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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종교와 과학, ‘대화’는 기독교신학의 본질이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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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 ‘2014년 종교와 과학 학술대회’ 개최

 

2014년 6월 2일 기사

 

 

‘신학과 과학 프로젝트’라는 21세기 과학시대와의 학제 간 대화를 시도해오고 있는 한신대학교(총장:채수일 박사)가 지난 27일 오전 9시 한신대 신학대학원 컨벤션홀에서 ‘동아시아의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채수일 총장은 “신학은 언제나 이웃 학문과 대화했다”며 “철학, 자연과학, 여성학, 생태학 등 대화의 대상이 시대마다 달라지긴 했지만 대화는 기독교 신학의 본질이며 기독교 자체도 대화의 종교”라고 강조했다.

이어 “신학과 과학의 풍요로운 대화는 미래 사회와 문명의 도전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신학적 전망을 제시할 수 있게 만든다”며 “신학과 과학의 대화는 한국의 신학과 교회의 성숙한 발전을 가져오게 만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소장:김재성 박사) 주관으로 마련된 이번 행사에서 주제강연을 진행한 장회익 박사(서울대 명예교수)는 “현재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자연스러운, 그러면서도 건설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며 “그러나 오히려 그러하기에 더욱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더욱 요청되는 일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장 박사는 “한 가지 해법은 인위적으로라도 특히 학문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대화를 유도하고, 이것의 가능성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이에 필요한 교육적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라며 “한국 기독교와 한국의 과학이 놓여 있는 정황으로 보아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우리의 문화 전통 안에는 일정한 학문적 노력에 의해 근원적 ‘물음’에 대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통합적 ‘해답’을 찾아나간 경험이 있기에 오늘의 종교와 과학은 대화를 통해 좀 더 나은 ‘해답’을 찾아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장 박사는 “그의 말처럼 ‘종교 없는 과학’과 ‘과학 없는 종교’는 모두 불완전하며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지만 이 단계에서 종교 있는 과학으로, 과학 있는 종교로 넘어가는 길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지혜를 합쳐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하지만 대화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대화의 성공은 상대에 대한 따뜻한 배려에서 싹트게 된다”며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기보다는 서로의 ‘다르지 않음’을 먼저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의 차이를 서로의 보탬으로 전환해내겠다고 하는 마음의 자세가 그 첫 단계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주제강연 외에도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다양한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그 중 몇 개의 발표된 내용을 간단히 정리했다.


#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통일로서의 생태담론

1. 종교와 과학은 과연 대화가 가능하며 더 나아가 통일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종교와 과학은 대화는커녕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왔다. 주지하다시피 근세 이후 과학은 물질(사실)의 영역을, 종교는 마음(가치)의 영역을 각각 담당하여 양자는 상호 불가침, 불가해한 영역으로 간주해왔다.

2. 그러나 다르면서도 같다. 그것은 생명유지와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사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근저에는 생명체들의 생명유지 방식이 놓여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노동의 방식이다.

3. 지금 인류가 처해 있는 생태적 위기 속에서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우리의 욕구, 관심을 규제함으로써 주관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책임을 느끼는 과학자들은 윤리적 규제 원칙으로써 도덕성이나 신의 존재를 요청하며, 종교에서 새로운 전망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와 과학의 대화의 가능성을 필연성으로 이끈다.

4.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은 두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위함이다. 생명은 자기를 위함과 이 타자의 자기를 위함에 응해서 자기를 내어주는 타자를 위함의 통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 안에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생명의 법칙이요, 생태논리이다. 우리는 자연 속에 들어 있는 이 타자의 위함의 계기에서 마음(신적 경이)을 본다. 그러므로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자연은 본질적으로 물질적 차원과 타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는 마음(영)의 차원이 중첩돼 있는 것이다.

5. 하지만 자연 속에서 각각 마음과 물질이라는 한 면만을 바라본 종교적 의식과 과학적 의식은 이 생명의 법칙과 자연의 본질을 왜곡시켜서 인간 자신만을 위해서 타자를 이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줬으며, 그 귀결은 오늘날 생태위기의 현실을 초래했다.

 

 

6. 타락 이후 인간은 피조세계의 물질의 확보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확충하려고 했다. 이는 과학기술 시대 이전에는 타인이나 타민족의 물질을 탈취함으로써 시도됐다. 과학기술 시대에 이르러서는 창조(물질)세계의 생명 재생산의 논리와 법칙을 발견해 생명을 근본적으로 장악하려 했다. 그 위에서 생명의 논리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탈바꿈됐던 것이다.

7. 결국 생태계는 무너지고 지금 인류는 그 끝자락에 서 있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의 통일과 생태위기의 극복은 종교적 세계관에로의 회귀를 통해서도,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서도, 과학의 종교에로의 복귀를 통해서도 종교의 과학에로의 지양을 통해서도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두 세계관의 왜곡된 자연 이해를, 생태담론을 통해서 극복할 때 가능하다.

8. 기독교는 계시의 내용을 밝힘으로써 인간의 욕구와 지배의지를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나 신 존재를 요청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향해 새로운 전망을 인류의 구원이라는 빛에서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9. 탐욕과 이기심으로 이루어진 저급한 과학주의적 유물론과 짝을 이루는 무력한 관념론적 종교성으로부터 돌아서서 성서가 계시하고 있는 진리성을 회복한다면 물질과 영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과 영이 하나로 통일되는 곳에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 때 과학과 종교의 구별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향명 교수, 기독교교육>

# 아마겟돈과 과학:전쟁체제의 극복과 평화를 위한 메타포

1. 아마겟돈 전쟁은 천상적 예수에 의해서 발발된 전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발생해서 요한의 시대에 진행 중에 있는 제국의 전쟁이다. 즉, 이 전쟁은 용에 의해서 시작됐고(계 12:17), 용으로부터 권력을 받은 짐슴에 의해 대행됐고(계 13:7), 그리고 짐승과 거짓 예언자에 의해서 미혹된 왕들에 의해서 지금 계속되고 있다(계 16:13~16).

2. 천상적 예수는 심판자와 투사로서 아마겟돈 전쟁의 확산을 가로막고 그것을 끝냈다. 그가 싸우는 목적은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를 소멸시킴으로써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것이며, 그리고 제국의 희생자들의 빼앗긴 인권과 권리를 되찾아주고, 정의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형제자매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반제국적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는 오직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 즉 말씀의 강력한 힘을 무기로 삼고, 제국의 전쟁 체제를 소멸시키고, 그 전쟁을 승리했다. 그것은 그의 무력함의 힘과 비폭력의 힘을 통한 승리다.

3. 오늘의 시대는 전쟁 혹은 전쟁위협의 시대다.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남한의 영토와 영해에서는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진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은 4차 핵실험을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 정부는 군비증강을 위해 값비싼 미국 무기를 사는데 더욱 더 많은 돈을 소모하도록 부추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군비증강은 한반도의 분단이 계속되는 것을 뜻하고, 통일이 기약 없이 미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과 전쟁 위협은 과학과 기술개발을 통한 신무기의 힘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4. 우리는 전쟁체제가 우리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전쟁은 상대편을 모두 적으로 규정하고 죽인다. 천상적 예수는 그러한 살상과 파괴를 막기 위해서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요한은 전쟁의 중단과 전쟁이 더 이상 없는 평화를 희망하는 가운데 천상적 예수가 제국의 전쟁 체제를 소멸시키는 묘사를 통해 아마겟돈 전쟁을 마지막 전쟁이 되게 했다.

5.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 환상은 모든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희망하는 요한의 반제반전 투쟁과 평화 기원의 상징으로 새롭게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제부터 ‘아마겟돈’은 행성의 충돌이나 핵전쟁을 통한 지구의 멸망을 가리키는 메타포로서가 아니라 혹은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보는 메타포로서가 아니라, 전쟁 체제의 종식을 위한 반제반전 투쟁과 평화 기원의 메타포로 새롭게 통용돼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책무는 전쟁 체제츼 소멸을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병학 교수, 신약신학>

 

 

 

# 성서해석학과 과학

1. 성서에 근거한 창조론과 창조에 개입한 그리스도교 신의 섭리, 창조론에 근거한 다른 창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과학과의 관계에서 갈등의 원인이다. 이러한 갈등은 계몽주의에 영향 받은 비판적 성서해석의 방법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정리되고 대화하고, 보완하고, 공명과 통섭을 시도하는 학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과 종교에 대해 “과학은 종교로부터 그릇된 생각과 미신을 추방해 종교를 정화시킬 수 있으며, 종교는 과학으로부터 맹목적 심취와 그릇된 절대화의 위험을 제거해 과학을 정화시킬 수 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장점을 취함으로써 한층 넓은 세계, 곧 과학과 종교가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3. 과학과 그리스도신학과의 관계는 단순한 방법론이나 열려진 정서만으로는 대화의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최근에 등장한 역사비평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서해석의 방법들은 둘 사이의 관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과학과의 상호보완적인 관계형성을 위한 새로운 성서비평 연구들의 방법이 있다.

4. 첫째, 세밀한 읽기를 통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의 의미, 본문의 상징적인 세계를 찾아내고 독자에게 편견 없는 진술이라고 말하는 절대적인 언어가 있는지 찾아내어 그 절대적 언어의 다른 면을 찾아본다.
5. 둘째, 비유적 언어를 찾아내어 그 언어가 비유하는 내용이 비유하려고 하는 개념과 일치점과 상이점을 밝힌다. 셋째, 일관되지 않은 언어를 찾아내 그 모순을 지적한다. 넷째, 글의 원래 의미를 찾는데는 관심을 두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보고 주관적인 해석에 중점을 둔다.

6. 이와 같은 해석학은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과학적인 결론에 대해 회의를 품고 새로운 해석학적인 관점으로 그 사실을 보려는 현대의 과학적 해석학에 상호보완적인 정보나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송순열 교수, 신약신학>

 

 

# 장공 김재준의 ‘자연의 신학’ 연구

1. 장공 김재준 목사(1901~1987)는 47살에 ‘종교와 과학’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장공은 하나님, 자연, 인간이라는 세 중심을 ‘진리’의 관저에서 제시한다. 장공은 진리의 존재 방식을 영적인 진리, 감각적 진리, 이론적 진리로 구분한다.

2. 장공에 의하면 영적인 진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인간에게 계시된 진리를 뜻한다. 또한 감각적 진리를 실험의 진리를 보고 이를 과학의 영역으로 정의한다. 마지막 이론적 진리는 영적인 진리와 감각의 진리를 종합하는 진리이다.

3. 장공은 이론적 진리로서의 철학의 과제, 특히 영적인 진리인 종교와 감각의 진리인 과학의 조화를 구현해 냄으로써 참 진리의 실재를 드러내야 하는 메타 방법론으로서의 철학의 지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이론적 진리의 그 근거를 종교의 원천인 ‘계시’가 아닌 과학의 원천인 ‘자연적 질서’가 아닌 인간 이성과 논리로 바라봤다.

4. 장공은 창조와 진화의 변증법적 종합을 자신의 창조신학을 통해 구상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아도 매우 소중한 통찰이기도 하다. 그는 ‘과학정신’을 소중하게 생각했으나 ‘과학주의’는 비판했다. 그는 종교적 진리의 정당성을 과소평가하거나 ‘과학적’이라는 신화로 모든 진리를 유폐시키는 현대인들의 태도를 꼬집었다.

5. 첫째, 장공은 종교적 진리의 실재성의 차원에서 종교의 의미를 확보했다. 이는 과학의 영역에서는 이해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진리다. 종교적 진리는 영적인 진리이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실재적으로 담보하는 진리다.

6. 둘째, 장공은 종교의 진리의 실재성을 제시하면서 더 나아가 종교적 진리의 유용성을 제시한다. 종교적 진리는 크게 유익할 뿐 아니라 인간에게 전인격적인 봉헌을 스스로 요청할만큼 강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7. 셋째, 과학적 정신 또한 근원적으로는 종교성을 요청하며, 종교적 신앙 또한 과학적 진리를 거부할 수 없다. 장공은 과학활동의 동기를 ‘진리에 대한 충성’으로 이해했다. 넷째, 과학주의의 비판적 전거로서 종교의 의미를 강조했다. 제2차 대전 후 현대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그로 인한 과도한 과학주의를 매우 심각하게 진단했다. 다섯째, 과학의 진보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만 종교적 정신은 오히려 후퇴한다는 관점으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바라봤다.

 

 

8. 장공은 1953년 ‘과학과 종교’라는 글도 발표했다. 부제는 ‘실험과학과 기독교’다. 이 글의 핵심내용은 △과학은 조직화된 지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실험과학으로 정의될 수 있다 △과학연구의 불순한 부산물로 과학주의란 것이 있어서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킨다. 과학주의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유물론과 감각문화이다. △그러나 성숙한 자연과학은 연구 능력이 깊어질수록 자연철학으로 상승한다. 물질적인 관심에서 정신적인 관심으로, 사실의 세계에서 가치의 세계로 발전한다. △성숙한 자연과학은 깊이 들어가면 자연철학이 되고, 더 깊이 들어가면 창조주 신앙으로 나아간다 등이다.

9. 장공은 ‘사실’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을 규범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넘어서서 ‘가치’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의 그 위치와 고제를 긴밀하게 성찰한다.

10. 그는 과학의 사실성을 옹호했으나 ‘종교의 가치’에 대한 고려 속에서 이 둘의 협력과 공생을 꿈꾸었다. 그리고 과학주의와 연동되는 유물론, 자본주의와의 연결고리를 매섭게 비판했다. 장공은 그리스도교가 한 영적인 진리만을 붙잡고 다른 모든 것을 도외시하는 속 좁은 진리관과 실재관을 추앙하지 않았다.

11. 이러한 장공의 ‘대승적 실재관’의 고백과 구현은 당시의 신학과 교회의 역사에서 첨예하게 격동했던 축자영감설과 성서비판학의 대립과 현실적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거침없이 드러났다. 장공에게 ‘축자영감설’은 가치와 사실이라는 ‘사유의 범주’를 혼동한 오류였다. 장공에게 ‘성서무오설’은 성서 자체가 무오하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성서를 삶으로 온전히 체현할 때 성서의 진리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며,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이들보다 더 급진적이며 창조적으로 성서무오설의 구체적인 의미를 성육신적 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전철 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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