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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선교와 신학

[원문] WCC영성:정의와 평화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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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복 박사(횃불트리니티신학대 총장)

 

2014년 5월 7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5월 2일(2014년) ‘부산총회 이후 WCC의 영성’을 주제로 개최한 ‘제21회 영성포럼’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제공 단체(자)와의 협약에 의해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WCC영성 : 정의와 평화  / 김상복 박사(횃불트리니티신학대 총장)

2013년 10월말부터 11월8일까지 부산에서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라는 주제 하에 세계 110개국 349교파 및 교단, 5억6000만 회원 대표들과 한국교인들을 포함한 30여 참관국 대표 등 9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주간 동안 각종 축제와 회의가 있었다. WCC 제10회 총회였다. 주제의 성경 본문은 이사야 42장 1∼4절을 선택했다.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산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 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정의와 평화 주제의 배경

WCC 중앙위원이며 기획위원인 시리아정교회 소속 모르 로함 교부는 “이번 주제는 전 세계와 관련된 것”이고 “이 주제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까지 다양하게 읽혀질 것” 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총회의 “생명, 정의, 평화”이란 주제가 전 세계를 위한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WCC 부산총회 에큐메니컬 좌담들의 토론된 주제는 21가지로 거의 모든 주제에서 생명, 정의, 평화 등과 연결하여 각 분야별로 전문가 40∼50명이 토론을 전행했다.이 주제는 이미 2010년 11월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신학협의회의에서 제안한 주제로서 WCC 총회준비위원회에 전달한 것이 선정되어 총회의 주제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WCC)에게는 이번 10차 총회의 주제인 정의와 평화가 처음 나온 주제가 아니고 오래 동안 다루어 온 친숙한 주제이다. ‘정의’(Justice)는 1948년 WCC 창립 이래 에큐메니컬 운동의 주 관심사였지만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은 것은 1966년 ‘교회와 사회’ 세계대회와 1968년 제4차 웁살라 총회에서 정의 추구의 긴급성이 제기되어 왔다.

 

‘평화’(Peace)는 1983년 제6차 밴쿠버 총회에서 등장하기 시작해서 WCC가 그동안 사용해 오던 JPSS(Justice, Participation, Sustainable Society, 정의, 참여, 지속가능한 사회)의 의제를 전 세계 기독교인과 교회가 인류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회복]를 위해 어떤 일을 해나가야 하는가를 모색하는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정의·평화·창조질서 보전)로 전환했다. 참여의 P(participation)를 평화의 P(peace)로 대치한 것이다. 생명이란 의제도 이 무렵 함께 등장했다.

이와 같이 오래 된 세 가지 관심사들을 종합해 이번 10차 총회의 주제로 삼아 기독교만이 아니고 전 세계인에게 관심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정의와 평화는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 하는 포괄적인 주제여서 최소한도 다음 총회 때까지는 목회와 선교와 신학에서 많은 토론과 행동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의와 평화의 콘텍스

WCC 울라프 총무는 총회 직전 주일 아침 거룩한 빛 광성교회 예배 설교자로 나서 “하나님은 종교개혁을 통해 죄에 빠져 교만했던 그의 백성을 겸손하게 하셨고 다시 한 번 살아갈 기회를 주셨다”며 “오는 30일 열리는 WCC 부산총회는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한 번 간구하는 이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말하면서 “현재 전 세계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6세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전쟁과 각종 범죄와 인본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다”며 “WCC 부산총회 참석자들은 이를 통탄하며 겸손한 자세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선포 할 것”이고 이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외면치 않으시고, 교회가 앞으로 짊어질 사명을 알려 주실 것”이라며 “사람을 살리시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것이 그 증거”라고 강조했다.

울라프 총무는 이어서 이번 주제가 한국에 특별히 적용되는 주제임을 상기시키면서 “전 세계 기독교인의 70%가 속해 있는 남반구(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를 대표해 한국에서 WCC 총회가 열리게 된 것은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며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한반도 곳곳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이 치유 되고, 하나님의 평화가 펼쳐지도록 기도하길 바라신다”며 기도를 요청했다. 이번 주제는 특히 생명의 경시, 정의의 부재, 평화 없는 갈등이 극심한 한반도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5개 공동문서와 9가지 선언문

이번 총회에는 토론을 위한 5개의 공식문서가 제시되었는데 (1) ‘공동의 비전을 향한 교회,’ (2)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의 일치,’ (3) ‘함께 생명을 향하여: 변화하는 에큐메니컬 지형에서의 선교와 전도에 관한 에큐메니컬 확언,’ (4) ‘모두의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위한 경제,’ (5) ‘정의로운 평화로의 에큐메니컬 부름’ 등이었다. 총회에서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통해 채택한 선언문 여덟 가지와 총회예배를 위한 기도문을 발표하고 마무리 했다.

선언문들은 (1) WCC 10차 총회 메시지, (2) 일치 성명서, (3) 무국적자들의 인권 성명서, (4) 종교의 정치화와 종교의 소수자들의 권리에 관한 성명서, (5) 정의로운 평화에 관한 성명서, (6)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 (7) 아베이에 관한 성명서, (8) 중동 지역의 기독교인의 존재와 증언에 관한 성명서, (9) 그리고 총회 모임예배를 위한 아래의 기도문을 채택하였다.

위대하신 하나님, 사람들과 땅을 위한 평화와 정의를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 서. 모든 사람이 물과 땅과 자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함께 나누는 본향을 우리에게 허락 하소서. 우리가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공동체에 관용의 씨앗을 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 서. 우리의 영혼이 전쟁과 갈등의 상처로부터 치유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로하소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우리가 죽음과 부패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나님의 정의 가 멈출 수 없는 거센 강물처럼 이 땅을 흐르게 하옵소서. 언젠가 모든 사람이 평화와 행복 속에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살 수 있다는 희 망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 2013년 10월 30일 WCC 10차 총회 모임예배의 기도문>

 

 

정의와 평화의 의미

정의와 평화라는 주제는 ‘정의로운 평화, 또는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를 지구촌에 살고 있는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계 전체에서 구현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보았고 인류의 구원을 ‘부분적 구원’(a partial salvation)이고 이 구원의 개념을 자연계 전체에 적용하고 있다. 인류와 자연계가 정의로운 평화에 이르러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 했다. 거의 모든 문서와 토론에서 정의, 평화, 생명을 언급하고 있는데 세 단어에 대한 합의된 정확한 정의는 없었다. 정의란 표현이 계속 사용되었지만 모두가 그 뜻을 이미 이해하고 있는 듯한 가정 하에 각자마다 사용하는 것 같았다.

장윤재 교수가 정의와 평화의 의미를 밝히려고 시도했는데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요구되는 정의를 “소극적인 정의”라 규정했고 “하나님의 충만한 자비와 사랑과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정의”를 “적극적인 정의”로 구분하고 있다.

 

장 교수는 최근 일어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 등과 함께 성경 복음서에서 예수가 주창한 정의의 개념을 해설했다. 성서를 통틀어 하나님의 정의는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이 누려야 할, 그러나 빼앗긴 생명의 권리를 되찾아 줘 모두가 온전하게 사는 평화를 의미하며, 예수는 그 시대의 대안적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 민중 사이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밥상 공동체’로서의 정의론을 주창했다고 한다.

미가 6장 8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했을 때 이 때 ‘공의’(righteousness)는 ‘정의’(justice)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는 개인적인 자질이이고 ‘정의’는 사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마태 6:33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라,” 마태 5:6 에서도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 5:10, “정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에서도 그저 ‘의’가 아니고 ‘정의’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적극적인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를 예수님의 포도원 주인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른 아침,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저녁 다섯 시에 일 끝나기 직전에 고용된 일꾼들에게 동일한 임금을 준 주인의 비유를 들었다. 인간은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받고 조금 일한 사람은 조금 받아야 한다는 소극적 정의를 주장하나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은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같은 임금을 주는 주인과 같은 적극적인 정의를 실현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 반대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인간의 불의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 사회의 ‘소극적 정의’도 하나님의 정의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 하셨다(레위기 24:17-21). 사회적 정의를 요구 하신다. ‘이는 이로’의 원리는 개인의 보복주의(lex talionis)가 아니고 국가의 사법제도를 말한다. 개인적 복수 차원이 아니고 국가의 사법적 제도를 세우셨다. 소를 죽였을 때 양으로 갚아 주는 것은 정의가 아니고 양 대신 소를 주어야 하면 그것도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상해의 의도가 없는 상황에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하나님은 도피성을 준비하여 보호해 주셨다. 국가는 의도적 살인은 두 세 명의 증인을 세워 사실 확인하고 정의를 세워줄 책임이 있다(민 5:30, 19:15; 마태 18:16). 이런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는 소극적 정의가 왜곡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너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한 자를 저항하지 말라. 누가 너의 오른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그에게 돌려주라”(마5:38). 이런 가르침을 장 교수는 ‘하나님의 정의’라 했는데 이것은 정의 보다는 은혜와 자비, 긍휼과 사랑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영적인 은혜와 성령으로 가능하지 현실 사회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정의는 아니다.

 

군법 재판에서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는 손 목사님은 그 살인자를 용서하고 양자를 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정의는 “그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히브리어 ‘짜디크’는 바르다, 정당하다는 의미가 있다. 아브라함이 자녀들에게 ‘짜디크’를 행할 것이라 했다(창 18:17). 장 교수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반대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불의이다” 라고 말한다.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노아의 홍수로 나타났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정의는 유황불로 나타났다. 가나안의 극심한 타락은 여호수아의 정복으로 타나났다.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70년간 바빌론의 포로생활이었다. 인류의 죄에 대한 정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장 교수는 신약의 디카이오수네 정의는 사람들 사이에 관계에서의 정의로 독일어와 불어 성경에서는 justice로 번역했으나 영어성경에서만 righteousness라 잘못 번역했다고 지적했다. Righteousness는 개인의 자질이기 때문에 대인관계에서는 justice로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justice를 원한 것이지 righteousness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justice와 righteousness를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짜디크란 단어가 때로는 justice로 때로는 righteousness로 번역되었다. Zadik가 모세오경에서 10번은 justice로, righteousness로 16번 번역되었다. 신약의 Dikaiosune는 8번 justice(Mt 12:18, 12:20, 23:23; Lk 11:42, 18:3, Acts 8:33, 28:4, Ro 9:14), 106 번은 righteousness 또는 uprightness로 번역되었다. 짜디크와 디카오수네를 justice로 다 번역될 수는 없다.

형용사 dikais는 하나님을 인간과 열방을 공정하게 심판하는 의로운 심판자로 묘사할 때 쓰였다(딤후 4:8). 예수님을 의의 이상형으로 ‘의로운 자’(Bezeichtnung)라 불렀다. 정의의 필수조건으로 하나님 앞에서 옳아야 한다(딤후1:6). 동일한 단어가 짜디크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의 법에 맞게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을 upright, just, righteous 라 불렀다. 요셉의 경우 just, honest, and good 이란 표현을 썼다.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지 않고 그 분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었다(롬 3:10). 고넬료를 유대교와 기독교적 의미에서 just man이라 불렀다(행 10:3). 최후의 심판에서도 심판에 합격하는 사람을 righteous 하다고 불렀다(마 25:3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righteous 하다고 보았다(창7:1). 품성에 있어서 의롭다는 것이다. 완전한 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Dikaioo 동사형일 때는 누군가에게 정의를 보여주고 수행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시82: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여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창세기 44:16에서는 의롭다고 인정해 준다, 방어해 준다, 의롭다 대우해 준다는 뜻이 있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설명을 하오리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누가복음 10:29에는 자신을 정당화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바울은 가끔 하나님의 심판에 이 단어를 사용한다. 무죄하다, 의롭다고 선언하고 그렇게 취급해 준다, 그래서 의롭게 된다. 로마서 3:24-26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간을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또 그렇게 선언해 주신다. 예수님만이 완전한 의를 이루시고 인간에게는 완전한 정의가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완전한 정의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8:18)라 하신 것이다.

또 정의란 단어는 주님이 재림 하실 때 행하실 정의로운 심판이 하나님의 통치를 묘사한다(행 17:31; 계 19:11). 마가 16장이나 베드로후서 1:1에서는 보복적 심판을 말한다.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히11:33), 하나님 앞에서 통치자들과 왕들의 정의로운 행동을 지칭하기도 한다(마태 3:15). 하나님은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계시록 19장).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 (계11:17-18). “24 장로는 엎드려 경배하며, ‘우리가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 주는 죽을 자를 심판하시고 당신의 종들에게 상을 베푸실 때가 왔나이다. 당신의 하신 일들은 위대하시고 놀라우시니이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당신은 성도들의 왕, 당신의 길들은 의로우시고 참되시나이다“(just and true)(계 15:3).

주님을 섬기는데 많은 억울한 고난도 있었으나 심판의 그날 주님께 충성한 자들에게 정의로운 상급의 날이 있다. 오늘의 고난이 무시되지 않고 하늘에서 인정받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있다. 고난 받으며 순교한 주의 종들의 피를 의로우신 주께서 복수하신다는 것이다.

 

계시록 19:2, “당신의 심판들은 참되고 의로우시나이다. 지구를 그녀의 음행으로 더럽힌 큰 창녀를 심판하시고 그녀의 손으로 흘린 자기 종들의 피를 보복하셨도다.“ 계시록 20:13-15,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던지우니 이것을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충성으로 목숨을 바쳐 섬긴 자들에게는 역시 심판의 날 하나님의 의로운 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참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정의이다.

 

 

정와와 사랑 - 율법의 더 중한 것

예수님은 정의와 사랑을 함께 요구하셨다. “그러나 화있으리라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해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마태 23:23).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버렸다고 책망하시며 이것들을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이라 하셨다. 정의의 중요성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어 기독교는 아무도 정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정의가 필요한 평화의 영역

문자가 있던 역사 3,500년 동안 280년(8%)만 평화가 있었고 나머지 3,220년(92%) 동안에는 매년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지구상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심각하게 의식하나 강열한 죄성을 가진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분쟁과 전쟁을 오늘도 계속 일으키고 있다(약 4:1).

총회 중 11월 5일 오전 전체회의는 ‘정의’(Justice)를 주제로 다루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품지레 마비젤라 목사(이넬라플러스 책임자)는 “정의를 위한 행동은 선택이 아니라 핵심”이라며 “기도만 한다고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행동해야 한다”고 정의를 위한 행동을 주문했다.

WCC는 “하나님의 정의에 기초한 평화”를 전 피조물 세계에 이루기를 원한다. 정의와 평화가 공존하는 상태를 말한다. 산상수훈 중 마태 5:9-10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이 때 샬롬은 (1) 정의에 기초한 평화, (2) 모두가 행복한 평화, 전쟁의 원인인 불의와 억압이 없는 평화를 추구한다.

다른 이들에게는 인종 차별, 소외감, 성(sex)과 같은 (3) 사회적 정의, (4) 경제적 정의, (5) 생태계 정의 등 세 가지 영역에 정의가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6) 자연의 남용과 (7) 약자들의 빈곤, 성 차별, (8) 인권 침해 등은 (9) 지배와 성장, (10) 탐욕에 사로잡힌 현대 문명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보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 정의이다.

 

현대문명이라는 포괄적 범죄자를 추적해 잡기는 했으나 자연을 남용하지 말고 약자들을 도와 빈곤에서 해방시키고 성 차별을 없애고 여성에 대한 권익과 자존감을 높이고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고 인권을 침해 받지 않고 누구나 하나님이 부여한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것을 역시 정의 문제로 보고 있다.

정의가 실현돼야 할 구체적인 현장들이 소개되었는데 생태계 정의면 에서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기에 몰린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 경제 위기에 빠진 그리스, 사회적 문제로 아프리카의 에이즈 문제가 차례로 무대에 등장했다. 투발루의 한 목회자는 “우리는 기후변화를 초래한 어떤 원인도 제공하지 않았지만, (1) 생태위기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며 “동정이 아니라 연대를 원한다”며 생태 위기를 제시했다.

 

이 분에게는 투발루의 생태위기 피해를 막기 위해 기후변화의 원인을 제거해 주는 것이 정의이고 그 것이 성취되는 것이 평화이다. 말라위에서 온 시린 므불라 양도 (2) “에이즈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병일 뿐”이라며 “교회는 모든 오해를 걷어내고 치료에 힘써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분에게 정의는 에이즈 환자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회가 인정하고 치료에 도움을 주는 것이 정의이다. 여기서도 동성애로 인해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이 그들의 동성애 행위로 인해 에이즈의 대가를 얻게 된 것이나 감염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나 주사 바늘 공용으로 인해 감염된 환자들에게 원인에 상관없이 치료를 해주는 것이 정의이다.

WCC는 오랫동안 이와 같은 정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WCC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이끌어내며 남아공의 (3) 인종차별과 싸웠고, (4) 여성에 대한 강간과 (5) 성노예 문제 해결 등을 촉구했다. (6) 한국의 민주화에도 기여했다. 이와 같은 이슈들을 다 정의의 문제로 본다. 이런 정의를 위한 토론에서 북한을 위한 가난을 위한 인도적 도움에 대한 언급은 있고 남한의 민주화 투쟁에는 참여했으나 북한의 참혹한 독재와 인권 문제에 대한 정의에는 거의 언급 되고 있지 않았다.

 

 

WCC는 또 (7) 핵 없는 세상, (8) 인명의 안전을 역시 정의와 평화의 대상으로 보고 토론 했다. 특별히 (9) 한반도의 정의와 평화에 각별한 관심이 컸다. “한반도에서 공통적인 (10) 인간 안보(Human security)와 인권이 분열적이고 경쟁적이며 군사적인 (11) 국가 안보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 며 (12) 핵무기의 위협, (13) 핵에너지의 문제도 제기했다. (14) 핵무기 없는 한반도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핵무기를 거부하고 핵무기의 완전한 해체를 함께 노력할 것을 제시했다.

부산총회에서는 또 (15) 중동지역과 (16) 아시아, (17) 아프리카 등지에서 (18) 폭력과 (19) 가난, (20) 차별, (21) 투기자본, (22) 세계화, (23) 에이즈 확산 등으로 수난 받고 있는 (24) 기독교인과 여성, (25) 어린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소개됐다. 참석자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26)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정의와 평화 분야에서 (27) ‘윤리적 안목’ (28) ‘소외계층과의 연대’ (29) ‘경제정의’ (30) ‘인간 안보’ (31) ‘한반도 평화’ (32) ‘분쟁지역의 평화’ (33) ‘아동인권’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WCC의 선교 대상은 사회, 정치, 경제, 생태, 문화, 군사, 인종적 적대관계 등에 관련된 33가지 주제에서 언급되고 있고 이런 영역에 정의와 평화를 이룩함으로서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 (34) “온 세상을 하나 되게” 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33개 영역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Christian Peacemaker Teams 시카고 본부의 발레리 조이(72)가 WCC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장 잘 요약적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우리는 갈등과 고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마태 10:34-36에서 “나는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요 칼을 주러 왔노라” 했고 누가복음 12:49-53에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은 일으키러 왔다” 고 하셨다. 예수의 오심은 평화를 위함이 아니고 전쟁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참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불을 지른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는 현실적 전쟁과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전쟁과 갈등을 뜻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뽑은 칼을 책망하시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경고 하셨다. 사탄과 악령과 죄와 악과의 전쟁과 갈등이다. 혈과 육과의 전쟁이 아니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의 전쟁을 의미하고 있다(엡 6:12).

중동의 환경적 평화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중동에서 하고 있는 환경적 평화 만들기의 예를 들고 있다. EcoPeace/Friends of the Earth Middle East(FoEME)는 (35) 이스라엘과 정복당한 지역들과 요단에서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평화를 구축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물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어 왔다고 한다. 모든 공동체를 대표한 청소년들과 성인들, 풀뿌리 기관들과 정치적 지도자들과 협력하고 있다.

 

프로젝트와 대화를 통해서 공동체들이 서로 연계해서 (36)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ecosystems를 만들 수 있고 그 지역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백성들을 위한 상황을 개선하고 물을 평등하고 거부할 수 없는 권리로만들 수 있다 ... 팔레스틴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종합적이고 정의로운 (37) 물 협정(water accord)이 될 수 있다... (38) 물의 정의(water justice)와 (39) 환경적 유지보존(environment sustainability)이 이 협정의 중심이다. 팔레스틴과 이스라엘 사이의 물 정의를 이루는 것도 교회의 책임으로 본다.

 

 

한반도의 정의로운 평화

부산에서 열리는 WCC 10차 총회의 총대인 수십년 동안 전쟁에 의한 폭력과 두 나라로 갈라진 후의 적대감으로 인해 남북한의 남성, 여성, 아동들이 겪는 고통의 증인들이 있다.

총회의 좌담 일주일 중 11월 8일(금)에 ‘한반도 평화 통일에 관한 성명서’를 채택하며 (40)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성명서에서는 “분열, 전쟁, 고통은 충만한 생명을 바라는 하나님의 뜻과 모순이 된다” 며 “우리는 세계교회에 남북한 국민들을 재통일시키고 화해시킬 영구적이며 지속가능한 정의로운 평화를 추구할 것을 요청한다”고 선언했다. 아멘이다.

 

또 “북한의 지속적 위기를 고려해 (41) 국제사회는 인도주의적 지원 지속가능한 개발 프로젝트 실행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42) 남북한 교회 차원의 협력 방안과 정치적 국제적 권고사항 12가지를 제시했는데, “평화통일 문제를 논의했던 (1) 1984년 도잔소회의 정신의 구체화, (2)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주일 지정, (3) 남북한 젊은이 교류의 장 제공, (4) 남북한 교회 방문 프로그람, (5) 해방 70주년 기념 남북한 교인 만남” 등이 들어 있었다. 정치적 국제적 권고에는 “(6) 북한에 대한 경제 금융제재 해제, (7) 평화협정 체결, (8) 군사훈련 중단 및 군비 축소, (9) 핵무기 핵발전소 완전 제거, 정의, (10) 인간존엄이 보장되는 지역사회 회복, (11) 이산가족 방문, (12) 비무장지대의 평화구역 전환” 등을 담았다(국민일보 미션라이프, 2013년 11월 8일, 29면). 힌빈도의 평화를 위한 통합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

정의와 평화 분야에서는 (12) ‘윤리적 안목’ (13) ‘소외계층과의 연대’ (14) ‘경제정의’ (15) ‘인간 안보’ (16) ‘한반도 평화’ (17) ‘분쟁지역의 평화’ (18) ‘아동인권’ 등의 주제가 다루어졌다.

분열, 전쟁, 고통은 충만한 생명을 바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모순 된다. 따라서 세계의 교회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힘과 정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남북한 국민들을 재통일시키고 화해시킬, “영구적이고 지속 가능한 정의로운 평화”를 추구하기를 원한다. 남북의 통일을 통해 정의로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세계교회와 정부 권력자들에게 요청(“기도”) 하고 있다. 전 세계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교회와 정부에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모두의 소원이다.

정의와 평화에 관한 문서를 읽으면서 그 영역들을 나열해 보면 교회의 문서인데 NGO의 문서이거나 학자들의 논문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내용들은 (19)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 (20) 집중된 군사력, (21) 안보 위협, (22) 유엔안전보장이사회, (23) 신 냉전 조짐, (24)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 때문에 오는 긴장 발생, (25) 주위의 네 주요 국가들 사이의 지정학적 역동성, (26) 핵무기와 최첨단 대량살상 무기, (27) 국가의 무력증강, (28) 군사비 지출, (29) 정전협정, (30) 평화협정을 향한 새로운 과정, (31) 평화와 화해를 위한 새로운 지원, (32) 국가 지도자와 국제 지도자들 격려 및 지원 등을 보며 어느 정부나 NGO나 통일관심 학자들이 토론하는 주제들이 대부분이다. 목사들이 죄인의 구원과 성도들의 성화와 이웃 섬김을 위한 사역을 두고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늘 길거리와 회의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인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통합적 구원

WCC는 인류의 구원을 “부분적 구원”이라 한다. 복음은 창조세계 전체에 좋은 소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를 우주적 의미로, 하나님의 생명의 거미줄 안에서 상호연결 되어 있는 우주적 의미로 인정하고 모든 생명을 구원해야 하는 중요한 통합적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 이번 총회의 주제이다. 지구라는 위성의 미래에 대한 위협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의 참여를 주장하고 있다? 인류와 창조세계 전체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재림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나머지 피조 세계가 멸망하고 있는데 인류만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개념을 확대하여 생태계에도 적용하고 있다. (33) “환경 정의(Eco-justice)”가 구원에서 분리될 수 없고 환경을 “Eco-congregation"이라 부른다. 지상 모든 생명의 구원의 필요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류 없이는 구원이 올 수 없고 끝없는 착취가 있는데 어떤 구원을 상상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Life Together, p. 11, 23번). 교회가 환경 정의를 실천하며 사회와 세계에 환경 정의 운동을 펼쳐가야 한다. 환경 정의 실천을 선교로 보고 있다.

(34) 타 종교와 문화들과 협력, 국지적 내지 세계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사랑과 평화와 정의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WCC는 타 종교화 문화들에 속한 사람들과 동역하고 있다(9번. p. 6). 이런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종교가 협력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의 절대성을 유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경배하면서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공동선 즉 정의와 평화로운 세계를 함께 추구할 수 있다. 3.1운동 때 기독교의 역할이나 인도주의적 북한식량돕기에 다양한 종교가 협력하는 것은 종교다원주의와는 다른 공동선을 위한 협력이라 할 수 있다.

역사와 창조 안에서, 즉 시간과 상황들의 구체적 현실 안에서 행동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와 화해를 통해 전 지구를 위한 생명의 충만함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17면. 43번). 호주나 미국의 (35)본토 사람들을 위한 자주결의권과 (36) 인종차별과 (37) 카스트 제도의 사회적 타성을 도전하고 있다. 이런 정의는 얼마든지 추구해도 좋다.

(37) 고난의 근본 원인들에 대한 선지자적 비판, (38) 불의를 만들어 내는 구조의 변혁과 기타 문제들에 대한 (39) 과학적 연구를 추구할 것은 제안 한다(TTL, 50번, p. 19). (40) 자유시장성 경제를 우상숭배로 단정하고 정의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에 대한 대안을 요구한다. 선교는 욕심의 경제를 비판하고 사랑과 나눔과 정의의 신적 경제를 실천하려는 것이다. 자유시장성 경제를 쉽게 우상숭배로 단정할 수 있을까? 자유시장성 경제로 인해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주는 많은 혜택도 무시할 수 없다.

 

 

(41) 하나님의 경제가 모두를 위한 사랑과 정의에 근거한 것이고 변혁적 선교는 자유시장성 경제 속에 있는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경제적 세계화는 맘몬, 즉 부당한 재산의 축적과 번영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힘을 주장하는 자유시장적 자본주의의 신으로 생명의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대체시켰다고 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선교는 이러한 우상숭배적 비전들에 대안을 제시하는 역문화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선교는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인관과 자연에게 비참함과 고통을 가져다 주는 이 거짓된 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TTL, 108번). 비참함과 고통만을 자겨다 주는 것이라 단정할 수 있나? 부를 정죄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구약과 신약에서는 특정한 부자를 비판한 적은 있으나 부자나 부를 일율적으로 정죄한 적은 없다.

WWC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전 피조세계를 “저들이 생명을 얻고 그 모든 충만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요한 10:10)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통치의 비전을 긍정하는 성령을 통해서 생명의 축제로 초청하신다고 한다. 이 때 “저들은” 자기 양들에 대한 언급이지 자연계 전체를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보라,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이사야 65:17). 인간은 겸손과 희망 가운데 만물을 재창조하시고 만물을 화해시키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자신들을 바친다. 그리고 기도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서소!”(TTL, p. 46) 새 하늘과 새 땅은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들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을 오늘 지구상에서 우리가 이룬다는 생각은 잘못하면 인간의 위험한 메시아 의식이 될 수도 있다(112번).

WCC 10차 부산 총회 정의와 평화에 대한 관찰

1. 정의로운 평화의 길에 관한 WCC 성명서들의 내용은 인류가 간절히 바라는 보편적 가치요 공동의 선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재림 전에 WCC가 선언한 소원들이 다 성취할 수 있 다면 정의로운 평화가 없어 고통 중에 있는 인류에게 최고의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사탄과 인간의 악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인간이 새 생명으로 구원 받아야 정의로운 평화의 길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2. WCC가 제10차 총회를 통해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던 정의로운 평화의 세계를 인류와 모든 창조세계를 위해 함께 추구함으로서 피조물 전체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며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 함께 같은 목표를 갖고 협력하고 노력할만한 목표들이라 할 수 있다.

3. WCC가 추구하는 인간과 피조세계를 위한 성숙한 정의와 평화는 최상의 이상이나 이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완성 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올수록 인류 역사에서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큰 환란”(Great Tribulation, 마 24:21)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4:3-31).

 

사람의 미혹, 적그리스도 출현, 난리와 난리의 소문, 두려움, 민족과 민족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 기근, 지진, 환란, 순교, 실족, 거짓 선지자, 주검, 어두워지는 해와 달, 별들의 추락, 흔들리는 하늘의 권능들이란 표현들과 요한계시록 6-18장의 재난의 내용들은 WCC가 바라는 이상적 정의와 평화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는 거리가 멀게 보이고 있고 사실상 현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언의 현상들과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 전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도 인류가 함께 정의와 평화를 위한 공동적 목표(common good)를 위해 ‘구원’의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노력하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4. WCC 정의로운 평화를 추구하는 영역들의 긴 명단은 사탄과 인간의 악과 자연현상으로 인해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를 거의 다 포함하고 있다. 교회가 심지어 팔레스틴와 이스라엘 간에 물 문제(water justice)나 핵무기 없는 세상, 한 나라의 무국적인들의 국적취득까지 포함해 세계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기 위해 ‘주력’해야 한다고 WCC문서들과 지도자들 중에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예수님이 명하신 전도의 사명(막 16:15), 제자화 사명(눅 24:47), 선교의 사명(요한 17:18), 세계적 사명(행 1:8), 사랑의 사명(마태 22:37-40; 요한 13:34-35), 목회적 돌봄의 사명(요한 21:15-17) 등을 교회를 중심하여 수행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주사역인지 아니면 전 세계의 사회, 경제, 생태계, 정치, 군사 문제 등 모든 문제를 교회가 해결해 가는 것이 교회의 주 사명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헤롯이나 빌라도나 로마 정부의 구조개혁을 시도하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기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빌라도에게 대답했다. 바울은 자신이 채포되었을 때 로마 시자에게 상소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불의한 폭도들과 권력에 의해 예수님과 바울은 순교를 하셨다.

 

인간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왕국은 더 널리 번져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변했고 예수로 인해 변한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동시에 성취되었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구원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를 누리며 정의와 평화가 자신에게서 시작하여 가정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이루어 간다.

5. 정의와 평화 없이는 풍성한 생명이 가능하지 않지만 때로는 정의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평화가 가능하다.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요 빌립보 감옥 안에서 바울과 실라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류와 세계에 정의와 평화는 필요한 보편적 공동선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각자의 사명과 은사를 따라 정의 사역에 은사와 부름을 받은 분들이 앞장 서서 이 사역을 주도하여 완전한 정의와 평화는 주님의 재림에라야 이루어지나 그날까지 이 땅에 필요한 정의로운 평화를 이루기 위해 모두가 협력하고 함께 섬기는 것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소중한 사역이라 할 수 있다. 

* 연구자료의 각주 및 참고문헌은 원활한 게재를 위해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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