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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교리와 신학

믿음은 무엇인가? ‘오직 믿음’은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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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sola fide)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이성호 박사

 

2015년 1월 22일 기사

 

한국교회가 강조할 것은 ‘행함’보다는 ‘믿음’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만을 의미한다. 이 믿음은 복음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지식, 그것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약속을 하는 분에 대한 철저한 신뢰다.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가 신자로 하여금 도덕적 무관심으로 이끈다는 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이성호 박사(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오직 믿음’(sola fide)는 종교개혁이 참 교회에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이며, 이 교리는 신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 그 자체였고, 이 메시지를 듣고 수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고 교회의 억압된 전통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오직 믿음’에 대한 교리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채, 악용이나 오용이 되어왔다고 진단했다.

이 박사는 “대표적인 예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문구가 말해주듯이 ‘오직 믿음’은 교히를 다니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천국을 영구히 보장해주는 천국행 티켓처럼 이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신, 즉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믿기 때문’이다. 천국이 보장돼 있으니 자신의 삶은 부차적인 것이나 사소한 일이 된다. 그 결과 믿음이 성도들로 하여금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이 박사는 “한국 교회 성도들의 윤리적 수준이 세상 사람들보다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오늘날 한국 개신교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문제는 이신칭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를 제대로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성호 박사는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연구논문(한국개혁신학 제35권, 2012년 / 한국개혁신학회)에서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의 성격이 정확이 무엇인지 개혁파 입장에서 살핀다.

 

 

그의 연구논문에서 주장하는 것을 일부 정리해 싣는다.

1. ‘오직 믿음’은 믿음만 있으면 되고, 다른 것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심지어 믿음이 최고라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고린도 전서 13장에 따르면 믿음과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지혜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한다.

2. 따라서 ‘오직 믿음’에서 ‘오직’을 무조건적인 배타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직 믿음은 또한 행위를 무조건적으로 배제하지도 않는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인과관계가 있으며 비록 구분되지만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야고보서의 가르침대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즉, 행위를 통해 우리는 어떤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니면 헛된 믿음인지 비로소 구분할 수 있다.

3. 종교개혁이 결사적으로 거부한 것은 믿음만으로 죄인을 의롭다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주장이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인데, 믿음만으로 부족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였다. 개혁가들이 오직 믿음을 사수한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사수하기 위함이었다.

 


4. 이 점에서 오직 믿음과 오직 그리스도는 연결된다. 따라서 오직 믿음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구원론적인 제한된 의미에서 ‘오직’ 믿음이다. 신론적인 차원에서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으며, 이것은 개혁파 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지이다.

5.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은 참된 지식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은 맹목이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무턱대로 무조건 다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식이 없더라도 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헌금과 기도와 같은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소위 좋은 믿음은 아니다. 더 나아가 설교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6. 칼빈은 성경에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산지식이야말로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이라고 보았다. 이 지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실 위에 기초한 지식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중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이 신자에게 구원을 일으키는 것이다.

7. 믿음은 또한 굳건한 확신이어야 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식과 더불어 이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데, 이 확신이 전혀 없으면 그것은 아예 믿음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칼빈은 성령이 주는 확신은 영구적인 확신이며, 이 확신으로 인해 양심이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해방과 자유 그리고 평강을 누린다고 주장했다.

8. 확신과 관련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약속과 관련돼 있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약속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적인 복도 주신다’는 한국 교회의 만연된 기복적 신앙, 어설픈 논리를 만들어낸다.

9. 확신과 관련해 우리의 믿음은 현재가 아니라 장차 올 것과 주로 관련돼 있다. 믿음이 이 세상의 삶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믿음이 세상적인 좋은 것을 우리에게 보장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때문이다.

 

 

10. 믿음의 본질은 전적인 신뢰다. 지식과 확신만으로 믿음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믿음이 정말로 믿음이 되게 하는 것은 신뢰다. 확신을 뛰어 넘어서 신뢰가 믿음에 필수적인 요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11. 신뢰로서의 믿음을 통해 죄인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칭의와 성화의 은혜가 죄인에게 전해진다. 이 은혜는 죄인을 의인으로 선언하며 동시에 그 죄인을 중생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이렇게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 안에 내주하는 성령의 힘으로 율법을 순종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12. 이 속에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해 은혜의 은혜됨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

13. 이렇게 믿음을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오직 믿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오해들을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가 성도로 하여금, 윤리적 나태나 복음전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는 비판은 ‘오직 믿음’에서 ‘오직’만 보고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오직 믿음’은 ‘오직 (전도하는) 믿음’이라고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말했듯이 이 믿음은 믿음이라고 부르지만 믿음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15. 결국 한국 교회가 보다 고민해야 할 문제는 행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행함은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행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성도들이 선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강단에서 복음이 선포되어야한다. 믿음은 두루뭉술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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