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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원문] 세월호 사건에 직면한 한국교회의 윤리적 과제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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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형 교수(숭실대)

 

2014년 12월 1일 기사

 

세월호 사건에 직면한 한국 교회의 윤리적 과제: 
시몬느 베이유와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고통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1. 글을 시작하며 - 끝나지 않은 세월호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영원회귀를 바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 한 번도 중단된 적 없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항상 이미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람들이 아우슈비츠를 영원히 잊을 수 없듯이,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닷물에 배가 침몰한 '사고'를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 떨고 있냐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세월호는 단순한 사고가 아닌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 200 여 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은 세월호에 머물러 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듯이 우리는 세월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세월호가 침몰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맴돌고 있는 것일까?"

 


먼저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다. 현대 한국 사회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서 고통당하고 있다. 피곤하고 우울하다.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효율성으로 달려온 현대 사회는 이제 그 피로감이 극에 달했고, 이미 이 사회는 우울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감상하고 즐기는 포르노 사회가 되었다. 모든 것을 전시의 대상으로 삼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과정들을 겪어가면서, 아름다움이 아닌 욕망을 드러내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예의를 상실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내세우기 위해서 온갖 모욕적인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여과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이러한 사회 진단은 서구 사회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진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청난 부를 만들어낸 성공한 한국사회를 국제사회는 모두 부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 이루어낸 성과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은 피곤하고 우울하며, 점점 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즐기는 데 치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한국 전쟁이후 가장 큰 사건이라고 말을 하면서, 이제 한국 사회는 세월호와 함께 물속에 침몰되었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눈에 띠고 있다.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세월호 사건과 정치권력을 떼어놓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한국사회가 앞으로 가기 위해서, 한국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쁜 의도에서 직면한 이 사건을 모면하기 위해서, 혹은 한국 사회의 죄악을 회개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견해는 신학적이지도 않고, 더군다나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더욱 모순이 크다. 신학적으로 이런 해석에 문제가 있는 이유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관계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고, 사회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악의 문제가 명확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고통의 관계가 적절하게 설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런 생각은 하나님 앞에선 인간이 스스로 직면하고 있는 여러 많은 상황들에 어떻게 대답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세월호 사건이 의미를 고통의 의미를 통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펴봄으로 고통에 대한 윤리적인 차원에서 접근을 시도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인 하나의 대답을 찾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 한국 기독교가 고통에 함께 울고, 고통당한 사람들을 어루만져주고, 깊은 위로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윤리적인 공동체가 되는 한 길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2. 시몬느 베이유: 고통과 하나님

고통의 문제에 직면한 실존주의 철학자 중에 한 사람으로 시몬느 베이유가 있다. 그녀는 20세기 초의 비인간적인 상황에 직면하면서 철학적인 작업을 시작하였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나찌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석하던 중에 지병으로 인해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철학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깊은 고통과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한 전체주의로부터 오는 고통을 함께 아파하면서 철학 작업을 전개하였다. 베이유는 고통을 피해야할 어떤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할 인간의 실존적인 경험으로 생각한다. 베이유는 고통을 세 가지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님의 신적인 사랑과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인 행동과 세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고통에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먼저 베이유는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신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통은 사람을 신적인 사랑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면하게 만든다. 그녀의 이러한 인식은 그녀의 고통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어느 날 예배의식에 참여하던 도중에 평소에 앓고 있었던 심한 두통에 다시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고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을 깊게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고통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화려하고 높게 솟은 교회 종탑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웅장한 교회 음악에서 현현하시는 분이 아니다. 베이유에게 하나님은 완전한 어둠이 드리워진 무덤과도 같은 극심한 공포와 공허함과 절망 속에서 이제 ‘하나님은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에 찾아오시는 분이다. 마치 욥이 깊은 고통의 절망 속에서 절대자를 만나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듯이, 그 어떤 것도 이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없는 그 순간에 함께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의 역설이다.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사형의 현장인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고통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할 것이 아니라, 고통에 직면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러한 직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배우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직면하게 된 인간은 이제 비로소 자신과 세계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고통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다 내어준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게 된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자신을 직면하고,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게 되는 시간이 된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시면서,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당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고, 세계를 위해서 당신을 완전히 포기하시는 순간, 비로소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완성되었듯이, 인간은 고통의 순간 나를 하나님께 맡기게 되고, 그 순간 비로소 나를 타인에게 내어줄 수 있게 된다. 고통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깨닫게 되고, 그 생명이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타인을 위해서 내 생명을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 자기부인(self-denial)과 이웃사랑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자기부인의 과정은 고통 속에서 얻게 되는 '자유의 역설'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극심한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게 되면 인간은 자신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 자신을 파괴해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자기부인의 시작이다. 고통 때문에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연민마저 사라져 버리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베이유는 "나 자신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그 순간만이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제, 자기를 부인하게 된 인간은 자신을 타인을 위해서 내어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창조적인 방법으로 자기를 확인해가는 길이다. 인간은 나와 세계의 관계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타자와 연결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은 이웃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고통을 통해서 자기부인의 깊은 경험을 하게 된 인간은 마침내 내 옆에 또 다른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끊임없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듯이, 나의 이웃 역시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인간은 자기 연민에만 사로잡혀서 이와 같이 평범한 사실을 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유롭게 되고, 마침내 인간은 공감(compassion)하고 감사(gratitude)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공감과 감사가 바로 이웃사랑의 원동력이다. 감사하기에 공감하고 공감하기에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이와 같이 고통을 받아들임으로 인간은 신 앞에서, 타인 앞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존재, 즉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구속(redemption)의 순간이다. 왜냐하면, 이 순간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인간은 윤리적인 존재로 자신을 만들어가게 된다.

베이유에게 윤리란 복종의 과정이다. 베이유는 복종이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도덕적인 근거’를 만들려고 노력할 때에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되고 만다. 오히려 무위(無爲, effortlessness)하는 것이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든다. 윤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채우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베이유는 윤리 혹은 도덕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먼저 인간의 실존적인 자리를 묻는다. 인간은 중력(gravity)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이 자리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 자리이다. 인간이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힘에 의존해서 해결하려고 할 때, 오히려 인간은 “중력의 힘(the force of gravity)”에 끌려가게 되고 만다. 이것이 “가장 큰 죄”이다. 역설적이게도 중력의 힘이 작용하는 그 자리가 바로 “은총”이 드러나는 곳이다. 이러한 은총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인간은 “도덕적인 이끌림(moral gravity)”을 경험하게 된다. 도덕적인 이끌림은 인간이 겪고 있는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부족함을 경험한다. 인간은 자신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그곳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 필요를 채워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복종하게 된다. 즉 복종은 필요를 채워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베이유의 필요에 대한 인간의 복종은 인간의 물질적은 욕구 혹은 필요를 채워가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복종은 도덕적인 행동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동기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힘에 끌려서 해야만 하는 노예와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의 힘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을 당하신 것이 아버지를 “위한” 어떤 행동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인간을 위해서” 자발적인 선택이듯이, 인간이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의 자리, 즉 고통의 자리에 대해서 더 깊게 알고 경험할수록, 인간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타인의 필요를 깨닫게 되고 이것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복종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이유가 말하는 복종의 윤리이다.

 


3. 임마누엘 레비나스: 고통과 타인

레비나스도 베이유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세계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에 대해서 씨름하고 고통의 윤리적인 의미를 고민한 철학자이다. 베이유가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고통의 의미를 탐구해 갔다면, 레비나스는 남성적인 논리력으로 고통의 의미를 탐구해 나갔다. 레비나스도 베이유와 같이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이데거 밑에서 박사를 공부하였고, 프랑스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2차 대전이 발발해서 프랑스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전쟁 도중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수용소가 아닌 포로수용소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레비나스는 깊은 고통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바로 자신의 가족들이 모두 유대인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엄청난 고통 앞에 레비나스는 철학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레비나스가 씨름했던 문제는 인류에게 불어 닥친 이와 같은 엄청난 고통, 즉 전체주의가 만들어지게 된 철학적인 원인에 대한 것이었다. 레비나스는 서구 전체주의의 원인이 되는 철학을 자신의 스승이었지만, 나치에 동조해서 엄청난 철학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존재론에서 찾고 있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은 근본적으로 힘의 철학으로 간주한다. 존재론에 따르면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존재는 진리 혹은 진실의 토대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한다. 정의 보다는 자유가 우선한다. 이제 존재는 ‘생각하는’ 존재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새 철학(philosophy)은 자아학(egology)로 변하게 되었다. ‘나’의 우선성은 ‘타인’에 대한 지배로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힘의 철학’ 즉 존재론의 본 모습이다. 결국 이러한 존재론은 서구 철학의 전체성의 원인이 되었고, 이것은 결국 전체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되고 말았다.

레비나스는 이제 더 이상 존재론을 제일철학(first philosophy)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제일철학의 자리에 있어야만 서구 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레비나스는 이 질문에 천착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나’를 존재하기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진정으로 나를 ‘주체’가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타인이 있음을 인식하고 타인의 존재에 반응하는 ‘나’가 될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관계성’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인의 얼굴의 호소를 듣고 대답하는 가운데 ‘자아’는 진정한 ‘주체’가 된다. 타인의 얼굴의 호소는 홀로코스트에서 신음하면서 ‘죽이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호소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존재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종교’와도 같은 것이다. 타인의 얼굴의 호소를 듣고 대답하는 것, 이것은 존재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다. 이제 존재론은 더 이상 제일철학이 아니다. 제일철학은 윤리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전달하는 호소로 드러난다. 고아, 과부, 미망인, 버려진 사람 등등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은 얼굴로 호소한다. 얼굴은 인간의 몸 중에서 가려지지 않고 항상 드러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어 있다. 얼굴은 상처받기 쉽다. 타인의 얼굴은 항상 말하고 있다. 얼굴은 호소하고 있다. 얼굴은 ‘나’에게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나’와 나의 실존 너머에 ‘타인’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얼굴은 ‘나’에게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고통 속에서 외치는 얼굴의 호소에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레비나스에게는 이 얼굴의 호소에 대답하는 것이 윤리의 출발점이다.

 

 

고통은 우리가 색감이나 소리를 듣거나, 혹은 다른 감각적인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일상의 경험으로 “심리적인 내용”을 담지하고 있다. 고통은 거절하고 싶은 혹은 거절당하는 경험으로 매우 수동적인 것(passivity)이다. 고통은 인간이 인식하는 것이지만, 결코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단지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래서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사람은 악의 존재를 체험하게 된다. 모든 악은 고통과 관련되어 있다. 고통을 경험하는 순간 인간의 모든 조건들은 부조리한 것(absurdity)것이 되고 만다. 이제 고통은 인간에게 전혀 쓸모없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절망의 순간이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드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고통의 그 순간 고통을 벗어나고자 인간은 도움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호소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호소는 타인에게 외치는 호소이기도 하고 신에게 외치는 호소이기도 하다. 나의 고통이 혹은 타인의 고통이 서로 만나게 된다. 이 순간이 바로 인간이 서로 관계성(inter-human)을 지닌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이 인간이 윤리적인 부름을 받는 순간이고, 동시에 이 순간이 신에게 호소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는 타인의 얼굴의 호소에 대해서 대답하는 과정이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살려 달라”고 호소한다. 타인의 얼굴은 “살인하지 말라”고 외친다. 이제는 ‘내’가 대답할 차례이다. 타인의 호소에 대해서 나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타인의 부름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레비나스의 윤리의 핵심은 책임감(responsibility)이다. 레비나스의 책임감은 일반적인 의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책임을 개인이 맡은바 일에 대한 수행이라고 생각한다면, 레비나스에게 책임감은 타인의 얼굴의 호소에 대답하는 것이다. 즉 대답하는 능력이다(respond+ability).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25장의 하나님의 나라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한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과 같다(마25:40)’는 말씀과 같은 의미라고 레비나스는 말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나오는 내용처럼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감으로 다가가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에게 책임감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 관계의 핵심이다. 그리고 고통의 순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위로하고 함께해 주는 것이 레비나스의 책임의 윤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타인의 얼굴의 호소가 ‘나’를 윤리적인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그 과정이 바로 인간이 무한성에 대해서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다. 타인이 얼굴의 모습을 하고 내 앞에 있다는 것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현현하는 것과 같다.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나’아닌 다른 세계, 즉 무한한 세계와 내가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 앞에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은 얼굴로 내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이다. 나에게 무한성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나에게 초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나에게 윤리적인 부름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의 호소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근접성(proximity)을 경험하게 된다. 내 앞에 얼굴로 다가온 타인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심(coram)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타인의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제 인간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초월성과 무한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한 방법이다.

 

 

4. 고통과 기독교 윤리

이상에서 우리는 20세기 전반부의 인류가 경험한 엄청난 고통을 몸소 겪어가면서, 고통의 윤리적인 의미에 대해서 철학적인 성찰을 시도한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고통의 윤리는 당면한 고통 앞에 선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비존재의 힘을 극복하고 존재가 존재되기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 윤리적인 과제이다. 그리고 고통의 윤리는 고통의 원인을 파헤쳐서 그 원인의 제공자를 비난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와 고통 속에 계신 절대자를 발견하고, 그 분의 권위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이유와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한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였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사용하셨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그 순간(incarnation)부터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가장 극심한 고통을 십자가에서 몸소 체험하셨다. 고통 속으로 완전히 자신을 내어버림으로 비로소 놀라운 구원이 성취되었다.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절규의 순간이 기독교를 신성(divine)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버림받고 고통당하시고, 벌거벗기우고 죽임을 당하신 그 순간이 정의를 이루신 순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과 공간, 즉 인간의 필요(necessity)에 완전히 복종하게 된다. 극심한 고통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이 윤리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악을 이기고 선을 완성한다는 개념이라기보다 악이나 선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문제 앞에, 인간은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또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통과 복종의 기독교 윤리적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통이란 인간이 자신의 실존(고통)의 자리를 넘어서(cross)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매개로 무한한 자리를 넘어서(cross) 유한한 인간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이러한 넘어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cross)에서 완성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가 위에서 아들을 버리게 되는 절대적인 ‘악’과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성취하시는 완전한 ‘선’의 두 가지 개념들이 하나로 수렴된다. 그것은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공간과 시간(필요)에 복종하시면서 사랑을 이루셨듯이, 인간에게 사랑의 명제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에 복종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자신의 행동을 만들어 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에 대한 복종은 사랑이다.

고통에 복종하는 것이 윤리에서 사랑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한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답하는 것은 인간을 윤리적인 책임으로 이끌어가는 근원이다. 타인의 얼굴의 호소를 보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호소에 대해서 대답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을 숭고하게 만든다. 이런 경험은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초월에 대해서 질문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타자와 자아가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substitution). 나는 이제 타자의 얼굴에 대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내가 타자에게 포로(hostage)가 된 것과도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답하는 ‘나’는 결코 타인의 포로가 되어서 끌려가는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타인의 얼굴의 호소에 대답하는 ‘나’의 발견을 통해서 진정한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서구 존재론에서의 주체성은 대칭적인(symmetry) 관계 속에서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어떤 공격적인 자세를 취해도 무방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전체주의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비대칭적인(dissymmetry or asymmetry) 관계 즉 대답해야만 하는 관계를 발견함으로 ‘주체’를 바로 세우고 이를 통해서 평화와 정의가 가능하게 된다.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레비나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여러 번 인용하였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더 책임있는 존재입니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주장은 윤리에서의 책임감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이 인용구 두 번째 문장에서 ‘나’를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로 바꾸어 본다면 그 의미가 더 잘 새겨질 것이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누구보다도 더 책임있는 존재입니다.” 책임(責任)을 단순한 임무나 의무로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책임이라는 것은 고통하고 있는 타인의 얼굴의 호소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전 과정, 즉 대답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바로 이를 논증하는 것이다.

 

 

5. 세월호와 기독교 윤리

이상에서 고통의 윤리적인 의미에 대해서 베이유의 복종과 레비나스의 책임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세월호를 함께 생각하면서 고통의 의미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인 답변을 모색하면서 논문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세월호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안겨준 사건이다. 그리고 그런 고통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되고, 현 정권이 이 사건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를 거부하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은 지칠대로 지쳤으며, 우울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이 정치권과 유족들의 협상을 마침으로 일단락되었는데, 여전히 아픔을 치료하고 보듬어 가는 방향이라기보다는 사건을 빨리 처리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어가고 있어서 지켜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윤리적인 접근과 실천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윤리적인 접근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한국 기독교회의 고통에 대한 이해의 문제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적지 않은 한국 기독교회는 십자가 대신에 영광과 승리의 신학을 내세우면서 고통을 죄악으로 혹은 하나님의 저주로 혹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 고통, 인간의 구조적인 죄악 때문에 발생하게 된 고통,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은 고통을 모두 하나로 생각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면서 다시는 그런 것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는 달리 접근해야 한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만들어낸 사회적인 고통이다. 처음 이 사건이 발생되었을 때에는 이것은 단순한 사고처럼 보였지만, 이후에 밝혀지고 있는 일련의 진실들을 살펴보면, 그 구조적인 모순이 매우 심각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겸손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세월호와 같은 구조적인 죄악 앞에서 교회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윤리적인 의미에서 필자는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한국 기독교회가 인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얼마나 함께 씨름하고 아파하면서 이 문제를 치료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고통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고통의 요구에 복종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기독교회는 고통에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월호 사건을 지나면서 무뎌질대로 무뎌진 한국 기독교회의 고통에 공감 능력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십자가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길만이 한국 기독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이며, 한국 기독교회가 한국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한국 기독교회는 베이유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은 나를 바라보고 나의 실존에 직면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하셨던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고통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통에 끌려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깊은 실존의 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깊은 심연의 자리에서 위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윤리적인 자리로 나갈 수 있게 된다. 한국 기독교회는 더 이상 고통은 애써 외면하면서 번영만을 추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으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한국 기독교회가 얼마나 책임있는 자세로 세월호 사건을 대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한국 기독교회가 세월호 문제에 책임있게 나서기 보다는 정치적인 견해에 휩싸여 가면서 세월호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더 큰 아픔을 가중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주장한 대로 책임의 일차적인 의미가 타인의 고통에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한국 기독교회의 이러한 능력은 전무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월호의 아픔에 함께 하면서 그 아픔을 달래고 기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소위 말하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적절하지 못한 발언으로 인해서 한국 기독교회의 모습은 실추될 대로 실추되었다. 세월호 사건의 아픔을 개인의 탓으로, 혹은 단순한 사고로 치부해 버리거나, 세월호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세월호 사건의 원인을 밝혀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낙인을 찍는 그런 말은 공해이자 폭력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해야 할 말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책임있는 회개와 사랑의 언어이다.

지금 세월호 사건은 한국 기독교회에 비대칭적인 상태로 놓여져 있다. 한국 기독교회에 기대어서 있으면서 쓰러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의 호소에 한국 기독교회는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처럼, 세월호에서 죽임을 당한 가족의 얼굴로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를, 세월호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너무 불안하고 힘들어서 삶의 지표를 상실해버린 생존자들의 얼굴로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이 사건들을 지나면서 많은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국민들의 얼굴로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어리석음에서 한국 기독교회는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제 그만 해도 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피로감 섞인 감언이설로 사건을 봉합하는 것으로는 아주 무책임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한국 기독교회는 다시 한 번 눈물로 이 일을 대면하고 대답하는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

 

 

6. 글을 마치며

인간이 실존의 문제로 고통하고 아파하는 시간이 끝나지 않는 한 아우슈비츠는 계속 될 것이다. 인류가 아우슈비츠를 잊지 못하듯이, 한국 사회도 세월호를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특히 너무 많은 어린 아이들을 바닷물 속에, 아니 우리의 가슴속에 묻어버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한국 기독교회의 나갈 방향을 다시 한 번 깊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이런 작업을 잘 할 수 있다면, 한국 기독교회는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그 촛대를 옮겨버리실 것이다.

세월호가 한국 기독교회에, 즉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윤리적인 과제는 매우 크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기독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은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 다시 이런 문제가 생기기 않도록 하기 보다는 희생양을 찾아서 대충 처리하고 끝내려고 하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를 그리고 한국 기독교회를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고통의 윤리의 관점에서 세월호 사건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교회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분명 고통의 순간을 지나가는 것인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사람과 함께 하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한국 기독교회가 잠시 멈추고, 고통에 함께 울면서 고통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시간, 타인의 고통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 고통의 필요에 복종하면서 책임감 있게 반응하는 시간으로 다시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한편, 위의 내용은 샬롬나비가 2014년 11월 28일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을 주제로 개최한 제9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주최 측의 자료 제공으로 서비스하지만 해당 게시물의 저작권 및 모든 법적 권한은 제공자 측에 있음을 밝힙니다. 내용의 원할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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