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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조나단 에드워즈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설교의 힘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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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연구(26) *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 나타난 로고스와 파토스 연구/신성욱 박사(아신대)

2015년 9월 3일 기사

설교는 교회와 목회사역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강단에서 설교자들의 설교가 위력을 발휘할 때마다 교회는 크게 부흥했고, 반면, 설교가 힘을 잃을 때마다 교회는 쇠퇴를 거듭했다. 설교와 교회성장은 원인과 결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설교와 교회는 함께 가고 함께 멈춘다.

 

 

현재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성장 멈춤이나 감소현상은 강단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첫 번째 문제는 설교자들이 전하는 설교의 내용과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는 기복신앙과 물량적 성공주의, 성장제일주의, 긍정적 사고방식, 번영복음과 신학을 장려함으로써 교회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청중을 교회에 쉽게 끌어들이려는 실용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성경적 근거와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설교에 청중들은 신뢰를 갖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들의 설교에 논리가 부족하고 그 내용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청중들의 삶과 필요에 대한 설교자들의 무관심이다. 오늘날 설교의 대다수는 무미건조하고 활력이 없고, 설득적이지 못하고 청중들의 삶과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질리게 만든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설교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로고스(logos, 메시지의 본질 또는 상대방의 설득을 위해 명확한 증거를 제공하는 논리와 논지)와 파토스(pathos, 청중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서 화자가 갖춰야 할 청중의 심리적 상태 및 성향들을 총칭하는 정서로 구성되는 정열)라는 고대수사학의 설득법이 조화를 이루어 발휘되는 설교를 해야 한다.

미국이 낳은 최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유명한 설교인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회심의 역사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의 설교에는 로고스와 파토스가 잘 녹아있다. 그의 설교원고에 나타난 설교의 전개방식과 수사적이고 문학적인 전략들을 통해 한국 설교자들의 설교와 강단의 나아갈 방향성을 찾을 필요가 있다.

 

 

#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은 아마도 미국의 모든 설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설교일 것이다. 특히 지옥 설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교는 제1차 대각성이 한창이던 1741년 7월 8일 Northampton 인근의 Enfield라는 마을에서 행해진 설교였다. 설교 본문은 신명기 32장 35절 가운데 짧은 한 부분이었다(“때가 되면 그들의 발이 미끄러질 것이라”).

이 설교 주제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언제든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악인을 붙잡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에드워즈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죄인들이 처한 위험의 심각성, 그리고 지옥의 파멸성을 잘 그리고 있다.

당시 이 설교 현장에 참여한 청중들 대다수가 통회 자복하면서 크게 울부짖는 바람에 설교자인 에드워즈가 설교를 진행할 수 없어 자중하라고 요청까지 했다.

에드워즈가 지옥에 대해, 죄인들의 임박한 멸망의 위험성에 대해서 얼마나 생생하게 묘사했든지 그 설교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마치 자기들이 당장 지옥으로 빠져 들어갈 것처럼 느껴서 울부짖으며 예배당 기둥을 끌어안고 매달렸다고 한다.

 

 

# 로고스적 측면

로고스적 측면에서 에드워즈의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하 죄인들)이라는 설교에는 타당한 논리와 논지로 되어 있다. 그의 설교는 당시 청교도들과 동일하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성경본문(text)를 간략하게 소개한 후 주해 내지 해석을 한다. 둘째, 본문 전체의 주제인 교리(doctrine)를 설명한다. 셋째, 교리의 적용(application)으로서 청중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문맥에 다양하게 접근한다.

본문-교리-적용, 이 구조는 에드워즈 설교의 결정적 형식이다. 여기서 본문에 대한 해석은 10%, 교리와 적용이 각각 45%를 차지한다. 하지만 ‘죄인들’ 속에 나오는 적용은 본문설명의 10배, 교리 부분의 2배에 해당된다.

현대 설교자들 가운데 적용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성경적인 설교라 할 수 없다. 성경적인 설교에는 반드시 적용이 있어야 한다. 사실 본문과 교리는 로고스의 측면에 가깝고 적용은 파토스의 측면에 가깝다.

적용은 설교의 목적과 열매다. 그런데 이 파토스적 적용을 위해 필요한 기초 작업이 바로 분문과 교리다. 본문에서 추출되는 핵심 주제를 탄탄하게 세우는 선행작업이 알차게 수행되지 않은 채 적용만 탁월하다고 해서 청중들은 설득당하지 않는다.

‘죄인들’에서 에드워즈는 조금이라도 본문과의 관련성이 있거나 본문의 논증을 위해 활용가치가 있는 구절은 다 동원해서 본문의 의미를 밝히는데 활용했다. 그의 설교가 논리적이고 명료함을 지니기도 했지만 그의 설교가 청중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강력한 이유도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적절하게 연결되거나 관련성이 있는 성경 구절들보다 설교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로고스적 측면에서 설교자가 발휘해야 할 최우선의 능력은 인간적인 논지나 논리를 갖추는 것 이전에 성경본문 자체와 또한 그것을 보다 탄탄하게 세워주는 보조 성고들의 풍부하고 적절한 활용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파토스적 측면

파토스는 ‘증거의 수단으로서 가까이에 있는 문제와 그것을 나타내는 자들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청중의 감정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감정에 대한 호소는 효과적인 설득을 위해 청중을 감동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의지에 관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의지는 우리가 행동에 옮기도록 감동시킨다. 따라서 로고스와 마찬가지로 파토스 또한 설득의 효과적인 방법이다.

‘죄인들’은 생생한 이미지(그림언어)를 활용했다. 성경은 독자들에게 지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풍부한 이미지를 담고, 그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일에 동참하도록 마음의 동인을 제공한다.

에드워즈가 그림언어와 각종 비유법과 오감 활용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음을 그의 설교문 전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날 그의 설교에 어떻게 엄청난 회심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아무래도 에드워즈의 특출한 비유적 이미지와 언어감각의 활용 덕분일 것이다. 그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바로 청중의 마음을 터치하고, 그들의 감성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그만이 갖고 있는 전매특허인 생생한 언어 활용력이다.

이것을 이미지와 비유법 등을 활용한 ‘감각적 호소’라고 하는데, ‘죄인들’ 설교의 원고 속에는 천부적인 그의 그림언어와 오감이 그 이전의 설교들에서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강력하게 활용됐다.

 

 

특히 ‘지옥’에 관한 이미지들의 경우 교리를 설명하는 설교의 초반부터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어 그들로 하여금 도무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을 정도의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 용광로는 지금 뜨겁게 달구어져 악인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고, 불꽃은 지금 크게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은 악인들의 머리를 겨누고 있으며, 지옥은 악인들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진노의 활은 당겨져 있고, 화살은 곧장 날아가 여러분의 심장을 관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표현이 심하다 못해 혐오스럽다 싶을 정도로 에드워즈는 지옥에 관한 설명에 있어서 생생한 이미지를 즐겨 사용한다. 이것을 통해 그는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지옥에 관한 강한 인상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이 당장이라도 지옥을 피해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동기를 제공함을 알 수 있다.

선명하고 뚜렷한 어휘, 사실적이고 세밀한 표현, 그림으로 보여주는 듯한 생생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 청중으로 하여금 한 눈 팔지 못하게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언어 활용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반드시 눈여겨 살펴봐야 할 에드워즈의 주특기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성경의 교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성경의 이미지와 자연의 이미지 활용에 아주 능숙했다. 그의 놀라운 언어감각의 묘미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몰아가게 만든다.

에드워즈는 설교는 지적으로 탁월해서 설득력이 있어야 하면서도, 청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설교는 전인격적으로부터 응답을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다시금 에드워즈가 사용했던 그림언어를 재발견해야 한다. 위대한 말씀선포를 위해 상상력이란 깊은 샘물에서 그림언어와 오감이란 생수를 계속해서 퍼올릴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세심한 관찰력과 탁월한 상상력에 의해 발휘되는 그림언어나 비유법 등은 설교자가 활용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다.

오늘 설교자들 가운데 청중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성경적이고 수준 높은 설교를 한답시고,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나 원어에 대한 해설을 지루하게 나열하거나 혹은 딱딱한 교리 같은 것들을 무미건조하게 전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에드워즈처럼 그림언어나 직유법, 은유법, 유추와 다양한 이미지들을 사용해 생생하고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면 성경적이며 효과적인 설교로 청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 청중들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 사랑과 친절

오늘날 설교자들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어필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점 한 가지는 설교에 적용이 약하다는 점이다. 적용 결핍이나 적용 부재가 강단에서 작지 않은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이는 특히 하나님 중심이나 그리스도 중심, 혹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교하기를 좋아하는 보수교단에 속한 설교자들에게서 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청중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본문 중심의 설교를 해야 성경적이고, 수준 높은 설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각 본문들이 논증하는 교리를 성도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삶의 변화와 성도의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청교도들 중에서 에드워즈는 적용을 더할 나위 없이 잘 활용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 해석과 교리 설명에 집중하지 않고, 그것을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는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에드워즈가 ‘죄인들’이라는 한 편의 설교 안에서 노인들, 젊은이들, 어린아이들, 불신자들을 구분해서 각기 그 연령에 적합한 적용을 던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설교의 현장에 모여서 말씀을 듣고 있는 남녀노소와 묻는자, 믿지 않는자 가릴 것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고도 효과적으로 어필될 수 있는 적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적용 방식은 구체적인 적용의 부재로 인해 더 이상 청중들의 관심을 끌어당기지 못한 채 활력을 잃어가는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는 장점이다.

위대한 설교는 청중들의 가슴을 울리고 그들의 귀에 자신들을 향한 말씀으로 들리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 필수적임을 기억하자.

 

 

특히 에드워즈는 ‘죄인들’이란 설교에서 죄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다루었다. 그가 죄의 심각함에 대해 너무 거칠고 난폭한 방식으로 취급하다보니 그를 지독한 염세주의자나 부정주의자라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진노나 지옥의 두려움에 대해서도 아주 강하고도 충격적으로 묘사했다. 때문에 에드워즈를 향해 ‘인정머리 없는 설교자’, ‘진노의 하나님 편향적 예언자’, ‘지옥불과 유황불 전도사’, ‘공포의 설교자’ 등으로 비판하는 이들마저 있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당시 사람들과 설교가 전달될 엔필드의 청중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위협과 경고의 거친 언어가 사용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무디어진 마음이 깨어져서 회심하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에드워즈가 무겁고 심각하지만 임박한 지옥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에 대해서 리얼하게 몰아붙이는 근본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설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소망에 관한 마지막 주요 요지에 이르기 위한 서론이었다.

“… 그리스도께서 긍휼의 문을 활짝 열고 큰 소리로 불쌍한 죄인들을 부르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몰려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그 중에는 당신처럼 아주 비참한 상태에 있다가 최근에 회심해 행복해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 주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자비가 필요하고, 경이롭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와 사악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불가피하게 엄중한 어조로 그렸던 것이다. 거칠고 난폭하게 보이는 에드워즈의 경고와 협박성 지옥 설교는 그리스도의 자비의 필요성을 극대화시키는 보조장치일 뿐이다.

슬픔과 비탄과 절망의 단계 이후에 나타날 소망의 반응들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무겁고 심각한 설교를 에드워즈는 계획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청중들을 배려했다. 설교의 근본적인 목적을 청중들의 삶의 변화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신학과 자기 양떼를 향한 진심어린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융통성 있는 변화의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로고스적인 설교의 깊이와 탁월성에다가 양떼를 배려하는 목자로서의 파토스적인 감성과 사랑이 없었다면 청중의 그와 같은 변화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강단에서는 청중들이 좋아하는 축복과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만 들려진다. 에드워즈나 과거 우리 선조들이 외쳤던 죄의 심판이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설교가 들리지 않는다.

청중들이 싫어한다는 이유 때문이지만 설교자들은 지금도 지옥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불신자는 물론이요, 회심하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에드워즈가 전했던 복음의 진수를 전해야 한다.

만일 설교자들이 비록 인기 없는 부정적인 메시지라 할지라도 에드워즈처럼 양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심정을 갖고 전한다면 그가 경험한 놀라운 변화의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 확신한다.

 

 

반면, 에드워즈의 ‘죄인들’ 설교에도 약점은 있다. 에드워즈는 거의 예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님이나 성경의 저자들은 진리를 전하면서 예증과 예화를 많이 사용했다. 다양한 수사기법을 잘 활용했던 에드워즈에게서 청중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예화가 거의 없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다.

또한 구체적인 삶의 적용도 부족했다. 적용은 에드워즈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가 활용한 적용은 또 다른 본문이나 교리에 가까운 것들일 뿐, 오늘을 살아가는 청중들의 구체적인 현실 생활을 반영한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적용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또 다른 본문이나 교리라는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자들에게서 기대하는 바람직한 적용은 아니다. 적용만큼은 청중들의 현실의 삶으로 연결된 내용이라야 효과적이다.

오늘날 청중들의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은혜로운 말씀과 아름다운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삶 속에 구체적으로 구현돼 열매 맺는 것에까지 나아가게 만드는 현실적인 힘이 청중들에게 절실함을 놓쳐선 안된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구체적 적용을 위해 성도들의 실존적인 고민과 아픔에 대해 연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자들은 청중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읽어내는 통찰력을 갖고 그들의 삶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한편, 위의 기사는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의 학술지인 ‘복음과 실천신학’(제35권, 2015)에 실린 신성욱 박사(아신대)의 ‘Jonathan Edwards의 설교에 나타난 로고스와 파토스:“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을 중심으로’의 주요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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