리더들이 포진해 있는 교회를 어서 세우고 싶다.
 
작은 교회로서 분립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이런 로드맵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저 과정 중에 있음을 즐기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올 때 그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혀 보고 그러면서 위험을 감수해 나가는 것을 심지어 즐기는 것이다. 항상 부족한 상황에 처해 있고 가끔 넉넉함이 오지만 그것을 호사스럽게 누리지 못함을 알기에 미련을 두지 않는 내성을 길러내야 하는 현장이다. 모두가 그렇게 하는게 아니기에 주변의 넉넉한 공동체를 보면서 우리 안의 지체들이 빠져나가지 않을까 염려가 자주 발생되는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예수와 바울의 개척은 어땠을까?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해 가며 모든 것은 다 누리며 언제나 풍요를 맛보며 교회를 세워 나갔을까? 다시 교회를 생각해 본다.
 
# 작지만 역동적인 카리스마로 ‘생명망’을 짜는 교회(이원돈 목사)
 
오직 모이는 카리스마(은사)를 넘어서, 섬기고, 나누고, 참여하고, 연대하며, 지역과 마을에서는 생명을 살리고, 생명망을 짜는 이러한 다양하고 역동적인 은사가 오히려 오늘 한국의 작은 교회의 가능성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개신교는 오직 큰 교회가 되려는 꿈으로 모이는 은사만을 강조했고 기도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획일적인 꿈은 점차 사회적으로 외면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개신교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모아 큰 교회를 이루겠다는 헛된 꿈을 버리고, 작은 교회들의 다양한 카리스마들을 부르고 그러한 카리스마들을 위해 기도할 때라는 것이다.
 
작은 교회가 단지 외형적으로 규모가 작다는 것으로는 작지만 영향력 있고 역동적인 작은 교회의 온 생명력(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작은 교회가 낱생명적 수준을 넘어서서 온생명적 수준을 담아낼 때 다시 말해 온생명이 요구하는 생명의 중추 신경계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각이 일어날 때만 작은 교회는 온생명의 창발적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온생명을 드러내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생명망을 짜 나가는 것이 교회의 온생명적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 생태계의 새로운 온생명적 중추 신경계의 창발자로 온생명적 교회 생태계의 생명망을 짜기 위해 작지만 영향력 있고 창발적인 작은 교회들이 나서기 시작할 때 작은 교회가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온생명적 중추신경계의 창발자로 깨어 일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작은교회들이 그동안의 주류를 따라가는 사고를 전복 시키고, 새로운 상상을 하게하고, 독자적으로 주체적인 길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생태학자들은 사회적 작은자, 소수자들이 있는자들, 기득권자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의 존엄함을 위해서 분연히 행동에 나설 때, 변화는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 생태계의 변화는 단순히 거시적인 사회변화의 원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미시적인 영역의 변화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미시적 교회 생태계의 변화는 거대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혁명이라기보다는 마을 단위의 미세한 일상의 삶의 공간에서 그러한 미세한 단위로 부터 출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온생명 운동의 하나로 작은 교회가 감당하여야 할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마을 단위와 같은 작은 단위로부터, 그리고 협동과 자치의 생명 생태 공동체의 움직임부터 시작될 것이다. 한낱 잡초에 불과하지만 강인하고 억센 생명력으로 탐욕과 배척과 이권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으로 사정없이 밀고 들어가 나눔과 섬김, 협동과 자치, 자비와 정의의 새 질서로 이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온 생명 생태계와 생명의 망을 짜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이시대의 하나님의 나라이요 온생명 일 것이다. 지금이 바로 이러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의 시기이고, 생명망 목회의 창발자로서의 작은교회가 생명망 운동의 메타행위자(meta-agent)로서 탄생하고 있는 시기이다.

 

 

그렇다면 우리 작은 교회들이 작지만 다양하고 역동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오늘 작은 교회가 집중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역과 마을에서 새로운 흐름과 배치를 만들고 새로운 관계망과 생명망을 짜는 일이다. 우선, 지역사회 선교의 가장 강력한 성서적 근거를 필자는 예수님의 갈릴리 공생에 사역에서 찾고 그 내용을 병자 치유와 오병이어 사건과 같은 나눔 사건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잔치로 보고 있다. 여기서 오늘 이 시대에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지역 사역의 특징이 오늘과 같은 불안 증폭, 피곤, 허기의 사회에 일종의 ‘힐링캠프’를 만드시고 그곳에서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나눔의 잔치를 벌이셨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부터 일어나는 작지만 다양하고 역동적인 카리스마를 추구하는 작은 교회 운동이 생명 신학적 흐름과 협동적 사회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의 본래적 특성을 결합하여 지역 사회에서 생명과 협동의 생명망을 짜는 것으로 “작지만 다양하고 역동적인 카리스마로 생명망을 짜는 작은 교회운동”이 되길 기도드린다. 그것은 지역아동센타와 마을 도서관, 마을 협동조합, 그리고 어르신 쉼터 등과 같은 그동안의 지역사회 선교의 역량과 교회의 목회적, 영적 기능인 구역과 심방과 중보기도와 같은 요소를 결합시켜 지역 주민들과 시민사회를 생명망으로 연결하여 지역의 생명망을 짜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제 이 지방자치 시대의 교회와 목회자는 개교회 교인과 목회자뿐만 아니라, 지역과 마을과 시민 사회로 흩어지는 교인들과 목회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이제 교회 조직도 개교회만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조직으로 거듭나 에베소서가 말하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1. ‘생명망 짜기’란 공장 중심의 산업화 시대의 성장주의의 방식을 넘어서 지역사회를 돌보고 살리는 마을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생태운동으로서 이것이 진정한 한국 사회의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작은교회 운동은 교회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마을 중심적, 성장 중심이 아닌 봉사 중심으로 작지만 영향력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일을 위해 작은 교회와 목사가 지역의 교회와 목사, 마을의 교회와 목사로 변화되어 지역 에큐메니즘에 기초하여 지역과 마을의 생명망을 짜고 생명을 살리는 생명 교회의 생명망 목회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작은교회는 새로운 교회의 신학과 목회 스타일, 그리고 생태계에 관한 ‘상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역과 마을에 기초한 생명과 생태의 거대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미시적 삶의 흐름과 배치와 관계망을 짜는 생명의 시대에 미시적 관계망을 짜는 일이 점점 중요해 지고 있고, 이러한 흐름에서 작은 규모로 흩어지면서 새로운 흐름과 배치와 관계망을 짜는 일이 점점 중요해 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지금 이러한 작은 교회운동이 한국 교회의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창발하고 있는 때 작은 교회의 목회의 주요 과제도 지역과 마을 사이에서 미시적 관계를 만들고 공동체의 흐름을 만들고 삶을 배치하고 관계망을 짜고 생명망을 짜면서 작지만 다양하고 역동적인 카리스마로 생명망을 짜는 새로운 목회와 교회가 탄생해야할 시점인 것이다.
 
이 생명망 목회의 첫 번째 단계는 지역 사회를 섬기는 복지선교로 출발한다. 두 번째 단계는 교회학교와 마을도서관과 지역아동센터등을 잇는 지역 학습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로는 교회 안의 신앙적 생태계와 교회 밖 마을 생태계를 지역심방의 개념으로 묶어 영적 돌봄망을 짜며 개인과 가족을 넘어서 지역과 사회를 위해 기도하고 돌보는 사회적 기도훈련과 사회적 심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웃과 함께 생명평화 일구는 작은 공동체(임보라)
 
맘몬을 숭배하는 사회에 대한 빨간 경고등이 켜진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는 어찌보면 예고된 일이었고, 그 동안 광야의 예언자들은 자본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이 사회에 대한 저항과 동시에 자급자족, 작은 것이 아름답다, 공동체 등의 키워드와 함께 이를 실현해내기 위한 프레임 전환을 위한 대안 제시를 꾸준히 이어왔다. 단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 11:15)라는 말씀처럼 대중들은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2013년 1월7일 ‘나눔과 세움’예배를 통해 <향린공동체>에 속하게 된 섬돌향린교회는 <분가 선교>의 맥을 이어가는 교회이다. 향린교회가 40주년을 맞은 해인 1993년에 강남향린교회가 기념교회로 설립되었고, 강남향린교회는 창립 11주년을 맞던 해인 2004년 11월에 들꽃향린교회를 분가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9년 후, 향린교회가 환갑을 맞은 2013년 1월 첫 주일 향린교회는 섬돌향린교회를 분가(분립)시켰다. 향린교회로서는 40주년 기념교회 설립 당시와는 달리, 긴 논의를 통해 교인, 목회자, 재정을 분리하는 첫 경험을 한 셈이다. 이미 교인들의 합의를 거쳐 담임목사 파송, 15% 규모의 교인파송, 예배공간 임대보증금 등의 재정지원으로 강남향린교회에서 들꽃향린교회를 분가한 선례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예배공동체란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활동을 기억하며 나의 삶을 나누며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공동의 기억은 서로를 하나로 엮어줄 뿐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어루 만져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또한 여기 모인 우리들만이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이 있음을 함께 기억하며 공감하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들과 연대하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는 공동의 꿈을 실천해나가는 동력을 갖게 한다. 지난 8월에 내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주교단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했던 연설 중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또 다른 “사회의 일부”가 되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비적 차원을 잃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능력을 잃으며, 그 대신에 하나의 영적 단체가 되는 위험입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가진 단체이지만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중략) 어떤 사례들에서 이런 교회와 공동체들은 그 자체가 중산층이 되어서 그런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가난한 이들이 심지어 수치감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가 큰 교회를 욕망하는 것, 그리고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큰 교회라 할지라도 ‘작고 보잘 것 없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기에 큰 교회면 무조건 문제라고 여기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큰 교회가 갖고 있는 인적, 물적 자원들을 ‘재분배’하는 각성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번영의 유혹’과 ‘지식의 유혹’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다고 본다. 큰 교회는 그 안에 작은 단위들을 만들어 자율성을 주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작은 공동체를 일부분이 아닌 하나의 완전체로 인정하고 충분히 자생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고, 분가나 분립을 분쟁, 또는 지점으로 여기는 편견을 벗어던지고, 각 지역에 작은 교회의 씨앗을 골고루 뿌려 바닥으로부터의 변화와 갱신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소위 소속된 교회가 없는 사람들을 ‘가나안(안나가) 성도’라고 부르는데, 316명의 가나안 성도들의 의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교회 안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동의하는 비율이 86.8%, ‘목회자에 대한 무조건 순종이 부적절하다’에 동의하는 비율이 77.6% 이었다. 이는 교회의 제도화, 대형화, 목사 중심주의가 교회를 떠나게 하는 주요요인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마음만 작은 교회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숫자에 있어서도 ‘큰 교회’ 틀거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목사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가나안 성도들은 ‘가능한대로 빨리 다시 교회에 나가고 싶다’(13.8%)고 하였고,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다시 교회에 나가고 싶다’(53.3%)고 응답함으로 교회를 떠났지만 다시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고, 만약 교회에 다시 나간다면,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16.6%), ‘공동체성이 강조되는 교회’(15.6%), ‘건강한 교회’(11.1%),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9.4%), ‘편안한 교회’(8.8%)를 선택할 것이라고 하였다.
 
섬돌향린교회는 건강한 교회, 편안한 교회 외에도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교회’라는 신뢰 때문에 찾아오는 이들의 수도 상당하다. 예배 공간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작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20개월 섬돌향린교회는 시작부터 <분가선교>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작은 공동체>를 처음부터 지향점으로 삼은 것 외에도 분가선교를 몸으로 경험한 교우들은 그 과정에서 잘된 부분과 아쉬운 부분들을 그 누구보다도 적용하여 실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나눔이 ‘작아지기로 결단’하는데 필요한 용기에 작은 불씨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편, 2014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작은교회박람회 준비위원회는 오는 10월 11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감신대에서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를 주제로 작은 교회 박람회를 진행한다.

 


<Copyright데오스앤로고스 / 무단 복제 및 전재,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