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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그때 그 기사-3] 설교 표절은 목회자들의 '보편적 현상'

by 데오스앤로고스 202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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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연구(31) * 


 

 

 

[특집: 그때 그 기사] '코로나 19' 팬데믹은 현재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된 문제이며, 최고의 관심사다. 목회 현장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보니 한국 신학계의 주된 논의 주제도 '코로나 19'다. 코로나 19로 한국 교회 목회현장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그에 따른 목회적 방향성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 등 코로나 19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현 시대 목회적 상황에 매우 적절하면서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슈지만 한국 교회 목회 현장을 위해 보다 다양한 신학적 논의의 필요성에 대한 아쉬움도 든다. 이에 본지는 '그때 그 기사'라는 특집 코너를 통해 코로나 19 전에 신학계의 주된 논의가 무엇이었는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어떤 내용에 관심을 가졌는지 본지의 기사 중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내용을 다시 게재함으로써 '그 때 그 묵상'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편집자 주>

 

2014년 9월 3일 기사

 

한목협, ‘설교 표절, 왜 심각한 문제인가’ 주제로 열린대화마당 개최

 

"처음부터 베끼기로 작정했다면 명백한 도용"
“설교 표절, 사단의 핵심 전략 중 하나”
“설교 표절, 하나님 자기 계시 가로막는 참람한 행위”

“설교 표절은 단순히 저작권에 대한 침해나 윤리적인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행위다. 또한 설교자 자신을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든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명 성취는 불가능해진다.”

“남의 예화에 나오는 이름과 일시를 살짝 바꾸어 사용하거나 남의 체험을 마치 자신의 체험인양 둔갑시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저질스러운 변조 행위다.”

“계속되는 설교 표절 행위는 결국 설교자의 영을 죽게 만든다. 위로부터 공급받는 말씀이 없이 남의 대문만을 기웃거리는 영적 걸인 같은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건강하고 충만할 수 있겠는가?”

 

 

Q. 한국 교회 설교 표절, 과연 심각한가?
 
☞ 정주채 목사: “설교 표절, 한국교회 보편적 현상”

생명언어설교연구원에서 설문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90%의 목사들이 표절 설교를 할 정도로 목회자들의 설교 표절은 한국 교회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 사면을 당한 목사들도 있고, 교회가 분란에 휩싸이거나, 심지어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경우 설교를 중단하고 몇 개월 동안 근신한 일도 있다.
 
특히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목회자들이 남의 설교를 표절하거나 도용하는 일들이 쉬워졌다. 양심의 가책도 주저함도 별로 없다. 이런 현상을 이용해서 설교 자료를 제공한다는 미명하에 여로 교회들의 예배 현장에서 행해진 설교들을 녹취해 판매하는 이들도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제공하는 사이트 중 내가 아는 곳만 해도 10군데가 넘는다.
 
☞ 한진환 목사: “설교를 팔고 사는 개탄스러운 상황”

안타깝게도 작금의 한국 교회는 설교 표절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재정문제와 목사의 윤리성 문제, 아울러 설교 표절까지 문제가 돼 내홍을 겪고 있는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2007년 기윤실이 교역자 3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교준비, 설교문 작성 실태 및 의식조사’에서 타인의 설교를 그대로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43%로 조사됐다.
 
기윤실은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 교회 홈페이지 활성화 같은 현대 문화의 특성상 상황은 갈수록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떤 목사는 아예 카페를 만들어 수천 편의 설교를 올려놓고, 누구든지 가입비를 내고 회원이 되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요즘같이 지적 재산권 문제가 첨예하게 되어 있는 시대에 그런 무분별한 설교 장사가 가능한지 개탄스러울 뿐이다.
 


Q. 무엇이 설교 표절인가?
 
☞ 정주채 목사: “설교자의 주체성 없으면 표절”

그 기준과 한계를 정해 분명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어디까지가 인용이고, 어디까지가 표절인지, 어디까지가 참고인지 설교 표절은 논문 표절과 달라서 그 내용과 정도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의 인격적인 주체성이 설교 표절을 검증하는 ‘시금석’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설교자의 인격과 삶을 통과해 선포될 때 설교가 된다. 설교를 설교자의 인격과 삶을 통해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한다면 표절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인격을 통해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과 노력을 통해 나온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설교하는 거짓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설교 준비를 하는 사람의 주체적인 활동여부가 표절을 분별하는 시금석이란 말이다. 만약 설교를 준비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본문을 묵상하고-주석이나 관련 서적들을 참고하고, 때론 다른 사람의 설교를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본문의 중심 주제를 파악하고 아웃라인을 잡는 등의 과정을 밟으며 주체적으로 설교를 준비했다면 창작이지 표절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의 생략하고 참고서나 설교집 등을 참고하고, 인용해서 쉽게 준비를 했다면 그것은 표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표절을 판단하는 기준은 설교자가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이 주체적으로 준비해서 설교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 한진환 목사: “의도성ㆍ반복성ㆍ의도 등의 여부”

일반적인 글쓰기와 설교는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글쓰기에서의 ‘표절’과 설교에서의 ‘표절’ 문제는 다른 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의도성’ 여부이다. 설교자가 처음부터 베끼기를 하겠다고 작심하고 시작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자료로부터 받은 영향을 무의식중에 표출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도성 여부가 중요하다.
 
우리 주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건서적들, 주석들, 강해서적들이 나돈다. 그 자료들을 접하다 보면 거기에 나오는 아이디어, 영감, 힘 있는 문구들이 끊임없이 목사 자신의 사고 속에 축적된다. 그런 자료들을 설교를 통해 흘러나온다면 표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자료들은 이미 깊은 묵상을 통해 목사 자신의 피와 살로 체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베끼기로 작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대지를 가져오든, 내용을 통째로 가져오든 출처를 밝히지도 않고,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도용이다. 일반 글쓰기와는 달리 설교에 있어서는 출처를 밝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의 대리인으로 강단에 선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이 다른 사람의 말만을 들고 선다면 설교자로서의 책무를 져버린 처사이기 때문이다.
 
둘째, ‘반복성’ 여부이다. 설교 표절의 척도는 그런 행위가 단회적인가 반복적인가에 있다. 불가피한 행위였는가 아니면 습관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매주 서너 차례씩 설교해야 하는 과중한 부담 속에서 때로는 초읽기에 몰려 불가피하게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출처를 밝히기만 한다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본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설교 가운데서 강한 성령의 감화를 받으며 현재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습적으로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경우다. 작금에 설교 표절로 인해 내홍을 앓는 교회들도 대부분 목사의 장기간에 걸친 설교 도용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100% 출처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목회윤리적으로나 말씀의 종으로 세움 받은 사명의 차원에서나 비난받아 마땅하다. 표절 행위는 아편보다 더한 중독성이 있다. 설교자 자신을 위해서나 회중을 위해서나 그런 행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셋째 ‘위선’ 여부이다. 설교 표절 중에 가장 교묘한 것은 남의 설교를 기술적으로 자신의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남의 설교를 이곳저곳에서 끌어와서 편집하거나 짜깁기해서 자신의 것처럼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설교자는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는 경향까지 있다.
 
짜깁기를 하더라도 자신의 관점이나 방향이 있어야 하고, 또 자신이 일정 부분 노력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창작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이나 자신의 고유한 창의적인 내용 없이 남의 것을 편집한 것에 불과한 설교는 기술적인 표절일 수밖에 없다.
 
특히 남의 예화를 편집해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남의 예화에 나오는 이름과 일시를 살짝 바꾸어 사용하거나 남의 체험을 마치 자신의 체험인양 둔갑시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저질스러운 변조 행위다. 그런 비양심적인 행위를 동원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위선이다.

 

 

☞ 안진섭 목사: “묵상 없이 베끼는 설교”

첫째, 다른 사람의 설교를 통째로 베껴서 설교하는 경우는 무조건 설교 표절에 해당된다. 언뜻 생각하면 그런 설교자가 있을까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필자도 역시 다른 사람의 설교 전체를 통째로 표절하는 설교자를 목격한 적이 있다. 다른 설교자들에게 간접적으로 그런 사례를 전해들은 경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둘째, 다른 사람의 설교 아웃라인을 그대로 베낀 경우도 역시 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자신의 이야기를 포함했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의 설교 아우트라인을 그대로 가져왔다면 이는 설교 표절에 해당된다. 셋째, 아웃라인은 자신이 직접 구성했어도 속 내용은 몇 편의 설교를 짜깁기한 설교도 역시 표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넷째, 어느 설교자의 깊은 묵상에서 나온 문장을 마치 자신이 묵상한 결과인 것처럼 출처 없이 말하는 것도 역시 표절에 해당된다. 다만 이 경우는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성경 본문을 보면 누구나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의 문장이라면 표절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문장을 인용했다면 출처를 밝히는 것이 설교자의 마땅한 도리다.

 

 

Q. 왜 설교를 표절할까?
 
☞ 정주채 목사: “설교 횟수가 너무 많다”

첫째, 설교 횟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 목사들이 일주일에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 설교만 해도 10회 이상이다. 작은 교회의 경우 담임목사 한 사람이 이 설교를 다 맡아야 한다. 그러니 열심히 준비한다 해도 역부족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둘째, 게으름이다. 설교자가 말씀묵상과 기도생활에 게으른 것이다. 셋째, 정직하지 못한 성품 때문이다. 넷째, 설교자로서의 기본자격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일정한 신학과정을 이수한 사람을 심사해 설교를 할 수 있는 면허를 준다. 그런데 이런 자격증이 난발하고 있다. 설교 표절 문제는 좀 더 원천적으로 말한다면 신학교육의 문제요, 신학교 난립의 문제다.

 

 

☞ 안진섭 목사: “설교자로서의 준비 부족”

첫째, 저작권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타인의 설교를 표절하는 경우가 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 부족의 문제는 사실상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공직 임명을 앞두고 정치인이나 교수들의 논문표절이 드러나서 물의를 빚는 것만 보아도 우리나라는 아직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회자들도 역시 이런 잘못된 문화 속에서 함께 성장하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설교표절에 대해 신학교에서조차도 심각하게 다룬 적이 없다. 이런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설교자들은 설교표절을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자신의 설교를 작성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표절하는 경우가 있다. 설교를 작성할 준비가 안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설교자의 은사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각 교단 신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교육과정을 조사해보면 대부분의 신학대학원의 설교학 관련 과목은 한 두 과목에 불과한 실정이다. 결국 미래의 설교자가 될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설교학을 개론수준으로만 배우고 졸업하는 셈이다.
 
교회에서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 곧 바로 부서의 설교를 맡긴다. 결국 거의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설교자들이 현장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많은 경우 각 교회의 담임목사들은 부교역자들이 사무실에 앉아 설교준비를 하도록 도와주지 않고 주로 몸으로 뛰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담임목사가 되면 한 주일에 적게는 3-4회, 많게는 10여회의 설교를 해야 한다. 준비도 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다작을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 내몰리면 설교자들은 설교표절의 유혹을 받게 된다.

 

 

셋째, 설교에 대한 신학의 부재로 인하여 설교 표절을 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한국 교회의 목회환경은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교인들은 좋은 설교자를 찾아 쇼핑하듯 교회를 찾는다. 대도시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대형 교회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끌어들인다. 경쟁력이 없으면 한 순간에 도태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런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목회자들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전달하는 설교를 교회성장의 도구로 생각한다.
 
넷째, 영성이 깊은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설교자들의 욕망 때문에 표절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로는 거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성실한 성경연구를 통해 말씀의 깊은 세계를 경험한 듯 보이기 위해 영성 깊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표절하는 것이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탁월한 설교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필자는 모든 설교자들이 그런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이면에 있는 동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점검이 필요하다. 만약 자신을 영성 깊은 사람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욕망에서 나온 마음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Q. 설교 표절, 무엇이 잘못이고, 왜 위험한가?
 
☞ 정주채 목사: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 행위”

설교 표절이 심각한 이유는 단순히 저작권에 대한 침해나 윤리적인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큰 불경이며 불충이다. 무엇보다 설교자 개인의 범죄를 넘어 표절 설교가 가져오게 될 결과를 생각한다면 표절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좀 더 심각하게 느낄 수 있다.
 
첫째, 설교 표절은 설교자 자신을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 설교는 기록된 말씀이 설교자의 인격과 삶을 거쳐 선포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설교자 자신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연구하고, 그 말씀을 삶에서 실천해 경험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은혜 받고, 그 받은 은혜를 성도들에게 흘려보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없이 설교하며 사역을 한다면 그 목사의 영혼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의 믿음은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황폐하게 되고 말 것이다.
 
둘째, 설교 표절은 교회를 황폐하게 만든다. 베껴서 하는 설교가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겠는가?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과하지 아니한 말씀에 무슨 확신이 있겠는가?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전하는 말씀, 자신이 은혜를 경험치 못하고 전하는 말씀이 어찌 성도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결국 성도들이 지키고, 허약해지고, 교회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셋째, 말씀사역이 제대로 안되면 대사명의 성취는 불가능해진다. 대사명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보냄 받은 자들의 말씀 증언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설교자들의 불경과 불충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부터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구원의 복음이 어찌 세상에 능력 있게 전파되겠으며,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설교 표절은 하나님을 속이고 교인들을 속이는 일이다. 따라서 자신도, 그런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다 영혼이 쇠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런 사역자들은 외식하는 자로 정죄되어 심판받게 될 것이다.

 

 

☞ 한진환 목사: “하나님의 계시를 가로막는 행위”

표절한 설교는 하나님의 현재적 메시지를 가로막는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현재도 목사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설교자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은 없이 베끼기만 한 원고를 들고 선다면 그보다 더한 잘못이 어디 있겠는가? 설교 표절은 윤리적 문제이기에 앞서 하나님 자기 계시를 가로막는 참람한 행위다.
 
설교 표절은 설교자의 영혼을 고사시키는 행위다. 혹자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만 있다면 표절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어떠해도 좋다는 상황윤리적인 궤변이다. 계속되는 설교 표절 행위는 결국 설교자의 영을 죽게 만든다. 위로부터 공급받는 말씀이 없이 남의 대문만을 기웃거리는 영적 걸인 같은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건강하고 충만할 수 있겠는가?
 
또한 설교 표절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베낀 설교라도 은혜롭기만 하면 교인들은 영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교회마다 회중의 특징과 그들이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은혜로웠던 설교라고 해서 내 교회에서도 반드시 은혜로울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 담겨있는 영원한 진리를 ‘지금 여기에’ 있는 청중에게 적실하게 들려지도록 전파하는 것이 설교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을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청중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표절 설교는 청중을 완전 무시한 적실성 제로의 설교이므로 그런 설교에서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 안진섭 목사: “위선적인 사람으로 변질”

설교 표절은 설교자 본인에게나 그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먼저 설교자에게 미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설교가 전혀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를 배우기 위해 참고로 살펴보는 경우는 설교 발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설교를 거의 그대로 베껴대는 설교를 계속하는 경우는 설교자로서의 발전을 절대로 기대할 수 없다.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친밀히 아는 것은 설교자에게 주신 은혜이자 특권이다. 그러나 남의 설교를 표절하느라 그런 내면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날이 갈수록 위선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위선은 결국 그 영혼에 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교 표절은 또한 성도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담임목사의 설교표절 문제가 불거진 교회들은 한결 같이 내홍을 겪는다. 자신이 듣고 은혜를 받던 담임목사의 설교가 사실은 다른 목회자의 설교를 표절한 것임을 알게 될 때, 성도들이 받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설교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행위이고 설교표절은 부정직한 행위다.
 
설교는 결국 성도들이 먹을 양식이다. 사랑이 듬뿍 담긴 양식과 사랑이 없는 양식이 어찌 그 몸에 같은 영양을 공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성도들 모르게 하면 그만이라는 부정직한 생각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
 

 


Q. 설교 표절을 극복하려면?
 
☞ 한진환 목사: “신학교에서의 철저한 교육”


설교 표절 문제는 목사 개인의 양식이 의존하는 개인 윤리의 성격이 강하므로 외부적인 제도나 환경의 변화로 개선될 수 있는 여지는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첫째, 설교 작성에 관한 전반적인 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 신학교 시절부터 설교 작성의 윤리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신학교 시절에 짜깁기 같은 비양심적인 행위에 익숙하게 된 학생들이 평생을 그와 유사한 유혹에 노출돼 살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학생들이 학문적 정직성을 준수할 수 있도록 ‘명예규약(honor code)’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도 2010년부터 리포트를 제출할 때 표지의 ‘배움의 윤리 서약’에 서명하는 절차를 거치게 하고 있다(‘배움의 윤리 서약’에 담긴 내용들: △이 과제는 내가(우리가) 직접 연구하여 작성한 것이다 △정확한 출처 제시 없이 다른 사람의 글이나 생각을 가져오지 않았다 △인용한 문헌의 내용이나 자료(도표나 데이터)를 조작(위조 혹은 변조)하지 않았다 △과제물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거나 구매하여 제출하지 않았다 △과제물 작성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공동제출자로 명기하지 않았다 등). 신학교에서도 위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기본적인 글쓰기의 윤리에 대해 세밀하게 교육할 필요가 있다.

 

 

둘째, 목사의 과중한 설교사역에 대해 제고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목회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회자들은 일주일 동안 평균 7.5회 설교하며, 주일 낮 설교시간은 평균 45.9분, 그리고 설교준비 시간은 평균 4시간 4분으로 나타났다. 4시간 준비해서 설교해야 한다면 바울 사도라도 좋은 설교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교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의 절대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목사들이 표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과중한 설교사역을 개선하기 위해 목사 자신과 교회 당국의 공동적인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목사는 대외적인 활동이나 목회 외적인 일에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 절제해야 한다. 동시에 목사가 교회 행정에 대한 전반적인 관여나 심방, 각종 모임 주도 같은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도록 교회 측에서도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어야한다. 목사는 오로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성경적 원리이다.
 
셋째, 목회 성공주의 신드롬을 극복해야 한다. 목사들은 초읽기에 몰린 다급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타인의 설교를 베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유명 목사의 탁월한 설교를 도용함으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작용하기도 한다. 좋은 설교를 통해 명예도 얻고 교회 성장도 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열매가 곧 파멸의 열매였듯이 그러한 욕망은 망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세속적인 성공주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무분별하게 거짓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곧 자신을 망치고 교회를 파괴시키는 지름길이다.
 
넷째, 설교사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는 오직 말씀 증거를 위해 부름 받은 자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입’으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것은 인간이 땅위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직무이다. 20세기가 낳은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의 첫 문장을 “설교사역은 인생이 받을 수 있는 소명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부끄럽고 부정직한 사탄의 유혹에 넘겨주는 것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주는 망령된 일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다시금 말씀의 종으로 부름 받은 영광스러운 소명을 자각하고 설교사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 안진섭 목사: “신학대학원의 커리큘럼 개편해야”

설교의 횟수를 줄이는 것과 같은 표면적인 대안도 필요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스스로 설교를 작성할 준비가 안 된 설교자들은 횟수가 줄어도 여전히 표절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근원적인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첫째, 신학대학원의 커리큘럼을 개편해야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대다수의 신학대학원에서는 불과 한 두 과목만을 설교와 관련된 필수과목으로 지정해 놓은 상태다. 목회자의 역량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항상 그 대안으로 신학교육을 바꾸어야 한다고 외치기 때문에 진부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바꾸고 정비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이제 신학대학원에서는 교회의 요구에 맞게 다양한 커리큘럼을 운영하되 설교자를 길러내는 것에 집중하는 특화된 커리큘럼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둘째, 신학대학원의 교육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우선 신학대학원의 교육 방식과 관련한 첫 번째 제안은 각 신학대학원에서 학생들을 좋은 설교자로 길러내기 위해 팀 티칭 과목을 많이 개설하는 것이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 여러 전공 분야별로 다양하게 구성된 교수진들이 서로 교류를 하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팀 티칭을 함으로써 제대로 된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
 
두 번째 제안은 각 신학대학원에서 현장의 목회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르쳐달라는 것이다. 목회 현장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교수들이 현장과 동떨어진 교육을 하는 경우가 있다. 탁월한 설교자로 인정받는 현역 설교자들을 정식교수로 초빙하여 전문 설교학자들과 함께 가르치게 해야 한다. 마지막 제안은 ‘도제식 교육’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길을 빨리 찾는 것이다.
 
셋째, 목회자들에게 연장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목회자들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 더 이상 훈련받을 기회가 없다. 단지 교회나 기관이 운영하는 세미나에 간헐적으로 참여하여 도움을 받는 정도다. 필자는 각 교단별로 목회자들의 연장교육을 위한 기관을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열두 명 정도의 소그룹으로 운영되는 목회자훈련기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교단에서 존경받는 원로 설교자들이 그런 연장교육기관에서 젊은 설교자들을 도제식 교육으로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넷째, 설교 멘토를 만드는 것이다. 각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설교자로 잘 훈련된 담임목회자들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부교역자들의 설교 멘토가 되어달라는 것이다. 부교역자들은 단순히 담임교역자를 돕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다음 세대에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주역들이다.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책임이 신학교의 교수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목회의 길을 걷고 있는 선배 목사의 마땅한 책무이다.

 

* 그때 그 기사 링크

 

아직도 설교를 표절하십니까? 그렇다면 ‘영적 걸인이자 범죄자’

한목협, ‘설교 표절, 왜 심각한 문제인가’ 주제로 열린대화마당 개최 / 2014년 9월 3일 기사 “처음부터 베끼기로 작정하고 시작했다면 명백한 도용, 설교 표절이다.” “설교 표절은 이 시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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