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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한국 교회 부흥운동, 어떻게 평가할까?

by 데오스앤로고스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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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부흥은 개인 영혼의 변화 만이 아니라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연합과 사회적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 부흥은 신자의 회개, 교회의 연합과 일치, 사회 변혁, 민족 복음화와 통일 그리고 세계 선교의 완수 등 다섯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이 지난 11월 3일 포도나무교회(담임:여주봉 목사)에서 '제99회 월례포럼'을 개최했다.

 

이번 월례포럼은 <에즈베리 부흥과 21세기 한국 교회 부흥>이라는 주제로 진행됐으며, 소요한 박사(감신대 교수), 박찬호 박사(백석대 교수), 김요셉 박사(총신대 교수) 등이 발제자로 참여했다.

 

 

하디의 신학과 영성

소요한 박사는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의 주역 하디의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1903년의 원산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명구령운동 등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선교사의 신학과 영성을 고찰했다.

 

먼저 소 박사는 하디의 생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하디 선교사는 1865년 6월 11일에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에 태어났다.
토론토 의과대학 1학년에 재학할 당시 부흥운동의 여파로 일어났던 학생자원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이 운동에 참여하고 주도했던 포어맨 (John N. Foreman)의 세미나와 집회에 참여하여 한국 선교에 소명과 도전을 받았다.
또한 이미 한국에 선교를 하고 있던 토론토 대학 출신 게일(J. S.Gale)의 선교 요청은 하디가 내한 학생 선교사로서 지원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 후, 토론토대학생선교회의 후원과 파송으로 1890년 9월에 내한하여 서울, 부산, 원산을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하다가 1898년 5월에 다시 미국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하여 개성, 서울, 원산 지역을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했고 선교사역에 한계를 느껴 1903년 8월 선교사연합사경회를 인도하다 성령, 회심체험을 통해 원산 부흥 운동을 이끌게 되고 1906년 8월 평양연합사경회 인도, 1907년 1월 평양 부흥 운동으로 이 시기의 부흥 운동의 한복판에 있게 된다.
이후 1907년 9월부터 협성신학교(현, 감리교 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어 성서신학과 신앙훈련을 하였고 1913년부터는 협성신학교의 학장을 약 10년 정도 맡으면서 신학교의 영성을 다졌고 교육에 좋은 교재가 있어야 함을 알고 1923년에는 조선예수교서회 편집장, 「기독신보」의 사장을 맡으면서 193여 편이 넘는 논문과 기고 글(영문, 한글)을 쓰고 공동 번역, 편저로 60여권이 넘는 책을 출판하여 방대한 저술 활동을 남겼다.
이렇게 그 선교의 중반 이후에는 그의 신학사상을 정리하듯 글들을 남겼으며 1935년 4월에는 그의 45년 선교사역을 마무리하고 은퇴하였다. 14년 후인 1949년 6월 30일에 미국 렌싱에서 별세하였다."

 

 

특히 하디의 저서들을 소개한 소 박사는 "하디의 저서들 속에는 공통된 사상이 드러난다"라며 "첫째는 하디의 신학은 성서 주석, 기도, 기타 글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이라는 목적에서 그 방법과 내용을 강조한 특징이 있다. 둘째는 이러한 실천을 위해 성서읽기와 기도의 훈련을 강조했으며 이는 곧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목적이 무슨 문제를 해결하고 얻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하디는 신앙인의 삶은 이익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만들어가는 삶임을 강조했다"라며 "그의 <구약총론>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디는 성서의 목적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람하심과 사람의 죄와 연약한 것을 나타내며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고 연합하게 하나니(딤후 3:16-17)'라는 것에 두었다. 무엇보다 구약성서를 읽는 관점을 초대교회 전통인 구약과 신약을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연결시켰다"라고 강조했다.

 

소 박사는 이와 같은 하디의 성서관은 그의 기도의 영성에서도 나타난다고 소개했다.

 

소 박사는 "하디는 신앙의 능력이 현장에 있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하며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이 기도의 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믿었다"라며 "결국 그가 중심에 있었던 1903년의 부흥은 단순히 한국 교회의 성장, 교세 회복이 아닌 신앙인의 삶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현장에서 드러나는 삶이었다. 그의 이러한 기도의 방법은 성서의 내용을 실제로 선교현장 가운데 실천했으며 이에 대한 응답을 경험했기에 더욱 확신을 가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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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평양대부흥, 성령의 역사인가?

박찬호 박사는 <1907 평양대부흥은 성령의 역사인가 역사적 허구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며, 평양대부흥이 주는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의 오순절이다. 즉, 마가의 오순절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한국 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둘째, 평양대부흥은 20세기 오순절 교회의 출현의 한 현상으로 지목되는 세계적 사건이었다는 것.

 

셋째, 평양대부흥운동은 연합운동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가 한국 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바라고 원한다면 연합과 복음주의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

 

평양대부흥운동의 논쟁점
정치적, 신앙고백적
 입장

특히 박 박사는 이날 1907년 평양대부흥과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들을 소개했다.

 

먼저 평양대부흥에 대한 정치적 해석과 관련해서 1907년 평양대부흥이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를 가져왔다는 평가와 관련해서 "평양대부흥이 있었던 1907년은 을사늑약이 있었던 1905년과 한일합방이 있었던 1910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백낙준과 민경배는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하지만 박명수의 경우 대부흥운동의 결과 교회가 비정치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흥이 의도적인 비정치화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박용규는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해 순수 종교적인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오늘날의 교회사가들 가운데서도 강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그의 『평양대부흥운동』(2000년)이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다"라면서 "박용규는 이런 주장이 당시의 배경으로 봤을 때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님을 인정하지만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즉, 박용규는 부흥운동을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는 점과 이런 주장은 당시 일선에서 부흥운동을 목도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선교사들의 견해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박 박사는 "박용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진정한 부흥운동과 각성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한국의 부흥운동을 단순히 정치적인 현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평양대부흥운동의 기원과 과정을 어려운 정치상황에 대한 현실도피적인 신앙의 비정치화에서 찾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평양대부흥과 관련해서 신앙고백적 이해의 차이에 대해서도 소개한 박 박사는 "박명수와 박용규 등은 평양대부흥이 한국 교회의 오순절 운동으로, 머리의 신앙에서 가슴의 신앙으로 전환시킨 운동으로, 형식적인 신앙에서 영적인 신앙으로의 변화, 성경의 권위 인정, 신앙의 체험 강조, 선교의 열정 간직한 복음주의 운동 등 평양대부흥운동을 신앙고백적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20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어간에 17세기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에 대한 수정주의 입장을 평양대부흥에 적용하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수정주의적 입장

박 박사는 "미국에서 제1차 대각성 운동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의 입장이 등장한 것은 1980년 경이었다. 존 버틀러(Jon Butler, 1940- )는 1982년 페리 밀러(Perry Miller, 1905-1963)와 같이 전통주의 입장에 선 학자들이 대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부흥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강조한 것과 그러한 대각성운동이 미국독립혁명에 공헌을 하였다는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주장했다"라며 "이들은 대각성운동은 단지 뉴잉글랜드 지역의 몇몇 식민지들 사이에서 발생한 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나아가 대각성이라는 용어는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 내지는 표현이라고 주장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평양대부흥에 적용하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김상근이었다. 2006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과 알미니안 칼빈주의의 태동: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김상근은 비록 아주 간략하지만 대각성운동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소개하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박 박사는 "김상근은  평양대부흥의 원인이나 이유를 단지 신앙고백적 차원이나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여 인간적인 요소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라며 "1년 뒤인 2007년에는 류대영이 '20세기 초 한국교회 부흥 현상 연구에 대한몇 가지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평양대부흥을 ‘평양대부흥’ 혹은 ‘평양대각성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1907년 평양부흥’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2015년 이만형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통하여 평양대부흥이 ‘발명’ 혹은 ‘해석적 허구’라는 주장을 제기했다"라며 "그는 한 마디로 평양대부흥은 복음주의 선교사들에 의한 하나의 ‘발명’이었다. 이만형은 평양대부흥을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가 아니라 본국 교회 즉, 미국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라고 소개했다.

 

박 박사는 "결국 이만형은 부흥에 대하여 성령의 역사 혹은 역할을 강조한 전통적 해석을 넘어 부흥이 인간에 의해서 기획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평양대부흥을 통하여 복음주의적인 한국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신화를 깨고자 한다"라며 "학문적인 토론의 장에서 독창성이라고 하는 것은 논거를 제시하는 것과 함께 매우 중요한 한 축이 된다. 하지만 어떤 주장이 과연 유익한가를 떠나 기존의 주장을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은 보다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리고 피력했다.

 

평양대부흥에 대한 재검토

박 박사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성경신학자들의 경우 한국의 내적인 것으로 한국 교회가 갖고 있던 사경회, 기도회 및 한말 위기에 처한 국가적 상황과 외적인 요인으로는 세계부흥운동과의 교감 등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배경과 원인을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만열, 박용규, 김영재, 박명수, 김인수, 강슬기 등 평양 대부흥운동과 관련된 민족적, 정치적, 신학적, 신앙적 입장 등을 개진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한 박 박사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대해서도 보다 꼼꼼하게 사실적인 관계에서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다"라며 "무엇보다 평양대부흥에 대한 수정주의 입장을 개진하고 있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나름의 정당한 비판과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73년 한국교회 부흥운동
대형 전도집회의 영향

김요섭 박사는 <1973년 한국 교회 부흥운동:민족복음화 사상과 운동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박사는 "1970년대 한국 교회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경험했다"라며 "교회의 수와 교인 수가 대폭 증가했으며 사회적인 영향력도 급격히 커졌다. 선교와 원조를 받던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은 1980년대에는 선교하고 원조하는 교회가 국가로 위상이 변화되었다. 이 성장과 변화의 과정 가운데 1970년대 초 연속적으로 개최된 대형 전도집회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1970년대 한국 교회 부흥의 배경에 전국복음화 운동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즉, 1973년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는 1960년대부터 시도되었던 전국적인 대중전도운동의 일환이며 귀결이었다는 것.

 

김 박사는 "한국 교회 안에는 1964년 말부터 17개 교파 대표들이 모여 초교파적 복음전도 운동에 대한 기획이 있었고 그 결과 그해 12월 3일에 전국복음화운동위원회가 구성되었다"라며 "한경직 목사는 전국복음화운동을 이끌면서 '교회에는 일치를, 사회에는 변혁을, 민족에게는 소망을'이라는 <3대 신도 선언>을 채택한 이후, 한국 교회가 추진해야 할 부흥의 방향을 선언하면서 한국 민족 전체를 새롭게 변혁하려고 시도했고,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비롯해 1980년대 말까지 한국교회에서 개최된 여러 대형 집회를 대회장이나 고문의 역할을 맡아 주도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박사는 김준곤 목사가 중심이 되어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주도했던 춘천 성시화운동, 1973년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 1974년 엑스폴로 74 등을 소개하면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르는 기간 연속된 대형 전도집회와 복음전도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데 실제적으로 크게 기여했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1970년에서 1980년의 10년 기간 동안 교회 수는 8,377개가 증가했으며 1970년에 2,569,549명이었던 기독교 인구는 1980년 3,988,006명으로 증가했다"라며 "이 시기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대사회적인 영향력도 크게 증가했다.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이 모이는 초대형 교회들이 생겨났다. 20세기 말엽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국제적 위상과 인지도가 높아지는 과정만큼이나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교회로 성장했다"라고 설명했다.

 

 

부흥을 위한 반성과 전망

하지만 김 박사는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와 엑스플로 ’74는 한국 교회의 이후 이루어진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지만 1973년에 일어난 한국교회의 부흥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이를 통한 21세기의 새로운 부흥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반성해야 할 것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첫째, 이 시기 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교회 지도자들과 여러 대형집회들이 당시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심지어 독재정권과 타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둘째, 70년대 대형집회와 그 기초가 된 민족복음화 사상에 대한 정당한 신학적 평가와 비판적 계승이 필요하다.

 

셋째, 21세기 상황에서 여전히 대형 전도집회가 가능하며 유용한지에 대한 실천적인 반성과 점검이 필요하다.

 

특히 김 박사는 "미디어의 발달을 핑계로 삼아 편의주적 선호에 따라 교회의 모임을 축소하거나, 자의적 정의감에 사로잡혀 대형 교회나 대중 집회를 무조건 정죄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그러나 단지 많은 수가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감정적 흥분을 조장하거나 또 다른 세속적 이해관계를 도모하는 태도는 더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당부했다.

 

이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담당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따를 때 개인과 교회의 변화가 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것 자체가 성경이 가르치는 '부흥'임을 21세기 한국 교회는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며 1970년대 한국 교회가 경험했던 대형집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대형 집회를 주도했던 위대한 지도자들이나 설교자들 때문이 아니라 작은 교회 한 구석이나 골방과 산에서 추운 새벽을 깨우며 기도했던 이름 모를 한 성도의 기도 때문이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김영한 박사는 개회사를 통해 "진정한 부흥은 개인 영혼의 변화 만이 아니라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연합과 사회적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라며 "20여 년간 Korean Revival(KR; KR의 원 명칭은 ‘한국교회 영적 갱신을 위한 신학 교수 신학생 기도모임’)에 속한 신학자들과 함께 부흥에 대한 의미 있는 관찰과 연구에 의하면 신자의 회개, 교회의 연합과 일치, 사회 변혁, 민족 복음화와 통일 그리고 세계선교의 완수 등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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