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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한국교회

목사의 불편한 진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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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연중포럼, 제1차 ‘목사란 무엇인가’ 주제로 포럼

 

2015년 3월 20일 기사

 

한국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점을 폭로하고,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을 제시한 영화 ‘쿼바디스’. 이 영화에 답한다는 취지로 한국 교회 개혁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연중포럼이 진행됐다.

‘영화 쿼바디스에 답하다:한국 교회 문제에 대한 분석 및 대안 모색’을 주제로 연중포럼을 기획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개혁실천연대, 뉴스앤조이 등 3개 단체는 지난 3월 20일 금요일 오후 7시30분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첫 번째 포럼을 개최했다.

이번 제1차 포럼은 ‘목사란 무엇인가?:사제주의 비판과 목사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재정립’을 주제로 진행됐으며, △교회분쟁 사례로 본 사제주의 현상(김애희 국장, 개혁연대) △목사의 역할과 중재자의 역할(김근주 교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목사의 불편한 진실(조석민 교수, 에스라성경대학원대) △오늘의 목사직, 어디로 가고 있는가?(김동춘 교수, 국제신대) 등의 발표가 있었다.

 

 

다음은 이날 발제자들이 발표한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교회 분쟁의 중심에는 대부분 ‘담임목사’가 있다
<교회 분쟁 사례로 본 사제주의 현상 / 김애희>

교회 분쟁은 대부분 담임목사의 일반적인 전횡이나 윤리적인 문제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재정관련 문제를 비롯해 독단적 운영, 교회 세습, 성폭력 문제, 목회자 윤리, 불법치리 등으로 인한 분쟁 사례가 많은 상황이다.

사실 한국 교회는 목회자에게 과도하게 권력을 집중시켰고, 교단 헌법에 보장된 당회 중심의 인사권과 재정 행정권 독점 행사를 통해 평신도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고 목회자와 평신도, 안수 받은 자와 안수 받지 않은 자 사이에 견고한 위계질서가 형성됐다.

그 경계를 절대화하거나 교리화할수록 배타적이고 권위적인 독재로 고착된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독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일부 권위적인 지도자들이 축도를 남발하는 것 또한 영적 권한을 자신만이 갖고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발생한 교회 분쟁의 경우 보통 사법적 조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 내에서 자정능력과 해결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 법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최근 분쟁 교회 사이에서 ‘해결사’ 노릇을 자청하는 브로커들이 난립하는 현상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이들은 교회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교인들에게 접근해 ‘교회법 전문가’로 행세하고, 각종 야합과 획책을 통해 교단 정치에 개입하며, 이득을 취하는 등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교회 분쟁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주의와 제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제주의 병폐를 개선하기 위한 실천 가능한 대안은 무엇일까?

교회 안에 전횡을 막고 직분 임기제와 투명한 운영 체제를 마련하기 위한 차원에서 ①민주적인 모범 정관을 도입, 제정하는 것이 급선무다. ②교인들의 주체적 참여와 성숙도 도모해야 한다. 정관을 통해 민주적 제도를 정착시키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곧 민주적이고 평등한 소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분산과 견제, 대의제를 통한 의사결정, 정관을 통한 운영 등의 제도적인 노력은 꾸준히 분토하는 과정에서 더딘 속도로 실현될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실현은 평등성의 가치를 존중하고, 기존 지도 집단 대신 책임과 의무를 즐거이 수행할 수 있는 평신도 주체들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그 가능성이 있다.

③지도력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목회자에게 나눔의 지도력이 필요하다. 목회자 스스로 특권의식을 내려놓아야 평신도들과 수평적인 관계로 만날 수 있다. 민주주의 가치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나누어지는 힘만이 선한 힘이다. 진정한 힘은 한 사람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목사는 결코 ‘제사장’이 아니다
<목사란 무엇인가?: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 / 김근주>

영화 ‘쿼바디스’는 목회자를 가리켜 성직이라 부르며 그에 수반한 온갖 권력과 권세, 권위 부림을 통해 이런 저런 참담한 양상을 교회와 사회에 쏟아내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실 ‘거룩’이라는 개념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신앙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성직주의에 대한 반성은 필연적으로 구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목회자가 ‘거룩’을 독점하게 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고방식의 하나는 ‘목사는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목회자는 제사장이라는 표현 안에 담긴 함의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①하나님이 제사장을 따로 구별하셨듯이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다. 따라서 목회자를 바로잡고 고치시는 분도 하나님뿐이며, 목회자를 대적하는 것은 그에게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②목회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의 전문가이며, 이 일은 오직 제사장인 목사에게 맡겨진 일이다. 그리고 이와 연관해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제사장인 목사에게 맡겨졌다.

③제사장이 거룩하듯이 따로 구별된 목사도 거룩하며 그가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다. 구약시대에 평신도가 드린 거룩한 제물이 거룩한 제사장의 몫이 되듯이 교회의 물질도 목사에게 귀속된다. ④대대로 제사장인 아론 자손처럼 한 교회의 목회자 직분 역시 세습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제사장과 비슷한 기능이 있을 뿐, 신약 교회의 목회자는 구약 성전의 제사장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제사장에 비견되며 거룩을 독점한다.

하나님은 일상의 거룩으로 그 백성을 부르셨으나 우리 교회는 도리어 거룩을 목회자에게 집중시키면서 일상의 거룩이 사라져 버리고, 직분의 거룩만이 남게 된다. 그래서 목사의 삶도 파괴되고 교우들의 삶도 파괴된다.

하나님 백성의 삶을 제사장과 평신도, 혹은 목회자와 평신도로 나누어 버려 무엇인가 거룩한 삶으로의 헌신을 목회자의 것처럼 만들고 목회자가 아닌 교우들은 그보다 덜 헌신된 삶을 살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성경의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를 혼탁하게 만들어 버린 가장 끔찍한 오류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고, 대적하는 사탄의 최고 술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누구인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직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이 오늘 개신교 교회의 핵심적인 신앙 원칙이다. 목회자는 ‘중재자’에 가깝다. 중재자라는 직분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공동체를 섬기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약하고 가난한 이를 돕고 지탱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어떤 권한이든 직무이든, 유일한 이유는 공동체를 섬김에 있다. 그 어떤 직무도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직무는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정의와 공의의 삶으로 부르신 것은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부르심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삶으로 부름받았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소명 경험이며 깨달음일 것이다.

그 가운데 목회자는 그러한 거룩한 삶의 일상 가운데 공동체를 위해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때로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돌보고, 섬기는 일을 위해 스스로 자원하였다.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일상의 거룩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는 일상을 거룩으로 살아가는 교우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자이다.

 

 

# 목사의 자격,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목사의 불편한 진실 / 조석민>

목사는 지역 교회에서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앙육하는데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목사의 참된 정체성은 무엇이며, 목사의 자격 조건, 사역은 무엇인가?

‘목사’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감독(에피스코포스), 장로(프레스뷰테로스), 목사(포이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됐다. 신약성서는 이 호칭을 자세히 구분해 사용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오늘날의 목사는 감독, 장로, 목사로 불렸고, 각각의 호칭에 따른 직분 상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다. 신약성서의 이러한 가르침을 알고 있다면 오늘날 목사가 자신을 제사장이라고 가르치거나 레위 족속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성서를 모르는 무지를 넘어 일반 신자들을 속이는 일이 된다.

더욱이 오늘날 목사의 직분을 사도라고 가르치며, 목사를 사도와 동일시하는 것도 매우 잘못된 일이다. 오늘날의 목사는 제사장도, 레위 족속도, 사도도 아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목사의 자질은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다. ①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딤전 3:2, 딛 1:6). 한 여자의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하고 신중하고, 단정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라야 한다. 술을 즐기는 자가 아니어야 한다(딤전 3:3, 딛 1:7). 구타하지 않고 온화하며, 다투지 않아야 한다(딤전 3:3, 딛 1:7, 3:2).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딤전 3:3).

 

 

②가르치기를 잘하는 자라야 한다(딤전 3:2).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목사의 교육 능력은 먼저 자신이 그 말씀을 깨달아 알아서 실천하며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③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딤전 3:4~5).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정에 비우하고 있다. 하지만 목사가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서 ‘지도력’이란 정치적 권력이나 교회 안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자질로 자기 집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수 없으면 교회를 다스릴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④최근에 회심한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딤전 3:6). 오늘날처럼 부하고 유명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려는 문제가 초대 교회에서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입교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훌륭해도 목사로 세울 수 없다는 교훈이다.

⑤목사는 비기독교인들에게서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한다(딤전 3:7). 당시 복음의 대적자들은 사회적으로 악평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르치고 있거나 폭음과 과음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목사는 교회의 지도자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목사의 사역은 무엇일까?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서 목사의 자질과 함께 가르치는 능력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성경이다. 목사는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5장 2~3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양 떼와 같은 성도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라고 가르친다. 목사의 돌보는 사역은 상담자, 위로자, 양육자의 모습으로 비유도힐 수 있다.

하지만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가르치고, 이 일을 위해 교회의 성도를 보살피며 인도하는 사역이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목사는 특별한 계층도 아니고 선지자도, 사도, 레위 족속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기는 자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목사의 자질과 집사의 자질을 동일하게 제시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는 목사가 특별한 사회적 권력과 신분을 지닌 사회적 계층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가르친다.

 

 

# 약탈적 인간이 된 목사, 먹사로 불리우는 목사
<오늘의 목사직,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 김동춘>

청년 세대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수많은 설교집을 출간하면서 신학생들에게 목회의 야망을 심어주었던 목회자는 온갖 추잡한 성추문을 저지르고서도 공적인 회개 표명도 생략한 채 보란 듯이 교회를 개척했다.

가관인 것은 그 성중독성이 의심되는 목사를 영적인 목사로 알고, 수 백명의 젊은이들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 소위 '뜬다'하는 목사는 어느새 괴물로 변신했고, 그 괴물 목사는 또 다른 기괴한 괴물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마천루처럼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대형 교회 목회자는 상습적으로 설교 표절, 학위논문 표절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마 어마한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 기어코 대형 교회의 욕망을 가시적으로 충족했다.

그 외에도 무수한 의혹들이 불거져 나오지만 여전히 그는 강단에서 그 특유의 제스처로 찬양하면서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설교하면서 목회직을 유지하고 있다.  이 교회 역시 목회자의 숱한 부정직함과 비리의 의혹이 한국 교계를 진동함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만들어 낸 괴물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마다 교회로 몰려오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목사들의 스캔들과 비리, 사기 행각 등 도덕적 부패와 전횡과 비리와 부정은 자체 정화가 불가능해 끊임없이 외부의 고발과 폭로가 제기되고 있다.

 

누가 이 괴물 목사들을 만들어냈는가? 오늘날의 목사직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①개척자 시대의 가부장적 목사직

과거 한국 교회는 한 때 개척시대가 있었다. 이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 70년대 까지를 말한다.

그 시대의 목사직은 자신들의 전 생애를 주의 종으로 온전히 바치기로 결단했고, 그래서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의식했던 사람들이었다. 개척시대의 목사직은 세상 직업과 전적으로 성별된 직분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한 가정에서 목사가 배출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고, 목사는 그 가정에서 특별한 우대를 받았다. 이 시대의 신앙관은 대부분 율법주의적이었으며, 이원론이 지배했고, 유교적 가부장제가 신앙의식과 삶의 방식 전반에 작동하던 시대였다.

영육 이원론과 성속 이원론의 영향으로 목사직은 하늘에 속한 무흠한 성직이었고, 세속 직업은 죄스러운 활동으로 간주됐다. 이 시대의 목사직은 가부장적 영성이었다. 교회에서 목사직은 바로 영적인 어른이요, 영적 아버지로 이해됐다.

목사와 교인의 관계는 상호주체적 관계가 아니었다. 성도는 목사를 자신을 영적으로 낳아주고 길러주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목사의 불륜이나 비리가 발견되는 등 목사가 타락해도 끈끈한 가부장적 가족주의 형태의 교회구조가 교회쇄신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목사는 ‘주의 종’이었다. 그런데 그 종은 교인을 섬기는 종이 아니라 오히려 교인들로부터 군림받고 대접받는 변종 개념으로 사용됐다. 심지어 목사를 ‘종’이라는 호칭도 부족해 ‘주의 종님’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극존칭어를 사용했다.

강단은 주의 종인 목사가 점유하는 공간이었다. 목사는 영권, 물권을 보유하며,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고 말했다. 가부장 시대의 목사직은 설교직으로서 목사만이 아니라 개인과 가정, 회사에 건강과 재물, 그리고 화와 복을 가져다주는 축복권과 저주권을 발휘할 수 있는 직임으로 각인됐다.

그런데 이 시기의 목사들은 대체로 목사직에 대한 엄격주의와 율법주의가 작용해 상대적으로 도덕적 추문에 덜 오염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②개발성장과 소비자 종교시대의 성장주의 목사직

70년대 강남개발시대가 도래하면서 80년대 들어 교회의 중심권은 강남과 신도시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그와 함께 목사직에 대한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강남개발 이전 가부장적 목사직의 시대에는 교회의 연륜이 오래된 전통적인 교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강남개발 이후, 그리고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 사대문 안의 전통적인 교회 위상은 약해지고, 개발성장시대를 맞이한 강남식 개발 성장주의 교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도 전통사회에서 개발성장시대로 이전돼 갔다. 이러한 사회변동의 추이에 발맞추어 한국 교회 목사들에게 미국식 교회성장신학이 도입됐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성장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의 표지다’라는 맥가브란과 피터 와그너의 교회성장 이론이 목사들에게 이식되기 시작했다.

개발성장시대는 목사들이 동경해왔던 목가적인 교회, 즉 교회당이 자리 잡은 옆에 사택이 있는 그런 교회상은 사라졌다. 교회당 건물이 주었던 종교적 미학은 사라졌다. 도시의 이곳저곳의 상가건물 한 켠에 교회당이 비집고 들어서면서 교회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단순히 상업적 공간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교회 개업’이라는 상업적 이미지로 귀결됐다. 전도활동 역시 영혼구원을 위한 순수한 복음전도 활동이나 사회봉사 활동으로 바라보지 않고, 불신자와 교인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들여 확보하려는 교회의 종교적 영업활동의 하나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개발성장시대의 교회는 종교적 표상으로서 교회가 상업적 표상으로 변질된 시기였다. 교회하면 경건미와 거룩성, 그리고 진리에 대한 구도자적 이미지가 아니라 교회의 자기 확장과 배불리기에 급급해하는 매우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종교집단,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배타적인 이미지로 전락했다.

목사직의 표상은 주로 권위주의의 표상처럼 인식됐지만 이제는 목사직은 소비자종교시대를 맞이하게 됐고, 교인은 교회라는 백화점을 찾는 고객이 됐다. 그래서 다양한 상품을 잘 진열한 교회, 교육 시스템, 교회의 다양한 편의 시설이 갖춰진 교회를 만들어 내기에 골몰한 시대였다. 목사직은 CEO 목사, 메가처치 목사가 등장했다.

③초월성을 추구하는 목사에서 물화된 욕망의 화신이 된 목사

개발성장시대의 교회와 목사들은 종교적 초월성을 추구하던 흐름에서 자신도 모르게 세속주의적인 물욕의 화신으로 변모해 버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 안에 세속화 현상이 도래하고, 종교의 물화화가 기독교인 종교의식 전반을 지배하게 되자, 어느덧 목사직이 추구해야 할 초월성이 사라지게 됐다.

목사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도 내면적 경건성 대신 외형적 물욕이 자리 잡게 됐으며, 기도와 말씀만으로 목회직이 가능하던 시대에서 학벌과 출신배경, 외모,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암담한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오늘날 목사들은 왜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게 됐는가? 그것은 개인의 윤리적 자의식과 도덕적 자질의 측면도 있겠지만 한국 교회 전반에 찾아온 전환기적 흐름 앞에 교회와 목사들이 준비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초월성을 추구하는 종교관념이 개발성장시대를 맞이해 어느 사이엔가 목사들의 관념 속에 외형적이며, 물질적인 성공과 풍요, 번영과 형통의 자의식이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목사들은 자본의 종교를 신봉한다. 많은 목사들은 하나님을 믿으라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힘을 더 믿고 있다. 돈은 그들의 신앙의 대상이자 믿음의 최후 보루가 되어버렸다. 오늘의 기독교가 자본을 숭배하는 맘몬의 종교가 된 것은 그만큼 이 시대가 맘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④종교과잉시대의 목사직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엄밀히 말해 ‘종교없음’이 아니라 ‘종교과잉’이라고 말해야 한다. 쉼의 주일은 온통 예배와 예배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다. 주중 수요예배와 금요기도회와 단계별로 세분화된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과정이 준비돼 있다.

인터넷 설교와 24시간 나오는 방송설교 등 설교의 홍수시대다. 하지만 들을만한 설교가 없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과잉시대를 살고 있다. 교회당들이 넘쳐난다. 목사도 과잉시대다. 목사들에게 교회사역이란 취업을 말한다. 담임목사를 뽑는 청빙지원서는 엄청난 경쟁이 연출된다. 여기에 소명, 교역의식은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하지만 종교과잉의 이면에 ‘종교없음’이 일어난다. 탈 종교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기존의 신앙구도의 힘은 점점 잃어간다. 교회의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하면서 탈교회화 현상은 가속도로 증가한다. 종교과잉은 여전하면서도 그 틈새에 종교부재의 시대가 돌아오게 됐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교회 목사직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설교와 행위의 일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말씀 선포의 설교자에서 수행하는 설교자로 변모해야 한다. 부르심의 이중성도 고민해야 한다. 목사로 부름 받았다 할지라도 한 가정의 아버지로도 부름 받았다.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공동체 안에서 부르심의 목적에 맞도록 살아가야 한다.

 

 

선택받은 목사직을 넘어 시민교양인으로서의 목사직이 요구된다. 윤리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공공성도 요구된다. 교회의 재정사용과 교회에 대한 운영에 있어서 평신도 그룹의 협조와 동의를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 일반에서 요구되는 공적인 책임과 의무사항으로부터 면책특권을 당연시하지 않아야 한다. 납세 문제가 대표적이며, 사회 일반에서 통용되는 규칙과 법적 의무규정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목사직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런 것보다는 목사직은 더 근본적인 내적 성찰이 필요하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에 대한 철저한 자기 확인과 그에 대한 준비, 제도적인 확립이 필요하다. 오늘의 목사직의 새로운 쇄신을 위해 목사 개인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교단, 더 나아가 대안적인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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