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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원문] '공공하다'의 관점에서 본 마틴 루터의 신학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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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두 왕국론?: ‘공공하다’의 관점에서 본 마틴 루터의 신학/ 김진혁 박사(횃불트리니티신대)

 

2014년 11월 24일 기사

 

아래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가 지난 11월 22일(2014) '한국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을 주제로 개최한 제14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학회의 원문 제공으로 데오스앤로고스에서 서비스하지만 저작권을 비롯한 모든 법적 권한은 해당 학회에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다시 두 왕국론?: ‘공공하다’의 관점에서 본 마틴 루터의 신학
김진혁 박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I. 들어가는 말: 공공성을 위해 공공함을 논하기

공공신학을 논함에 있어 공공(公共, the public)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틴 마티가 성서와 교리적 자료를 이용하여 공적 문제를 이야기했던 신학을 가리켜 공공신학이라 부른 후, 이 용어는 교회와 공적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다양한 신학적 아젠다와 방법론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신학적 작업의 공공성을 보여주고 교회의 공적 역할을 강조한다는 공공신학의 일반적 용례는 광범위하게 수용되지만, 이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데는 너무나 다양한 방식이 있어 그 실체를 포착하기조차 사실상 쉽지 않다. 그런 와중에 한국 신학계에서 일어나는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많은 이들이 한국적 공공성을 찾기보다는, 서구 사상가들의 이론에 크게 의존하며 공공신학을 전개하려 한다는 점이다.

 


공공에 대한 이해를 서구의 public 개념으로부터 끌어오는 접근법은 신앙을 개인의 사적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강했던 한국 기독교에 공적 기독교의 모범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할만하다. 그럼에도 이 같은 접근법을 취할 때 두 가지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첫째, 공공성 확보를 위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는 공공신학이 오히려 해외 신학에 정통한 전문신학자들의 전유물화 되면서, 공공신학을 추구하는 학자들의 엘리트적 소종파화가 진행될 위험이 있다. 둘째, 서구 공공신학의 핵심 범주인 공적영역 혹은 공공장 등이 공공성에 대한 담론과 시민사회 전통이 얕은 한국 기독교 상황 속에서 얼마나 적실성이 있을지에 대한 연구와 설득작업이 필요하다.

서구 신학자들이 공공 영역을 신앙과 공적 삶의 매개체로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유럽인이나 북미인이 오랜 이론적 실천적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역사 속에서 공공 영역을 형성해 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지속되었던 소위 기독교 왕국 덕분에 유럽은 기독교와 공적 삶이 결합되었던 구조적 틀을 가졌었다. 또한 이들의 민족언어 역시 기독교 사회 내의 삶의 다층적 모습과 함께 발전하였기에, 교회의 언어가 공공성을 어느 정도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공공성에 대한 서구 이론을 통해 공공신학을 소개하는 것만큼이나 현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적 공공 개념을 가지고 성경과 교리적 자료가 어떻게 공적 문제를 설명해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논문은 마틴 루터의 두 왕국론과 한국의 공공철학자 김태창의 공공성 담론과 대화를 시도함으로,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공공신학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이 연구가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를 선택한 것은 그가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놓는 선구적 역할을 했기에, 그에 대한 해석이 개신교 공공신학의 방향과 한계를 결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루터가 강조했던 이신칭의(以信稱義,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가 왜곡되어 행위를 무시하는 윤리적 진공상태가 교회에 만연했고, 그 때문에 한국 개신교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비판을 오늘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전적으로 은혜의 사건인 칭의(稱義)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화(聖化)도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게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칭의 개념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신학적 작업 없이는, 성화를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이것이 신앙의 공적 실천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본 논문은 루터의 이신칭의론의 확장된 형태인 두 왕국론을 공공성이라는 시각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오늘날 한국교회를 위한 공공신학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루터와 한국의 공공철학자 김태창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공공성이 형성되는 전제로 참 인간됨의 인식을 강조하는 김태창의 방식이 루터의 공공신학적 함의를 드러내는 데 적합한 틀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신학을 현대적 개념인 공공성과 연관하여 해석하려는 시도는 본 논문의 여러 한계를 만들어 낸다. 첫째, 루터의 저작에 대한 정확한 독해나 그의 사상의 변천 같은 정교한 학술적 논의는 본 논문에서 다루어질 수 없다. 또한, 이전의 루터 연구를 포괄적으로 소개하지는 못하고 그의 신학의 공공적 성격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문헌들만 선별적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을 위한 루터 사상의 의미를 찾으려다 보니 그의 정치사상이 실제 역사에 끼친 영향에 대한 논의도 발전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재구성한 루터 사상을 통해 공공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상상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가지고 전개 된다. 우선은 김태창의 공공철학을 통해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사이의 역동성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활사개공’의 개념을 제시할 것이다 (II). 그 후 루터의 이신칭의 개념이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이라는 두 정부에 대한 구분을 형성했는지를 간략히 분석하고는, 두 왕국을 ‘매개’하는 다양한 노력이 신학적 공공성을 형상화하는 중요한 기초가 됨을 보여줄 것이다 (III).

 

 

II. 활사개공(活私開公): 상생과 화해를 위한 공공철학이란?

최근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논의가 ‘공공성’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공공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신학적으로 연구하고, 신앙의 공적 차원을 강조하는 현대신학의 흐름을 공공신학이라 부를 수 있다. 서구 사회에서 공공성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하더라도, 그 개념 자체는 성서나 교리에서 직접 추출하여 형성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공공신학은 공공성에 대한 철학, 사회학, 정치학 등 타학문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융합학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공동의 삶과 공공선을 위해 신학이 타학문과 대화해야 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공공 개념을 전제하느냐에 따라 공공신학의 성격과 방향과 범위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서구에서 ‘공공적인 것’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1950년대 이후 한나 아렌트, 월터 리프먼, 로버트 벨라, 위르겐 하버마스, 라인홀드 니버 등의 걸출한 철학자, 사회학자, 신학자 등에 의해 일어났다. 유럽과 북미에서 세계대전, 경제불황, 이념논쟁 등으로 빈약해져버린 공공성을 새로이 규정하고 회복하려는 이들의 방식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그들의 영향 하에 ‘공공성’ 자체가 중요한 학문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동아시아 학자들은 서구에서 말하는 공공적인 것, 즉 영어로 public이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말한 공공적인 것과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심각히 질문하고 있다. 한중일을 넘나들며 공공철학 연구와 강연과 토론을 하고 있는 오사까 공동철학 공동 연구소 소장 김태창은 조심스레 둘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국의 “Public Philosophy”에서 “Public”은 명백히 “공개성”과 “공통성”에 중점이 놓여 있습니다. 가량 영어의 “public”이란 말이 “모두에게 알려진,” “모두와 공통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private”가 의미하는 개개인의 내향적 폐쇄성이나 사밀성(私密性)과 대비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언어적·문화적 배경과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의 “public”에는 국가나 정부와의 관련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공식성”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영어의 “public”이 한자어의 “공”(公)과 그 의미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만약 “공”(公)과 “공”(共)을 구별할 필요를 인정하는 입장에 선다고 한다면 영어의 “public”에 기초하여 구축된 “Public Philosophy”와는 다른 발상에서 전개되는 철학이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저는 결코 동아시아주의자는 아닙니다. 반(反)서양도 아닙니다. 다만 유럽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對話)·공동(公働)·개신(開新)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에 원래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있는 사상자원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김태창은 영어의 public과 한자문명권의 공공개념의 차이를 보여주고자, 공공철학의 세 가지 다른 의미를 보여준다. 첫째는 공공의 철학이고, 둘째는 공공성의 철학이고, 셋째는 공공하는 철학이다. (1) 공공의 철학은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철학으로, 전문화를 피하고 대중과 호흡하며 대화하는 융합학문적 성격을 취한다. (2) 공공성의 철학은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 역사적, 현상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 지향의 철학 형태이다. (3) 공공하는 철학은 공공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이해하며, (공과 사를 나눠서 보는 이원론적 사고를 넘어) 공과 사를 공공을 통해 상생시키고자 하는 삼원적 사고를 특징으로 한다. 물론 서구 공공철학에서도 정치적 자유주의로 인해 나눠진 공과 사를 매개하는 제 3의 영역으로 공공의 장의 가능성을 질문하고 있다. 하지만 김태창은 한자문명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공공을 동사로도 볼 수 있기에, 공공철학이 특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동사로서 ‘공공하다’는 무엇을 의미인가? 김태창은 한마디로 “‘공공’(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과 “사”의 “사이”의 상호관계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한다. 한 예로, 영어의 public은 공적 영역만을 가리키지 않고, 공(公)이 갖춰야 할 이상적 자질인 공평성, 공정성, 공개성 등의 의미도 포함한다. 공공철학이나 공공신학은 공으로서 정부가 결여하지만 사에게 마땅히 보여줘야 할 공공적 가치를 연구하고 추구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저 영어 public은 한자어 공공(公共)과는 차이가 있다. 공공은 자기와 타자,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사이’를 중심축으로 하여 “자타상관”(自他相關), 즉 ‘나’와 ‘너’ ‘사이’의 상호관계가 형성하고 발전하고 진화하는 역동성에 집중한다. 인간의 개인적 삶과 사회적 실존을 통해 형성되는 다차원적인 ‘사이’를 인식하고, 그 ‘사이’를 중재하고자 함께 기획하고 일하며,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고, 화해를 달성하여 결국 상생하는 것이 동사로서 ‘공공하다’의 참 뜻이다.

동사로서 공공하다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고자 김태창은 “활사개공”(活私開公)이라는 개념을 주조한다. 이 말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과 사의 뒤틀린 관계의 두 형태를 먼저 파약할 필요가 있다. (1) 첫째는 공을 존중하고자 사를 기피하고 희생하는, 그리하여 사의 존재감과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배척하고 부정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태도이다.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이 말은 나라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게 하는 군국주의, 전체주의, 유교적 봉건주의 등의 각종 정치체제를 지지하는 기본 이데올로기로 쓰이곤 했다. (2) 둘째는 그 반대 입장으로, 공의 권위와 합법성은 사로부터 발생한다는 생각이 극단화되거나, 자아 외부의 타자와 공공생활에는 전혀 관심과 투자를 하지 않는 멸공봉사(滅公奉私)이다. 김태창, 야마와키 나오시 등의 아시아 공공철학자들은 멸사봉공과 멸공봉사가 상극으로 보일지라도, 개인에 대한 존중과 타자에 대한 감각을 결합하는 ‘공공성’을 결여하고 있기에 이 둘은 사실 동일한 문제라 보고 있다. 멸사봉공과 멸공봉사는 악순환 관계 속에 있으며, 양자가 한 사회에 공존하는 역설적 현상도 발견될 수도 있다.

 


멸사봉공과 멸공봉사를 넘어서는 상생과 화해의 공사관계를 위해 김태창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의 활사개공의 관점에서 보자면 공공하는 것이란 ““사”(의 존재·가치·존엄)를 “소멸”(滅. 억압·희생·부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살림(活, 인정·존중·발전)으로써 “공”(국가·정부·체제)을 국민·시민·생활자에게 “열”(開, 응답·책임·배려)리게 하는 것”이고, “공”과 “사”의 사이(間)에서 양쪽을 함께 매개(=공매(共媒))하는 작용으로, 공공을 동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사변적 담론보다 우선시 되어야하는 것은 사를 살리는 것[活私], 달리 말하면 인간됨을 바로 이해함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삶의 자세와 실천이다. 인간(人間)이란 개념 자체가 자기와 타자 ‘사이(間)의 상호관계’를 말하는 것이므로, 활사는 타자를 먼저 살림으로서 자기도 살게 된다는 활인(活人)의 철학에 기초한다. 그렇기에 김태창은 활사를 “타자의 “사”- 인격의 일인칭성과 생명·생존·생업의 당사자성과 사고와 판단과 행동과 책임의 주체성과 언어활동에 있어서 주어성(主語性)과 같은 구체적 실존적 자각의 근원 —를 살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결국, 공적 영역의 개혁은 인간됨에 대한 근원적 인식전환이 없이는 안 되며, 공(公)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공공(公共)이 새롭게 상정되어 이를 매개로 공과 사가 끝없이 대화할 때 가능하다.

공공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를 중재한다는 주장 자체는 어떤 면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김태창의 특수함은 공공을 양자를 매개하는 ‘작용’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공사공매(公私共媒)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는 데 있다. ‘공공하다’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과 사 어느 쪽도 예상치 못했지만 쌍방이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가는 활동이다. 공과 사가 끝없이 대화하고 상생하는 움직임이 공공함이기에, 이는 “행복공창”(幸福共創)이라는 또 다른 한자어로 표현된다. 공과 사가 함께 만들어가는 행복이 공공함의 목적이지만, 그 행복이 특정한 정책이나 프로그램으로 정의될 수는 없다. 공공함이란 구체적 상황 속에서 실천, 기획, 제도, 기구 등으로 한시적으로 형상화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공공철학은 이상적 공공영역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고 행복을 함께 만들어가는 삶과 학문의 자세 자체에 더 비중을 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활사개공, 공사공매, 행복공창은 자기와 타자와 세계를 상호연동적으로 이해하며, 대화와 조정을 통해 공과 사를 상보적으로 개선하고 향상시키고자 하는 김태창의 세 가지 키워드이다. 이상사회에 대한 꿈을 꾸면서도 실현 가능한 상생의 공사관계를 도모하고, 현실을 비판하되 공사가 화해할 길을 찾는 것이 ‘공공하는’ 철학이다. 공공신학에서 중요시하는 여러 주제들이 (예를 들자면 가치의 초월적 근거, 악을 향하는 인간과 사회의 본성,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 등) 그의 철학에는 물론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가 그의 공공철학과 대화하고자 하는 신학자가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아야 할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김태창의 공공철학은 우리가 신학함에 있어 근원적 통찰을 제공한다. 우선 공공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아니라 타자 앞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 즉 활사가 공공성을 논의하는 가장 근원적 토대가 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공을 실체로 상정하지 않고 공과 사를 매개하는 ‘사이’로 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범주’ (coram deo)와 ‘타자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범주’ (coram hominibus)의 긴장 속에서 기독교인의 공적인 삶을 정의하려 했던 루터파 종교개혁 신학과도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 김태창의 공공철학이 던지는 이러한 신학적 도전을 염두에 두고 이제 루터의 신학 속에서 공공신학의 가능성을 질문해 보도록 하자.

 

 

III. 이신칭의와 두 왕국론: 루터 신학에서 공공적인 것이란?

이번 장의 목적은 루터에게 공공성 여부가 있는지를 중명하는 것이 아니라, 루터를 통해 ‘공공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탐구하고 그 실천적 함의를 끌어내는 것이다. 알트하우스에 의하면 루터의 윤리사상은 은혜에 의한 죄인의 칭의 사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제가 윤리학적 결론이 되면 루터의 본 의도가 곡해된다.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는다는 루터의 주장이 불가피하게 선행의 중요성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은 개신교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러나, 근대인의 윤리적 에토스나 정치사상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친 루터의 가르침은 두 왕국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공공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을 구분하는 두 왕국론이 복음과 정치사회적 차원을 이분법적으로 나눴다는 비판이 더욱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루터의 두 왕국론이 칭의론으로부터 확장된 교리이기에, 칭의론의 윤리학적 약점이 두 왕국론에서 공공성의 부재로 드러났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공과 사를 나누고, 신앙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근대적 정신을 루터에게 역투사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공공적인 것’을 정부와 개인 사이의 제 3의 영역으로 상정하고 그 틀에서 루터를 본다면 두 왕국론은 개인 신앙과 정부의 통치를 나누는 단순한 이원론적 가르침으로 이해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김태창이 제안했듯) 공공을 우선적으로 공과 사를 매개하는 활동으로 본다면, 두 왕국을 구분하면서도 둘 ‘사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고자 했던 루터의 노력 속에서 개신교 공공신학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루터의 칭의론이 형성하는 대립과 긴장, 특별히 두 왕국 ‘사이’를 맺고, 잇고, 살리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매개를 강조할 것이다.

1. 이신칭의가 빚어낸 관계론적 윤리의 기초

루터의 두 왕국론이 등장한 것은 1522년에 행한 설교에서부터이고, 1523년 『세상 권력: 어느 정도까지 복종해야 하나』에서 구체적 형태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두 왕국론을 형성하는 이중적 구조는 그 이전부터, 특별히 『크리스찬의 자유』의 서문에서 밝힌 기독교인의 이중적 실존의 긴장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크리스찬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크리스찬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두 문장은 사람의 영적이며 육체적인 본성, 혹은 내적 사람과 외적 사람, 새사람과 옛 사람의 역설적 공존을 표현해준다. 의와 공로가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인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사람을 의롭게 만들며, ‘신앙’만이 하나님 말씀을 유효케 하고 인간을 구원한다. 여기서 루터 사상에 있어 새사람 됨, 혹은 사활의 우선성이 분명하게 제시된다. 그것은 나의 ‘공로’도 심지어 ‘신앙’도 아니라, “타자(他者) 곧 그리스도만의 공로”에 의해서라는 점이다. 개인의 선행과 신념으로 구축된 사(私)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이신 그리스도와 만나고 믿음으로 연합함으로써 죄인은 새사람, 즉 관계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육적인 존재이기도 하기에, 인간의 영적 삶은 미래에 완성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인간은 영에 있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나, 이 신앙과 부요함은 미래의 삶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자라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활 때까지 ‘날마다 자람’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과연 영적 성장만을 의미하는가? 루터는 두가지 제안을 던진다. “이 생에서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을 제어해야 하며,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던져진 두 가지 윤리적 제안이 흥미롭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삶은 몸의 훈련, 즉 수신(修身)과 구체적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두 활동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첫째, 복음의 말씀이 영적으로 새로운 사람됨을 형성했지만, 그 사람은 구원을 위하여 불필요했던 금식과 절제와 노동 등으로 몸을 계속하고 훈련시키고 단련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영과 본성상 갈등 관계에 있던 몸이지만, 이제 성령 안에서 몸은 주체가 타자와 만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매체가 된다.

둘째, 구원 전이나 후나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로서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의로워진 그리스도인이 타자와 맺는 관계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루터는 인간이 각자의 직업과 위치에 있음으로써, 그리고 그 곳에서 사회적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음을 강조한다. 특히, 루터는 『크리스챤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나’와 ‘너’ 모두를 살리는 활사의 기반이 된다는 점도 보여준다. “각자가 자기 직업과 위치에 따라 일해야 하는 것은 의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제어하고, 또한 몸을 제어해야 하는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며, 이렇게 행함으로 궁극적으로는 사랑의 자유 가운데서 자기의 뜻을 다른 사람들의 뜻에 굴복하기 위한 것이다.” (54) 달리 말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은 사적영역에서 개인의 수신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 속에서 타자의 삶의 고유성을 존중하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또한, 타자인 그리스도가 그를 살리고 섬기러 다가왔듯, 그는 이웃에게 모범이 되고 그들의 욕망의 경계가 되어줘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식의 ‘공공하다’의 기본 틀이 형성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이웃 안에서 산다.... 그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살고, 사랑을 통해 이웃 안에서 산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넘어 하나님 안으로 잡혀 올라간다. 사랑으로 그는 자기 아래로 이웃에게로 내려간다.” 자아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공로로 사(私)적 삶을 구성했던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나’와 ‘너’가 살게 되는 활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외적 인간이 선행할 자유를 완전히 발휘하는 것은 종말 이전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선(coram deo) 존재이자 타자 앞에 선(coram hominibus) 존재라는 인간 실존의 이중적 구조가 존재론적으로 형성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구조가 트뢸치가 비판했듯 두 개의 윤리적 가르침, 혹은 윤리적 이원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루터의 두 왕국론이 분명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는 인간 실존의 두 구조와 두 왕국의 역할을 포함하는 하나의 사랑의 윤리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두 왕국 사이의 벌어진 틈에 거슬러 작용하는 매개의 동력을 보지 못하면 루터 신학에서 공공성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2. 두 왕국 사이에서 공공하기

루터의 이신칭의는 인간과 통치권을 두 부류로 나누게 된다. 인류는 “첫째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고, 두 번째로 세상의 왕국에 속한다.” 은혜로 의로워진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면, 신자가 아닌 자들로 구성된 세상의 왕국이 있다. 의로운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두 왕국이 구분되었듯, “하나님은 두 개의 정부, 즉 영적 정부와 세상의 정부를 제정하셨다.” 이 두 정부의 구분된 역할에 대한 루터의 생각 속에서 우리는 그가 오늘날 공공신학 논의에 던져줄 수 있는 독특한 통찰을 찾을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영적 정부와 세상의 정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특별히, 세속의 통치권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하나님께서 살인을 막기 위한 금령을 내릴 때부터 존재한다. 세속 정부의 권위와 통치는 인간의 사악성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는 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역할을 한다. 가인의 생명을 지키기 원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볼 수 있듯 세상의 권력과 법은 이중의 목적, 즉 사악한 자를 처벌하고 올바른 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전자를 위해서 정부는 체포하고 심문하고 파괴하는 자를 필요로 하고, 후자를 위해서는 보호 방면 구해내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세속 정부는 두 가지 위험을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첫째는 통치자들이 세상의 왕국에 한정된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영혼을 위한 법을 규정”하면 하나님의 정부가 침해되고 영혼들이 오도된다. 세속 정치의 논리에 신자의 삶을 맞추려는 유혹이 통치자나 (가톡릭) 교회 지도자 모두에게 발견될 수 있다. 둘째는 세상의 왕국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통치자가 하나님의 뜻인 정의, 성실함,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 영혼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로 악해지고 부패할 위험이 현실적으로 매우 높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파탄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속 권위를 세우셨고 거기에 복종하라고 명하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신자들이기에, 그들은 사실 왕, 통치자, 법과 같은 세속정부의 통치가 원칙적으로는 불필요하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가 왕이시며, 그 분은 법이 아닌 성령을 통해서만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성령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본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결과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치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불의를 견디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하고, “지상에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살고 일하게” (205) 된다. 의롭게 된 인간은 일상의 직무와 소명을 통해 세속의 삶 속에 위치한다.

이 때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책임감 있게 사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가면이라 할 수 있는 타자 앞에서 (coram hominibus) 책임감 있게 사는 것이다. 알트하우스가 통찰력 있게 지적했듯 “사적 활동과 공적 활동 사이의 구별은 영적 정부와 세속적 정부 사이의 구별과 일치하지 않는다. 영적 정부 역시 직임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적 활동을 갖는다.” 하나님의 왕국에 속해 있는 신자가 부름을 받아 타자와 함께하는 세속의 삶을 살아갈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흐르게 하는 통로가 된다. 그의 노동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현실화된다. 루터의 공공신학이 활사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은혜를 이웃사랑으로 구체화하면서 이루어지는 활사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급진적인 윤리적 비전은 세속정부의 권위 혹은 세상왕국 신민의 도덕적 책임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공공적 실존의 한 형태를 만들어 낸다.

 

 

 

3. 신학적 공사공매(公私共媒)를 향해: 자발적 고난과 이성으로 채워진 사랑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은 하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시고자 세우신 질서이다. 그러나 악에 대항해야 할 세상의 왕국이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데 문제의 복잡함이 있다. 루터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듯 “어쩌다 만일 군주가 현명하거나 올바르거나 기독교인이라면 그것은 커다란 기적들 가운데 하나”이기에, 결국 기독교인은 현실 정치에 만연한 공(公)의 부패와 부정의와 폭력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심각하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세속 권위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는 개인의 결단으로 그치지 않고, 그 권력 아래 있는 타자를 살리는 활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에게서 이웃 사랑은 구체적 형태의 공공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루터의 고난과 이성 이해가 어떻게 두 왕국 사이를 매개하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세속 정부의 법과 공권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그 오용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성 자체는 거부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칼을 승인하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셨듯, 그리스도인 역시 세속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그 폭력과 부패에는 편승하지 않아야 한다. 여전히 다수의 이웃이 세상의 왕국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속 권력]을 여전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더욱더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자유롭게 된 자들이기에 세속의 법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그 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근원적으로는 영적 정부에 속해 있기에, “폭력에 저항하지 말고 참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폭력을 승인해서도, 타협하려고 해서도, 복종하려 해서도 안 된 그런 폭군들은 세상의 군주가 행해야 할 바를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님의 원수다.... 그러므로 그들이 복음에 분노하고 복음을 모욕하더라도 놀라지 말라” 하지만 이것이 무조건적 비폭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발적으로 고통을 받고 인내하는 자이지만, “타자를 위해서는 복수, 정의, 보호, 도움 등을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주어야 한다.”

둘째, 이 세계가 복음으로 통치되는 신앙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신앙인들과 이교도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왕국 사이에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며 구조적 형태의 매개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를 앞두고 루터는 두 왕국 ‘사이’를 연결하는 이성의 역할에 주목한다. 세상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라, 세속의 실정법이 지배한다. 루터는 실정법은 어쩔 수 없이 시공간적인 제약을 가지고 있음을, 그렇기에 이상적인 법일 지라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루터는 세속의 권위를 바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실정법의 조문 자체가 아니라 법률의 근원을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올바른 법률적 판단] 모든 책 속에 기록된 법을 넘어선 속박 받지 않는 이성으로부터 솟아났다. 이성은 매우 훌륭한 것이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승인해야하고, 마음속에 기록된 이성의 정의를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에 종속된 성문법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이성이 문자의 포로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법률서적과 법철학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실천적 결론을 내릴 수 없고, “이성을 충만하게 하는 사랑과 자연법”에 의해서 자유로우면서도 이치에 맞는 판단을 할 수가 있다.

 

 

루터가 “이성을 악마의 창녀”라고 비판한 것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성을 통해 루터신학의 공공적인 것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에 의문을 표할 것이다. 분명 루터는 이성이 하나님에 대해 정의하려 하고 신앙의 영역에 침범하는 하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루터는 자연적 이성이 모든 것 중 최고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탁상담화』에서는 신학적으로 중생한 조명된 이성 혹은 계몽된 이성까지 언급한다. 즉, 루터 신학에는 그 자체로 선한 자연적 이성, 신앙을 오도하는 교만한 이성, 하나님 말씀에 조명된 이성 이 세 가지 차원이 공존한다. 이성에 대한 이렇게 미묘하고 다차원적 입장은 자연법과 성서의 율법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본틀을 제공한다. 지상의 왕국의 질서를 잡는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법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바른 이성적 판단력이 타락으로 인해 어두워졌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서로, 특별히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두 계명으로 자연법을 반복하며 드러내시면서 인간의 이성을 바르게 인도하신다. 달리 말하면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계명은 새로운 율법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이성의 사용으로 드러내야 할 법을 확인하고 회상하게 한다.

사랑과 자연법이 루터의 윤리에서 거의 동등한 개념으로 쓰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연법보다 더 깊은 차원을 가진다. 이성을 가진 경건한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을 지킨다. 그러나 루터는 자연법과 그리스도의 법을 구분한다. 자연법과 사랑이 동일한 내용을 가질지라도, 사랑 없이 실천이성만을 통해서도 자연법을 지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자연법을 넘어선다. 이 법을 루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고난! 고난! 십자가! 십자가! 이외에 다른 기독교인의 법은 없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지며 고난당했듯,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에서 고통을 짊어지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숨어계셨던 하나님이 드러나셨다면, 이 세계 속에서 신자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육화하는 매체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공성에 대한 담론이나 공공성 확보를 위한 활동이 인간 이성의 기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루터는 그러한 이성의 합리적이며 소통적인 기능을 크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자연적 실천 이성의 요구를 넘어서는 고통과 인내를 통해서 공공하기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특히 이것은 본질적으로 ‘대리적’이며 ‘자발적’ 고통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아니라 여전히 지상의 왕국에 있는 이웃을 위해 고통을 인내한다. 이성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지상 왕국에서의 삶을 매개하려던 루터의 노력은 결국 십자가 앞에서 인간 이성과 자연법의 한계를 드러내며 그 정점에 오른다. 고통의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권리와 자연적 권리”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권리”에 속한다. 영적 정부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현실 세계를 살면서 현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의” (마5:20)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로 의로워진 신자만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타율적이 아니라) 자유롭게 고통을 통해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IV. 글을 마치며: 기독교인으로서 ‘공공하다’는 것의 의미

본 논문은 루터 신학에 내포된 공공성을 고찰하기 위해 ‘공공하기’라는 관점에서 그의 두 왕국론을 살펴보았다. 만약 루터신학에서 ‘공공장’이나 ‘시민사회’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면, 이것은 시대착오적 해석이 될 위험이 크다. 하지만 ‘너’를 통해 ‘나’가 살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공’과 ‘사’가 대화하며 상생하게 되는 윤리적 발상의 전환을 도모한다면, 두 왕국론은 신학적 ‘공공하기’의 좋은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은 현대의 정치사회적 필요를 투사하여 루터를 해석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주의의 시발점으로 그를 지목하는 기존 가설을 교정해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매킨타이어는 루터에게서 비롯한 종교개혁이 세 가지 중요한 도덕적 개념을 형성해 놓았다고 본다. “① 그 요구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는 전혀 정당화할 수 없는 ‘도덕규칙’이라는 개념, ② 선택에 있어서의 주권자로서 ‘도덕적 행위자’라는 개념, ③ 그 나름의 규범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당화가 가능한 ‘세속적 권력의 영역’이라고 하는 개념.” 결과적으로 매킨타이어는 근대적 세속 개념을 탄생하는 데 있어 루터와 마키아벨리의 역할을 거의 동급으로 놓는다.

매킨타이어식의 해석은 두 왕국을 운영하는 상이한 정부 형태, 그리고 사회적 도덕성과 공공적 이성과 무관하게 의로움을 받은 개인 등의 루터 신학의 일부를 선별적으로 강조할 때 생겨난다. 그러나 ‘공공하다’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다른 독해도 가능하다. ① 기독교인으로서 실존을 세속에서의 삶과 매개하는 이성과 자연법, ②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하는 활사의 관계적 주체, ③ 평화와 질서유지라는 신적 사명을 정당성의 근원과 권력 사용의 경계로 가지는 지상 정부. 이와 같이 루터의 신학은 정치적 자유주의로 인해 빈약해진 공공성을 다시 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윤리적 개념을 형성해 낼 수 있다.

 

 

하지만 루터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윤리적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전히 많은 사람이 지상의 왕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정부가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다수의 사람들 가운데서 소수로 남아 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좋은 가르침이라도 그것이 지상의 왕국으로 확대 적용되어 일반 윤리화가 진행되면, 결국 공공성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과 희생도 공로주의 혹은 율법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기독교인이 할 일은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청사진을 제시하거나, 다수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얻는 것과는 차별화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은 사회 내 소수로 남아서, 일상에서 하나님 왕국과 지상의 왕국을 매개하는 다양한 활동으로 공공함을 실천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를 수 있다.

물론 루터는 농민전쟁, 고리대금업, 사치품 무역, 빈자 구제 등의 당시의 윤리나 정치적 문제에 있어 지나치게 상세할 정도의 신학적 답변을 내어 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학적 원칙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고, 실천적 지혜도 얻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루터의 상황적 제안을 보편적 윤리로 추상화할 수 없고, 하려해서도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구체적 상황 속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공공하는 삶의 영역을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합리적 이성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고통과 희생을 하면서까지 공공하려 애쓰는 것, 이것이 공과 사의 대립 속에서 무엇이 참 바른 그리스도인의 실존인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루터 신학이 던져주는 미완의 답이라 할 수 있다.

공공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데 무엇이 옳은 방법인지 정답은 없다. 또한 공공성을 이해하고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이나 정치철학이 신학보다 더 좋은 안내자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공성에 대한 다소 모호해 보이는 신학적 제안이 오히려 지상의 왕국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적 비전과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활사개공을 위해 협력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하는 도발적 상상력을 가질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다.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공존하고, 공공성이란 단어가 지나치게 남용되는 지금 이 시점, 기독교의 정치프로그램화는 반대하면서도 신앙인의 공공적 삶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루터의 두 왕국론에 우리가 다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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