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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생태신학, 인간과 동물은 ‘여섯째 날의 생명공동체’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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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세계에서 본 동물의 신학적 의미 / 김형민 교수(호남신대 교수)

 

동물학대는 인간의 자기존중 원리 파괴하는 행위
고난 받는 동물은 탄식하는 우리의 이웃
피조물 돌보지 않는 신앙은 무의미하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신 각 동물을 자기 종에 맞는 생식과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줄여가면서 창조의 평화가 회복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나가야 한다.” 


김형민 교수는 “인간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연적 존재이기에 자연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며 “자연에 대한 폭력을 최소화해야 할 과제를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동물을 위한 책임요청은 이제부터 모든 사람이 고기를 먹지 말고, 채식만 해야 한다는 급진적이며 이상주의적 동물해방과는 다르다”며 “기독교는 마니교처럼 인간의 모든 악이 육식에서 생기기 때문에 육식을 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금욕종교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동물이 생존의 위기를 겪는 오늘날 기독교윤리학은 희생자의 관점에서 고통당하는 동물의 삶의 자리를 살펴야 할 것”이라며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고난 받는 동물과 연대, 육류소비 절제, 잘못된 보신문화의 근절 노력, 인간의 오락을 위한 동물학대 금지 등을 실천해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다음은 ‘창조의 세계에서 본 동물의 신학적 의미’를 주제로 발표한 김형민 교수의 주요 발표내용이다.

1. 오늘의 생태계는 회복 불가능할 만큼 파괴되고, 그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다. 인구의 폭발적 증대, 핵폐기물의 각종 유출과 누출, 자동차 배기가스 등의 오염으로 식물과 동물들이 나날이 멸종되고 있으며, 유전공학으로 개량된 농작물이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2. 우리는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구원을 열망하는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곳곳에서 듣고 있다. 세상을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동물과 식물을 생명 없는 기계로 보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는 지구의 환경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날 인간과 자연을 포괄하는 총체적 구원이 요청되고 있다.

3. 창조의 역사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관계의 사건이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과 맺으신 다양한 역사적 관계들을 신앙적으로 고백한다. 차오의 중심적 의미는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 과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이다. 그런즉 자신의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는 창조는 신앙적으로 무의미하다. 창조는 신앙적 윤리로 표현된 자연을 의미한다.

4. 성서적 관계의 신학은 창조세계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한정하지 않고 다른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도 중시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이유만으로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는 자라면 예외 없이 우리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서 경험하는 놀라움은 자연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근거이다.

 

 

5. 기독교 창조신학은 적자생존의 사회발전이론이 만들어낸 피조물의 고난을 목도하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의 현재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오직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을 위한 고난이기도 하다(빌 2:10). 모든 피조물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으로 인해 고난 받는 모든 피조물의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게 한다.

6. 현재 대부분의 동물은 인간의 욕망과 무지로 인해 고난을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동물은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우리의 이웃이다(롬 8:22).

7.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도우며 살도록 여섯째 날에 함께 지으셨다. 이로써 인간과 동물은 ‘여섯째 날의 공동체’라는 생명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됐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의 이름을 짓도록 하신 것(창 2:19)은 인간과 동물의 이러한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창조신학적 상징행위다.

8. 노아의 홍수 때에도 동물들은 각기 암수 한 쌍씩 인간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로 초대됐다. 이는 구약 예언자들의 약속(사 11:66 이하, 호 2:18, 사 65:25)과 사도 바울의 종말론적 소망(롬 8:19~23) 가운데 계속 고백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창조와 사귐 속에 있는 피조물’이다.

9. 교회와 신학이 오랫동안 동물을 잊고 살아왔지만 성경은 곳곳에서 동물을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증언한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슴을 구하여 주시나이다(시 36:6).

10. 구약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예배행위 중 하나는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는 일이었다. 동물희생제는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제사의식이었던 만큼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분명하지 않다. 동물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보속의 역할을 했다. 결국 짐승이 죽음으로 인간의 죄가 사함을 받고 속량 받게 됐다.

 


11. 레위기에 등장하는 희생제사 등 이스라엘의 동물제의적 전통 때문에 구약성경은 동물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약의 동물제의가 동물에 대한 적대적 예식이나 행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이 같이 지어주신 인간과 동물의 깊은 연계성을 말해준다.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 동물은 인간의 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다. 인간은 동물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갔고, 동물로 인해 속죄함을 받았다.

12. 그렇다면 동물제의는 동물을 학대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을 막론하고 모든 세계가 오직 하나님 안에 함께 속해있음을 고백하는 예식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죄로 동물이 희생되고 인간의 죄는 속량함을 받았으며,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됐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동물제의는 인간의 식욕충족을 위한 동물도살과는 다르다.

13. 신약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허물을 벗기 위해서는 더 이상 동물의 피가 소용없고,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만이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다(히 9:11~14). 결국 인류의 죄를 씻어주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인하여 동물은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가 없게 됐다.

1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속하고, 동물들을 인간의 죄를 위한 속죄양의 역할로부터 해방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해 동물은 새 자유를 얻게 됐다. 그리스도 이후 인간에게 동물제의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됐다.

15. (동물의 신학적 성찰) 성서적 동물이해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공동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특별한 책임을 환기시킨다. 동물도 하나님의 ‘공동피조물’이다. 동물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의 친구로서 도덕적 질서에 속해 있다.

 

 

16. 공동피조성은 두 가지 신앙적 의미를 가진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에서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서로 돕고 연합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피조물의 생명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이들을 활용하고 경외심을 갖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보존해야 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됐다 하더라도 피조물간의 상호의존관계는 끊을 수 없다.

17. 동물은 인간과 같이 도덕과 권리의 주체일까? 환생을 믿는 타종교의 전통에 따르면 동물은 고유한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전통에서 볼 때 동물은 영혼 없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동물을 인격적으로도, 동시에 계기로도 보지 않는다. 동물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한 부분으로 자신의 고유한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 동물의 생명은 마음대로 처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유용성이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18.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자연과의 평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공동체에서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은 구분된다. 이 말은 인간이 동물에게 임의적으로 고난을 주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잔인한 행위는 인간의 기본적 자기존중의 원리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다.

19. 동물이 생존의 위기를 겪는 오늘날 기독교윤리학은 희생자의 관점에서 고통당하는 동물들의 삶의 자리를 살펴야 한다. 분명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신학적 사고를 제한하려는 생각은 매우 협착한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20. 고난 받고 있는 동물들을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고난 받는 동물과 연대해야 한다. 동물이 인간의 무지와 욕구총족을 위해 학대받고 있는 시대에 교회의 책임 있는 연대행위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 동물과 자연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21. 둘째, 육류소비의 절제이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급격히 증대하는 육류소비를 충족하기 위해 소나 돼지에게 강제로 물을 먹인다. 연하고 분홍빛 색깔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거의 움직일 수 없게 감금된 송아지에게 비타민, 미네랄 그리고 성장촉진제가 첨가된 액체음식을 먹여 사육한 후 비싼 값에 팔아넘긴다. 현대의 각종 악성 질병은 육류소비의 급격한 증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개최되는 모든 향연에서 모범적으로 육류소비를 절제하고, 줄여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22. 셋째, 잘못된 보신문화의 근절 노력이다. 한국인들의 탐욕적 보신, 혐오식품에 대한 미신적 도취와 과대 복용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동물의 멸종현상은 인간의 역사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점점 더 소멸되고 있음을 증거한다. 교회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약자인 동물의 생명을 위협하는 보신문화의 비신앙적 성격을 지적하고, 건강한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이 온전한 교류를 통해 얻어지는 총체적인 것임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23. 넷째, 인간의 오락을 위한 동물학대를 금지해야 한다. 동물서커스와 같이 인간의 오락만을 위한 동물사육은 성서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동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이웃이며,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다. 동물도 자기 종에 알맞은 대우를 받으며 그들의 고유한 필요를 충족해야 한다.

24. 여가선용의 즐거움을 위해 행해지는 사냥꾼의 동물살해도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사냥은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과 고난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질서까지 파괴한다. 생태계의 균형유지를 위해 동물을 숫자를 제한할 필요가 있을 때라도 사냥같이 잔인한 방법이 아니라 인도적 방법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25. 인간 외에 자연도 구원을 열망하는 피조물의 한 부분임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욕구충족만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거나 자연의 고유한 존엄성을 짓밟을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평화를 깨뜨리는 비신앙이다.

26.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책임의 주체는 인간이다. 자연의 존엄한 권리를 보존해야 한다는 말은 책임의 주체인 인간이 타인의 생명권을 인정ㅎ아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는 ‘자기절제의 윤리’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성서의 안식일 계명은 인간이 지켜야 할 자기제한의 윤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신 5:13~14).

27.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신 각 동물을 자기 종에 맞는 생식과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줄여가면서 창조의 평화가 회복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나가야 한다.

▶ 위의 내용은 한국교회환경연구소가 지난 2011년 4월 20일 동숭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고난, 피조물의 탄식-동물과 육식에 대한 생태신학적 성찰’을 주제로 개최한 ‘2011 지구의 날 기념 생태신학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 가운데 일부 발췌 및 정리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단체에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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