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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교리와 신학

팬데믹 시대의 예배, 웨슬리의 '성만찬'이 주는 시사점은?

by 데오스앤로고스 2021.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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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연구(15)

 

 

 

예배학자, 설교학자, 상담심리학자, 조직신학자, 교회사학자들은 존 웨슬리의 '성만찬'을 어떻게 해석할까? 그리고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 웨슬리의 '성만찬' 신학과 그의 설교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예배학자

"웨슬리의 성찬신학은 초대교회의 성찬신학과 같다. 초대교회와 웨슬리는 성찬이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이며,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연합의 식사, 그리고 종말론적 식사라고 보았다. 성찬은 분명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며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참여케 하는 은혜의 수단이며, 그리스도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은총의 수단이다. 한국 교회는 매주 예배에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순환 박사, 서울신대)

 

 

설교학자

존 웨슬리의 성찬 설교에는 당시 청교도적 교리 설교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기법, 그리고 에라스무스 전통 등이 골고루 스며들어 있어 다양한 설교적 흐름에 개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웨슬리의 성찬 설교는 교리 설교로서의 분명한 신학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한계도 있다. 웨슬리의 성찬 설교는 '성찬을 규칙적으로 시행해야 할 의무'(눅 22:19)에 대한 문자적 해석 정도에 그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성찬을 다루는 교리설교를 듣고도 회중이 설교자의 성찬관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설교자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가령, 한 편의 설교가 교리 전체를 드러내는데 부족하다면 연속설교 형태를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정인교 박사, 서울신대)

 

상담심리학자

성만찬은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등 심리내적인 면을 터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성만찬을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성만찬이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융의 분석심리학적 언어로 “개성화”)으로서 통과의례로 볼 수 있다. 복음은 머리만이 아닌 온 몸, 온 존재로 느끼고 깨달으며 참여하는 위대한 사역이어야 한다. 머리로 한정된 방법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할 뿐이다. 심리치료 분야가 ‘머리’에 한정된 치료에서 온 ‘몸’을 활용하는 표현예술의 방법으로 달려가고 있듯이 온 ‘몸’으로 참예하는 성찬의 의미와 효과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황헌영 박사, 서울신대)

 

기독교역사학자

 웨슬리가 '설교'와 '성찬'을 예배의 두 축으로 삼은 것은 루터와 동일하다. 차이점은 웨슬리가 예배에서 성찬을 중심에 세우고, 설교와 함께 가는 것으로 보았다면, 루터에게는 선포로서의 설교가 우선이었다. 웨슬리가 성찬을 그리스도의 명령이기에 성도의 의무로 여겼다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차원에서 성찬을 당연시했고. 이러한 점에서 두 사람의 신학적 중첩을 볼 수 있다.(정병식 박사, 서울신대)

집에서 예배드리면서 '성찬식'에 참여할 수는 없을까?

 

조직신학자 

웨슬리의 성만찬 이해가 오늘날 교회에 주는 조언은 무엇인가? 먼저, 성만찬의 목적을 '하나님을 구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함'에 두는 것이다. 만약, 웨슬리의 이해와 같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성만찬의 시행은 개방성을 지닌 채 다양한 방식과 공간으로 확대할 것이다. 성만찬이 '은총'이라는 하나님의 수단이라면 예배에 모두 함께 참석할 수 없는 코로나19 현실에서 교회는 창의적인 방식의 복음선포와 성만찬의 시행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웨슬리의 조언처럼 하나님의 은총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예배가 가능하다 혹은 가능하지 않다라는 표면적 질문에서 벗어나 지금 성만찬의 지속적 시행을 위해 무엇을 고수해야 하고,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어떤 방식으로 성만찬을 지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자주 베풀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마 9:14-17)는 오늘의 상황에 참으로 적절한 말씀이다."(박영범 박사, 서울신대)

 

 

서울신대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김성원 박사)가 지난 5월 18일 오후 1시20분 '웨슬리 회심기념 신학심포지엄 및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은 '성결운동'으로 영국사회를 변화시켰던 웨슬리의 '성만찬 신학'을 예배학적, 설교학적, 상담학적, 교회론적, 역사론적으로 분석하면서 코로나19 상황 안에서 교회들이 추구해야 하는 '성만찬'의 방향성을 모색했다.

 

 

박영범 박사는 웨슬리가 개진했던 목회친화적인 성례전 해석과 정의의 모범은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배공동체가 나아갈 길을 선명하게 제시해준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언택트 시대"
"성만찬은 가능할까?"

 

박 박사는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이 묻는 시급한 질문은 언텍트의 시대에 어떻게, 마치 웨슬리와 같이, '가능하다면 지속적으로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에 있다"며 "온라인을 통해 성만찬이 베풀어질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이분법적 논의가 아니다. 교회론이 단순히 사변적인 학문의 영역에 갇힌 이론이 아니라면, 그래서 오히려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교회의 조언을 제시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이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웨슬리의 성만찬 이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여지와 조언을 제공한다. 웨슬리는 전통적 의미의 성례전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분명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례전을 희생제사의 관점에서 연결하지만, 가톨릭적 의미가 아닌 기념과 실재로 재현되는 사건으로서 이해했다"고 설명했다.

 

"하나님만을 구하는 것"

 

또한 "웨슬리는 복음의 수단으로서 성례전을 이해하며, 이런 관점에서 '은총의 수단'으로서 그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즉,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수단이며, 신자를 구원과 성화의 길로 안내한다"며 "그러나 웨슬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얻고 증진할 수 있는 은총의 수단으로까지 확장했다"고 강조했다.

 

 

박 박사는 "웨슬리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만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신학을 바탕으로 웨슬리는 성만찬의 주체인 하나님, 성만찬의 규직적이고 지속적인 시행, 성만찬에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했다"며 "웨슬리는 오늘의 교회에 성만찬의 목적을 '하나님을 구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함'에 둘 것을 조언한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와 성만찬"

 

그는 "웨슬리의 이해처럼 성만찬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성만찬의 시행은 개방성을 지닌 채 다양한 방식과 공간으로 확대해야 한다"며 "코로나19의 여파로 예배에 모두 함께 참석할 수 없는 현실에서 교회는 창의적인 방식의 복음선포와 성만찬의 시행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웨슬리적 조언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박사는 "현재 온라인 예배가 가능하다 혹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시행해야 한다 등의 논의는 너무도 표면적일 뿐"이라며 "우리의 질문은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간직해온 성만찬의 본질적이고 복음적 의미를 어떻게 오늘의 상황에서 계속 펼칠 수 있을까라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현재 한국 교회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온라인 예배'에서의 성만찬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진행형이다. 추구하는 신학의 교리적 차이점을 비롯해 일선 목회현장에 실제를 제시해야 하는 설교학자와 예배학자들의 관점과 해석도 다양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 박 박사는 "교회는 반드시 오늘날의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성만찬은 계속해서 시행되어야 함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며 "성만찬의 지속적 시행을 위해 무엇을 고수해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나아가 어떤 방식으로 성만찬을 지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자주 베풀 것인지 등의 신학적 노력을 공동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새 술은새 부대에”(마 9:14-17)라는 말씀이 오늘의 상황에 참으로 적절한 말씀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기연 박사는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성만찬 하면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만 사실 성찬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며 프린스톤대학과 드루대학교 교수였던 예배학자 호튼 호톤 데이비스(Horton Davies) 박사가 1993년에 저술한 자신의 저서 『생명의 빵, 기쁨의 잔』(Bread of Life & Cup of joy)에서 제시하는 성만찬의 7가지 의미를 설명하기도 했다.

 

예수의 희생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성만찬, 감사로서의 성만 찬, 희생제사로서의 성만찬, 종말론적 잔치로서의 성만찬, 즐거운 공동식사로서의 성만찬, 구원의 신비로서의 성만찬, 해방과 사회정의로서의 성만찬이 그것이다.

 

 

"초대교회의 성찬신학과
웨슬리의 성찬신학은 동일"

 

 

조 박사에 따르면 초대교회의 성찬신학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성령에 의해 주님의 몸과 피가 된다 △성찬은 교회의 공적인 사건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사건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인 연합과 일치의 사건이다  △성찬은 천국이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와 관련 "웨슬리의 성찬신학은 예수님의 희생제사로서의 성만찬, 성찬에서의 성령의 역사, 성도의 교제, 종말론적 종말론적 성격 등을 내포하고 있어 초대교회의 성찬신학과 매우 가깝다"고 평가했다.

 

조 박사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찬은 은총의 상징(figure)이며, 은혜의 방편(means)이고, 거룩하고 참된 효험있는 징표(the Sacred true, effictual sign)이며, 영광스럽고 거룩한 도구(the glorious instrument divine), 날인 (seal), 그리고 내적 은총의 가시적 징표(outward sign of inware grace)였다"며 "웨슬리는 성례전이 구원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을 사람들에게 실제로 계속해서 수여하는 수단, 통로, 수송기관,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며, 주님의 성만찬은 효력있는 은혜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성찬에 대한 오해 STOP"

 

조 박사는 "성찬은 참여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행위’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최초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렇게 믿고 실천했다"며 하지만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을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 즉 ‘인간의 행위’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성찬은 분명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며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참여케 하는 은혜의 수단이며, 그리스도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은총의 수단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성찬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가능한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교회에 성찬에 대한 인식의 제고가 일어나 모든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예배에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고 밝혔다.

 

 

 

 

정인교 박사는 존 웨슬리의 설교집 7권에 수록된 150편의 설교 가운데 시종일관 ‘성찬’이라는 교리적 주제를 다룬 설교는 [성찬을 규칙적으로 시행해야 할 의무](The Duty of Constant Communion)와 [은총의 수단](The Means of Grace) 등 두 편의 설교를 교리설교로 간주하고 분석하면서 웨슬리의 성찬설교를 평가했다.

 

 

성찬은 성도의 의무

 

 

웨슬리는 성찬을 게을리하는 성도들에 대한 권면이라는 설교의 목적 아래 성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강조했다고 설명한 정 박사는 "웨슬리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명령인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성경 구절의 인용과 이를 실천한 사도들의 모범을 근거로 제시했고, 성찬은 모든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은총을 주는 것이라며 죄의 용서와 영혼을 새롭게 한다는 은총의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며 성찬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 박사는 웨슬리의 성찬 설교는 교리설교로서의 한계도 갖는다고 주장했다. 즉, 교리설교는 설교자의 목회 계획에 따라 또는 다루려는 교리적 주제에 따라 단편적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하나의 교리를 몇 주일에 걸쳐 연속설교 형태로 진행할 수 있는 반면, 웨슬리 설교전집에 수록된 웨슬리의 설교 중 교리적 주제를 다룬 설교들은 연속적인 시리즈 설교가 아닌 단편 설교였다는 것.

 

또한 존 웨슬리의 성찬 설교에는 당시 청교도적 교리 설교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기법, 그리고 에라스무스 전통 등이 골고루 스며들어 있어 존 웨슬리가 다양한 설교적 흐름에 개방적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성찬 설교의 다양성

 

 

정 박사는 "웨슬리의 성만찬 설교를 교리설교 측면에서 접근하고 평가하는 것은 고민스런 과제를 안겨준다"며 "교리설교의 핵심은 다루려는 교리적 주제를 분명하게 나타내야 하지만 웨슬리는 성찬 시행과 관련해 문자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한 부분이 있다. 문자적 의미에만 매여 성경자체를 도외시할 경우 성경이 아닌 설교자의 '지식'이 설교를 지배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웨슬리는 두 편의 설교에서 회중을 의식한 방향설정에 치중한 나머지 성찬이 강조해야 하는 사항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전달한 설교의 특성을 갖고 있는 반면, 자신의 성찬신학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정 박사는 "성찬을 다루는 교리설교를 듣고도 회중이 설교자의 성찬관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설교자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가령 한편의 설교가 교리전체를 드러내는데 부족하다면 연속설교 형태를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교리설교는 시대와 소통방식의 변화와 회중의 다양성 등을 고려할 때, 변증설교, 논의(쟁)적 설교, 그리고 선언설교로 대변되는 존 웨슬리의 직접적 교리표현 방식으로만 일관하기보다는 다양한 교리설교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교리를 설명하는 '교리-전기적 설교'나 2인의 설교자를 내세워 상호 대화를 통해 교리를 풀어가는 ‘2인 대화 설교’ 등 새로운 설교방법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황헌영 박사는 웨슬리가 보여준 성만찬 의례의 통전적 복음전파의 특징을 심층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성만찬의 의례가 주는 유익과 현대 심리치료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다뤘다. 황 박사에 따르면 성만찬은 불안 해소의 방어기제, 원형의 상징과 신비적 경험, 창조적인 삶을 위한 통과의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찬은 '기억' 사건 아니다"

 

황 박사는 "성찬에는 실제로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이 있으며, 성도를 회개하게 하며, 거룩하게 하는 효능을 담은 성령의 수단(도구)임을 웨슬리의 성만찬에서 확인할 수 있다"며 "웨슬리는 성찬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해 단순히 인지적 작용이나 ‘기억’에 그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고 보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통로로 정의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는 신비적 경험"이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믿음으로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신자들은 ‘지금-여기’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내면적 변화 혹은 심리학적 변화로 주목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황 박사는 "웨슬리는 성도가 '은혜의 수단' 성찬에 참예함으로써 거룩하고 신비로운 열매를 경험하게 된다고 밝힌다. 성찬의 효능이 세상에 속했던 죄 된 본성을 벗게 하고, 영혼의 강건함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는 은혜가 된다고 강조한다"며 성도의 내면세계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성찬의례를 심층심리학적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찬과 내면세계의 변화

 

 

황 박사에 따르면 몇몇 심층심리학자는 성찬의례를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도구', 신적인 영역과의 합일을 제공하는 '상징적 예식', 새로운 의미와 존재로 창조되는 통과의례로 접근하며 해석한다. 

 

이와 관련 "심층심리학의 성찬의 의례에 관한 관심은 이 의례의 행위가 인간 생애 전체에 걸쳐 전달해주는 변화와 이를 전인적으로 표현할 때 얻게 되는 새로운 창조적 경험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피려는 움직임으로 옮겨간다"며 "현대 심리치료에 있어서 통합적 표현예술치료에서 추구하는 전인적이고 가시적인 표현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성찬의 예는 우리가 ‘머리’로만 이해하고 끝나는 정신적 작용만은 아니다. 참여자들이 '몸’으로 직접 참여하는 전인적인 경험이 된다"고 강조했다.

 

 

"사이코드라마와 성만찬"

 

 

특히 황 박사는 '사이코드라마'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사이코드라마는 영혼의 드라마이며 인간의 전 존재를 다루는 치료방법이라는 것. 현대심리치료 분야에 표현예술을 포함한 전인적 치료운동을 불러일으킨 사이코드라마는 총체적 인간 경험의 입장에서 치료하는데, 이와 같은 시각에서 성례전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초기 정신분석의 이해는 인간 내면의 불안을 떨치는 방어기제로서의 의례를 통해 성례전을 이해했지만, 계속되는 심층심리학적 접근은 이 의례가 가져오는 정신 내적 효과에 주목하며, 의례 속에 담긴 수많은 상징이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기회를 준다"며 "성찬은 바로 이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는 하나의 통과의례의 역할을 외적이고 가시적인 행위를 통해 가능함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황 박사는 "영혼의 드라마라 불리는 사이코드라마는 이러한 심층심리학의 세계가 제공하는 개념들을 통합적으로 수용하여 성찬의례가 담고 있는 경험의 의미들을 되새긴다. 특별히 ‘잉여현실’로 대표되는 사이코드라마의 감정정화 기법과 새로운 삶을 위한 역할전환의 경험은 성찬을 통해 신자가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현존, 그리고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거룩의 삶으로의 진입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피력했다.

 

 

"성만찬:통합적 복음전파 선구자"
"심리치료와 대화하는 자원"

 

 

사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종교가 담당해온 기능들을 심리치료가 대신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황 박사는 "현대 심리치료는 인간 개개인이 참된 자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도우며, 이를 위한 치유의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며 "심리치료가 종교를 대신하는 일들은 그동안 종교계가 ‘머리’와 ‘이성’ 중심에 치중하여 온 ‘몸’으로 경험하는 인간 내면 탐구의 경험들을 소홀히 하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복음은 '머리'만이 아닌 온 몸, 온 존재로 느끼고 깨달으며 참여하는 사역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복음 전파의 장래는 그리 밝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황 박사의 견해다. 그는 "‘머리’로 한정된 방법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할 뿐이다. 심리치료 분야가 ‘머리’에 한정된 치료에서 온 ‘몸’을 활용하는 표현예술의 방법으로 달려가고 있듯이 온 ‘몸’으로 참예하는 성찬의 의미와 효과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웨슬리의 성만찬 이해는 실로 통합적 복음전파의 선구자적인 안목을 보여준 것이이다. 또한 오늘날의 통합적 심리치료와 상호비판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귀한 자원과 방법론이 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정병식 박사는 중세시대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성만찬 이해로부터 루터, 츠빙글리, 칼뱅의 성만찬 이해 등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 이해와 성찬논쟁을 추적하면서 요한 웨슬리의 성찬신학을 분석했다.

 

 

"다르지만 같은 성례전"

 

 

정 박사는 "16세기 개혁자들은 화체설을 비판한 위클리프와 후스의 성례전 이해를 계승했지만 각자 성례전 이해는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루터는 실재적 현존으로 이해했고, 츠빙글리는 기념과 상징으로, 그리고 칼뱅은 영적 임재와 은혜의 도구로 성례전을 표명했다. 물론 개혁자들의 성례전 이해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 제정하고 시행한 성찬을 서로 다르게 바라봄으로 해석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웨슬리의 경우 성만찬을 은혜의 도구, 표지, 수단으로 이해했다. 개혁자들의 성만찬 이해의 길이 각기 엇갈렸지만 공통된 지반은 성찬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이다. 다양한 이해가 특징이나  완벽하게 구별되는 고유의 색채를 지닌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용어이든, 의미이든 일정 부분 상호 교류하고, 중첩되며 포개지면서 개혁자 상호간의 성찬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루터는 성찬을 가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강조했고, 설교처럼 성찬에도 구속사적 의미가 담겼음을 강조했다. 반면, 츠빙글리에게 성찬은 단순한 상징(signum) 혹은 표식에 불과했다. 성찬에의 참여가 루터에게는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츠빙글리에게는 그리스도는 믿는다는 차원이었다.

 

칼뱅에게 성례전은 성령의 개입으로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육체적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츠빙글리와 일치하지만, 그럼에도 영적이라는 점에서는 루터와 가깝다. 루터에게 성찬은 가시적 그리스도의 실재이지만, 칼뱅에게는 비가시적 실재를 나타내는 표지라는 점에서 츠빙글리에게 가깝다. 그래서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서 중간의 길, 중재적 입장을 취한다.

 

 

"루터와 웨슬리의 성만찬"

 

 

정 박사는 "웨슬리의 입장은 주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과 매우 중첩된다"며 "웨슬리는 성찬 시행의 당위성을 주님의 명령에서 찾으면서 성찬을 교회와 성도의 필수사항으로 여겼다. 또한 성찬의 규칙성과 지속성을 강조했다"며 "물론 성찬 자체나 그 횟수와 반복된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웨슬리의 강조는 성찬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 있다. 성찬은 회심을 가능하게 하고, 믿음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성찬을 기도 및 성경연구와 더불어 ‘은총의 수단’에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특히 "웨슬리가 설교와 성찬을 예배의 두 축으로 삼은 것은 루터와 동일하다"며 "설교와 성례전은 웨슬리에게 결코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다. 두 가지 측면이 하나라면, 설교와 성례전을 말씀의 차원에서 하나로 묶은 루터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설교를 ‘듣는 말씀’ 그리고 성례를 ‘보는 말씀’으로 해석해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로 묶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웨슬리와 루터의 성찬 이해도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정 박사는 "웨슬리가 예배에서 성찬을 중심에 세우고, 설교와 함께 가는 것으로 보았다면, 루터에게는 선포로서의 설교가 먼저이지만, 둘 모두 객관적인 비중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볼 수 있다. 웨슬리가 성찬을 그리스도의 명령이기에 성도의 의무로 여겼다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차원에서 성찬을 당연시했고. 이러한 점에서 두 사람의 신학적 중첩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서울신대 웨슬리신학연구소는 심포지엄과 함께 토머스 오든의 '존 웨슬리의 기독교 해설'을 4권으로 번역 출판한 장기영 박사의 '출판기념회'도 동시에 진행했다.

 

 

아래 유튜브 영상에서 이날 심포지엄 및 출판기념회 전체 진행내용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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