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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한국장로교, 선교역사에서 교회역사로 발전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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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총회 100주년 회고:한국장로교회의 발달단계 / 안교성 교수(장신대)

 

“한국장로교의 역사 초기에는 주로 선교의 역사를 기준으로 삼았다. 아마도 선교부의 영향 탓일 것이다.”

한국장로교의 발전단계를 살펴 본 안교성 교수는 “한국장로교의 후반에는 점차 교회의 역사를 기준으로 삼았다”며 “이는 교회의 영향력의 증대와 맞물려가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공동의 역사를 기술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그의 연구목차는 다음과 같다.

Ⅰ. 서론
Ⅱ. 한국장로교 발전단계
1. 교회의 공식적 설립:독노회와 총회 설립, 1907, 1912년
2. 선교 25주년, 1909년
3. 선교 50주년, 1934년
4. 선교 75주년, 1959년
5. 선교 100주년, 1984년
6. 총회 100주년, 2012년
Ⅲ. 결론

 

 

# 연구내용 중에서

 

1.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은 몇 가지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이것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었던 ‘네비우스 정책’이라는 삼자정책의 성공에 기반한 것이었다. 한국 교회는 삼자정책 중, 자전(self-propagation)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자급(self-support) 분야도 탁월했다. 따라서 삼자정책의 마지막 단계인 자치(self-government)는 예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총회 설립은 선교사의 기구화 혹은 조직화의 성공적인 과정에 의해 가능했다.

 

한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은 본국 교회의 선교부와 더불어 현지 교회인 한국 교회의 조직화에 힘썼다. 셋째, 어떤 성격의 교회를 설립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선교사들은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추구했다. 넷째, 한국 교회는 한국인의 신앙적 성공에 기반했다. 다시 말해 비록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독노회 및 총회 회원이 되고, 더구나 임원으로 활약했지만 결국 총회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현지인이었다.

 

2. 독노회와 창립총회에 표출된 교회의 정체성은 첫째, 독노회 회의록에 의하면 독노회는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회의를 “실로 노회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이는 독창적인 역사 해석인 동시에 장로교가 대의제라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둘째, 독노회 구성에 있어서 한국인 목사를 중시했다. 셋째, 당시 장로공의회(이때는 합동공의회 서기) 회장이었던 마펫(마포삼열, S. A. Moffett)은 십자가 신앙, 세상의 빛 됨, 거룩성 등으로 노회의 의의를 이해했다. 넷째, 독노회는 대한국 독립노회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세계기독교와의 연대를 중시했다.

 

 

3. (선교25주년, 1909년) 독노회 설립(1907년)과 총회 설립(1912년) 사이에 장로교 선교부, 특히 미북장로교 선교부의 선교 25주년(1909년)이 있었다. 당시 북장로교 선교부는 선교 25주년을 맞아 선교보고서를 제출하고, 그것을 출판했다. 전반적인 보고서의 분위기는 자축이었다. 이미 1900년 뉴욕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칼선교대회에서 한국은 선교의 성공 내지 선교의 기적으로 칭송받는 분위기였다.

 

이 보고서의 특징은 첫째, 교회성장이다. 둘째, 교회 부흥에 있어서 현지인의 역할을 인정했다. 셋째, 장로교에 대한 긍지다. 넷째, 한국 교회를 전도에 열심인 교회, 성경 중심적 교회, 네비우스 정책, 특히 자립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교회로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의료선교분야는 선교사 위주의 사역이므로 한국 교회에 대한 많은 언급이 없다. 여섯째, 한국 여성의 수고가 많았다.

 

일곱째, 교육사역은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으로 영역이 확장됐다. 여덟째, 문서사역은 주로 선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아홉째, 한국 교회의 초교파적 성격(교회연합의 비전)을 재확인해주고 있다. 열째, 선교사 사망자 명단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헌금에 대한 한국 교회의 적극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4. (선교 50주년, 1934년) 미북장로교 선교부는 선교 50주년을 맞아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전반적으로 내용상 선교 25주년 보고서와 대동소이하다. 다만 서문에 50주년의 의의와 특징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지난 50년의 성공적인 선교 사역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한국 교회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그것이 동참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었다.

 

둘째, 축하인사 가운데 여타 선교부 뿐 아니라 조선총독이 끼여 있다. 특히 조선총독은 선교부와의 지속적이고 가속적인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선교부와 정치적 맥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셋째, 세계경제대공황을 직면하면서 주춤하던 세계선교 열정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5. 이밖에 보고서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몇 가지 현상도 있다. 첫째, 한국선교부가 특별한 지원을 받는 것이 확인됐다. 한국은 1920년대 초를 기준으로 할 때, 전 세계에서 미북장로교 선교본부의 재정적, 인적 지원을 가장 많이 받아싿. 심지어 선교본부의 지원의 1/3을 차지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선교부가 세계에서 가장 큰 현지 선교부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현지 선교부가 50명 전후인데 비해, 한국선교부는 약 세 배에 이르는 150명 정도였다. 둘째, 한국 교회의 발전을 설명하는데 블레어(방위량, W. M. Blair) 선교사는 한국인, 선교사, 그리고 일본인을 선교 발전에 기여한 집단으로 봤다. 셋째, 전반적으로 네비우스 정책의 철저한 준수, 성서의 중요성, 풍성한 헌금 등이 강조되고 있다. 넷째,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한국의 문제점들을 분석했다. 다섯째, 한국 교회의 세계선교를 언급하고 있다. 여섯째, 미래를 전망하면서 주로 전도사역의 필요성을 재론하고 있다.

 

 

6. (선교 75주년, 1959년) 서구 중심의 선교, 선교사 중심의 선교에서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의 선교, 교회 중심의 선교로 바뀌게 됐다. 미북장로교 선교부는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 및 관계라는 개념에 따라 선교 이양을 완결하려고 했다. 에큐메니칼 선교란 한 마디로, 각 지역의 교회가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사회는 사회적 혼란에 휩싸였고, 한국 교회 역사 교파 내의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특히 한국장로교는 1950년대 초에 이미 두 차례나 대규모 교파 분열을 경험했다. 한마디로 선교 75주년은 선교 이양을 완결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장로교의 가장 큰 분열의 순간이 되고 말았다. 1972년 통합 측은 총회 60주년을 맞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60주년기념화보’를 발간했다. 특징을 요약하면 첫째, 교단 분열에 관해 기존에 회자되는 박형룡 목사의 재정문제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언급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선교부와의 관계 개선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당시 한국장로교 내의 각 교단과 선교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고신 측은 미국정통장로교회 선교부와, 기장 측은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와 관계를 돈독히 했다. 이에 비해 합동 측은 선교부와의 관계가 단절됨에 따라 결국 자립의 요구에 다시금 직면해야 했다. 물론 합동 측이 잠시 ICCC 측과 관계를 맺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자립의 길로 나갔다. 이에 비해 1960년대 새로 출현한 대신 측은 ICCC 측과 관계를 돈독히 했다.

 

7. (선교 100주년, 1984년) 선교 100주년은 한국 교회 역사에 있어서 이정표를 이루고 있다. 첫째, 한국 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교회 100주년으로 하고자 했다. 둘째, 한국장로교가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선교 100주년은 한국장로교, 나아가 한국 교회의 공동의 축제가 됐다.

 

특히 1884년을 교회의 기원으로 삼지 않는 타 교파까지 이 일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 셋째, 선교 100주년은 사회적인 관심도 있었지만 주로 교회 내적인 관심이 많았다. 선교 100주년은 국내적으로는 교회 개척과 교회성장을 본격화했고, 국외적으로는 한국 교회의 세계 선교에 대한 책임감을 떠안게 됐다. 즉, 선교 100주년은 선교중심적, 그것도 하나님의 선교보다는 전통적인 복음선교 중심적인 선교관을 반영한 양상이었다. 넷째, 갈라진 교단들이 신학적 토론으로 함께 했던 경험, 약하다고 평가받언 교단성이 강화된 것 등이 논의됐다. 다섯째, 선교 100주년을 계기로 세계 교회와의 교류가 더욱 깊어졌다.

 

 

8. (총회 100주년, 2012년) 세계화 현상 가운데 한국의 세계화와 세계의 한국화가 한국 교회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즉, 한국의 이민, 한국으로 오는 이주자들, 전 세계 다양한 디아스포라의 대두 등으로 한국 교회는 급속도로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화되고 있다.

 

9. 한국 교회의 성장의 정체 내지 둔화 현상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국 교회를 보는 시각이나 한국 교회의 자기인식, 나아가 한국 교회의 사역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려는 신학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목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10. 총회가 시작될 때, 한국장로교는 하나였다. 이제는 다양한 교단이 있다. 그렇다면 이 총회는 누구의 총회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제 한국 교회는 현재의 교단의 상황을 인정하면서 연합 내지 재통합의 가능성을 염두해 둬야 한다. 이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교단 통합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 만큼 본격적으로 논의가 발전돼야 한다.

 

* 위의 내용은 한국장로교신학회 논문집 제9호(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지1, 주제: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 100년을 돌아보며) ‘장로교회와 신학’에서 발췌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안교성, “한국장로교 총회 100주년 회고:한국장로교의 발달단계”, 장로교회와 신학, 제9호(2012), pp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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