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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원문] 동성애에 대한 윤리신학적 관점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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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윤리신학적 관점


2015년 3월 6일 기사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이 지난 3월 6일(2015년) '동성애 이슈와 교회 영성'을 주제로 제44회 월례발표회를 개최했다. 기독교학술원의 제공으로 이날 발표된 내용을 원문으로 제공합니다. <편집자 주>


동성애에 대한 윤리신학적 관점 /  박종서 목사(양지평안교회)

 

1. 들어가며
2. 만날 수 없는 지평
1) 기독교적 입장
2) 정신과학의 입장
3. 신학적 관점
1) 해부학과 심리적 성숙의 엇갈린 운명론에 대해
2) 동성애가 선천적이거나 유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4.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윤리
1) 교회는 동성애에 대한 분화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 동성애 자살적 성향에 대한 교회의 책임
3) 물질주의의 가장 복잡한 위장=> 동성애
5. 논의에서 얻은 몇 가지 대안

 

 


1. 들어가며

교회가 동성애 문제에 방관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로만 일관하는 동안 최근 급속히 동성애자들의 세력화 조심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동조하는 세력은 동성애자들만이 아니다. 비기독교진영의 단체들은 거의 동성애를 인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동성애를 받아드리냐 아니냐가 보수와 진보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제는 기독교인들까지도 동성애을 공감하고 받아드리는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어 동성애의 문제에 교회가 더 이상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동성애가 꼭 구원의 문제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겠느냐 하는 의심과 그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구원이 취소된다고 이야기 할 경우 과연 그들이 자신의 본능과 리비도의 흐름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억압할 수 있는냐 하는 문제에 회의적인 태도를 갖기 때문이다. 동성애도 사랑이고 성욕이고 본능이라는 차원에서 인간적 공감을 갖게 되고 더욱이 심리학적 잣대를 적용할 경우, 비록 동성애가 병리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에 대한 폭 넓은 시각과 포용력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윤리적 차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하는 자체 메뉴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동성애자가 예수를 믿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성애를 이성애로 바꾸고 출석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동성애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동성애 상태를 유지한 채 예수만 잘 믿으라고 이야기하면 되는가? 사회의 법, 보편법이 적용될 수 없는 이들에게 성경이라는 특별계시에 말씀을 적용하는 일은 가능한 일인가? 이들이 겪는 갈등과 고민을 공감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은 한 것인가? 기독교가 과연 그들을 도울 수 있는가? 이 모든 사안들은 민감한 문제들이다. 본 글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며 답을 찾아 본다.

2. 만날 수 없는 지평

동성애를 논하는 과정에서 항상 부딪치는 문제는 동성애를 공감하려는 태도와 적대시하는 기독교적 태도의 두 입장이다. 비기독교적 진영에서는 동성애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하고 기독교에서는 동성애의 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를 성경에서 찾으려 한다. 기독교적 입장은 과학적 입장과 달리 그들의 발달과정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롬 1:25)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정신과학이 동성애를 병리적으로 이미 진단하였지만 사실 이것에 대한 수용 역시 미미하다. 최근 극단적인 동성애주의 자들은 동성애를 선천성으로 주장하며 제3의 성으로 만들려는 인정투쟁을 하고 있다. 기독교는 이 운동을 막는 일에 급급하다. 비 기독교진영에서 조차 그들의 치료를 포기하고 포용적 태도를 취하면서 동성애자들과 함께 기독교의 배타적 태도에 저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동성애의 본질은 서로 빗겨가게 된다.

1) 기독교적 입장

고대 사람들에게 진리나 아름다움이란 저 멀리 이상의 세계 속에 선재하는 것이다. 그 이상적인 틀에 맞으면 진리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틀에 맞지 않으면 비 진리이고 추한 것이 된다. 진리는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포스트모던 시대는 외부에서 주어진 이 구조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멋이요, 이렇게 살아야 주체적인 사람이 된다. 때문에 보편성을 받아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의 틀을 아예 부수어 버리고 새로운 틀을 만들기까지 한다. 동성애는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여 더욱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방법을 이 진리(말씀)라는 틀에 나를 맞추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제시한다.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친상간은 금물이다.(신 27:23,레 20:14) 아들이 엄마와 결혼할 수 없고 딸이 아버지와 결혼할 수 없다. 남자와 남자가 여자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한다. 딸이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면 딸은 미쳐버린다. 오빠가 여동생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없다. 틀이 깨지면 분열이 오고 정신이 깨진다. 이유는 오빠가 애인인지 오빠인지 구분이 안 되고 아빠가 남편인지 부모인지 그 경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말씀에 제시된 틀을 유지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우리 피조물을 위한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등. 이 모든 것들은 ‘틀’ 이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모든 틀은 거부한다. 동성애란 이 틀을 거부한 결과에 따른 댓가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말씀을 거부한 결과 왜곡된 기형적 가정이 발생되고 이러한 가정에서의 역기능적 관계가 동성애를 만들어낸 원인이라는 것이다. 정신과학도 동성애의 원인을 해체된 가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고 그들 역시 동성애를 제3의 성으로까지 인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어느 정도 한계를 그어주고 자신을 통제해 주는 무엇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불안은 자유에 대한 불안이고 이 불안이 왜곡을 가져온다.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결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지게 되고 순리가 역리로 바뀌게 된다고 말씀한다.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결과에 대한 상당한 보응이고 그것은 그들의 돌이키지 못하는 ‘상실한 마음’ 인 것이다.(롬1:27,28)

2) 정신과학의 입장

여아의 경우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거친다면 사랑의 대상이 엄마에서 아버지에게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지만 남자아이의 사랑대상은 항상 엄마가 된다. 이렇게 엄마에 사로잡힌 남아에게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있는 권력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아버지와 아이 그리고 어머니는 미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아이는 아버지의 개입으로 엄마에 대한 유아적 태도를 포기하게 된다.(S. Freud, 1923, 144,145)

그러나 사춘기가 지난 몇 년 뒤에까지 어머니에게 강하게 고착되어 있다면 그는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고 다음에는 어머니가 그랬듯이 자기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다른 애정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Freud, 1926, 192)그러나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정신분석은 이렇게 동성애의 원인을 다른 사랑 대상을 찾지 못하고 어머니에 고착되는 것으로 보았고 이것이 다른 여자에게로 성대상을 옮겨 가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고 보았다.

 


대체적으로 아버지의 개입으로 엄마와의 상상적 관계는 깨어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엄마에 대한 환상이 쉽게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동일시 할 시기에 어머니와 동일시 할 경우, 특별히 사춘기가 지난 지 몇 년 뒤에도 어머니에게 강하게 고착되어 있을 경우에는 다른 여자에게로 사랑의 대상을 옮겨가기가 어렵게 되고 애정 대상을 남자에게서 찾게 된다. 사실 사랑의 대상을 다른 성(性)으로 옮기는 것보다 자기애 적 대상선택, 곧 같은 성을 사랑하는 것이 더 수월하고 실행하기가 더 쉽다. 異性으로 옮겨가야 하는 성적 과업은 투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Freud, 1914, 101)

또 다른 경우 아버지에 대한 호감이나 두려움이 동성애적인 대상 선택을 촉진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여자들을 거부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모든 경쟁을 피한다는 뜻이 된다.(Freud, 1926, 192) 동성애는 어머니에 대한 애착, 자기애, 거세의 두려움 등이 동성애의 심리적인 병인에서 발견한 요인들이다. (192) 다른 이유로는 ‘피해 편집증’을 예로 들기도 하는데 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미운 박해자가 되는 반면, 경쟁자가 애정이 대상으로 바뀌는 것으로도 동성애를 설명한다.(193) 결국 동성애란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 오이디프스기(5,6세)를 지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인 성이 일치되는 보편적 과정을 밟지 못하고 심리적인 성과 생물학적인 성이 일치하지 않는 갈등을 만나거나 여기에 고착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의 이면에는 남성의 성기에 둔 높은 가치, 즉 애정의 대상에게 남성의 성기가 없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 있다. 여자들을 경멸하고 싫어하고 심지어는 그들에 대해 두려움까지 느끼는 태도는 일반적으로 어렸을 때 여자들에게는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데서 기인한다.

남아 동성애는 엄마가 완전한 만족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하는 환상과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이다. 물론 모든 남성이 이러한 환상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동성애의 경우 엄마와의 묶여 있는 상상계의 정도가 비약적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경우 이성에게 괴로운 경험을 하고 그 대상에게 등을 돌리고 이성을 싫어하는 것이다.(Freud, 1920, 24) 쌍둥이 형제의 경우 둘은 이성관계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연애 과정에 다른 형제로 잘못 알게 되는 경우가 발생했고 이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한쪽이 동성애로 돌아서는 경우에 대한 임상 보고도 있다.(25)

 

 

3. 신학적 관점

1) 해부학과 심리적 성숙의 엇갈린 운명론에 대해

인간은 심리적으로 양성성 또는 중성으로 태어나 발달과정에서 성적 정체성이 확립되거나 교란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임상과 논문들을 통해서 밝혀진 바이다. 정신과학은 모든 인간이 그들의 생리학적 특성에 따라 특정한 방식들로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그들은 기능적인 의미에서의 해부학은 운명이라고 단정하지만 성숙의 의미에서 해부학은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Freud, 2005, Nancy J. Chodorow, 1978, 252) 때문에 성에대한 심신의 불일치(동성애)에 어느 정도 관용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성은 해부학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선택사항이 아니다.

성전환수술이나 동성애의 선택은 마치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 사람에게 뺑소니가 <그의 선택>이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경우, 선택은 오직 오직 차에 치은 사람을 태우고 병원에 가는 것만 선택이 된다. 그것이 보편윤리이고 도리이기 때문이다. 성에서 몸보다 심리가 더 우선한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도 보편논리에도 모순이 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함께 성숙해야한다. 성장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인간은 심, 신 어느 한쪽의 성장만으로 인간됨을 누릴 수 없다. 성경도 지혜와 키가 함께 자라가고(눅 2:40. 52) 몸과 심령이 함께 강하여진다(눅1:80)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심령이 분리되는 것이 곧 분열이고 왜곡이며 이것이 병리적 증상의 원인이다. 그러나 정신과학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벗어버리지 못한 유년기 대상에 성적으로 고착되는 것이 페티시즘으로 나타나든 동성애로 나타나든, 그것은 범죄도 신에 대한 죄도 아니고, 병이나 광기의 한 형태도, 퇴폐의 한 증상도 아니라고 간주한다.(Gay, Peter, 2006, 295)

하나님은 心身이 함께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로 가정을 허락하셨다. 가정이라는 틀이 역기능적일 경우 그 가정을 통해서 병든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숙명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동성애라는 왜곡된 성이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인간이 정교하고 복잡한 체계의 발달과정을 거쳐야 하는 영적인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라는 주님의 명령은 몸의 분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성장을 통한 독립이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동성애가 사회 생활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이것도 사실은 아니지만) 사회적 통념만을 문제 삼고 동성애의 보편성을 인정하거나 양성성을 정당화하는 심리학자들의 태도(Freud, 1926,194)는 재고되어야 한다.

동성애자들의 사회에 대한 기여와 사회적 감정을 동성애적인 태도가 승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나(S. Freud, 1905) 그들이 더 사회에 그리고 인류에 적응하는 능력이나 공헌의 정도가 뛰어나다고 해서 그들의 특수성이 동성애의 보편성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동성애 대부분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되고 특히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게 된다. 생물학적 성과 심리적 성 정체성의 통합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성취해야 하는 과업이다. 개인적 발달이든 가정의 문제이든 성 정체성을 얻는 것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애도해야 하는 것이지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동성애가 선천적이거나 유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에로틱한 이성과의 사랑이나 성적 사랑이 방해받을 때 연적에 대한 극단적인 행동, 또는 원하는 대상을 얻지 못했을 때 죽음을 선택하는 인간의 태도는 사랑이 인간의 모든 합리적인 사고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Richard Norman, 1983, 253-255) 사랑에 빠진 상태는 최면상태에 빠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점은 사랑하는 대상이 동성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성 대상 도착>인 동성애는 그 정도에 있어서 더 강렬하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동성애가 선천적, 또는 유전적이라고 주장하는 표면적 근거가 된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그들은 창조주의 실수로 잘 못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 동성끼리 사랑하면 안 되는가 왜 꼭 이성끼리 사랑해야 하느냐는 그들의 주장은 다원성과 관용론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설득력을 주는 듯 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동성애는 사회적 범죄가 아니며 동성애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동성애를 대중의 자연스러운 애정 생활을 위한 모든 전제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ilhelm Reich, 2000, 306) 이들 주장은 사회적 불화에 적절한 합의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타협안은 결국 창조주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전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 지금까지 동성애의 선천성과 유전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 근거를 제시한 학자는 아직 없었다. 생물학적으로도 또는 심리적으로도 그리고 성경적으로도 동성애의 선천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고 유물론자인 프로이트조차도 그것을 ‘성적 일탈’(Freud, 1905)로 보고 있다.

4.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윤리

1) 교회는 동성애에 대한 분화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동성애자들 중에는 사회적 관습과 통념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 못하는 결단력 없는 모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떠나고 싶은 유혹, 포기하고 싶은 충동 등을 끌어안고 삶을 고뇌한다. 이들은 아버지의 법을 중시하고 상징적 거세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상징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남성성을 버리고 여성화되어야 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인간 실존을 받아드려야 한다.(J. Lacan, 1978, 179)(1998, 74) 이들은 세상의 관습적인 법을 떠나서 동성애로 살아야 하는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터부시되는 동성애에 대한 갈망 역시 놓치 못하며 갈등한다. 실제 동성애 실화를 다룬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이라는 영화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이 사슬을 끊고
네게 다가가고 싶어
하지만 조물주는 또 다른 사슬을 만들어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네
너를 향한 사랑의 눈금을 더 높이 그어가네
너를 잊지 않으려고
하지만 조물주는 더 높은 금기의 벽을 쌓아가네
사랑은 언제나 슬픈 것
오주여 저는 압니다. 저는 압니다
당신만이 내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제게는 또한 굴레라는 걸....

 

반면 현실의 갈등을 담아내기보다는 밖으로 자신의 문제를 투사하며 왜 자신의 정신적 사랑이 생물학적 사실에 의해서 억압되어야 하는가 원망하는 동성애자들도 있다. 그는 아직 상징적 거세를 경험하지 못했고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웃는 태도에 개의치 않는다. 이들은 삶의 복잡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분열적인 정신활동과 도착으로 도피하며 살아가는 동성애자들이다.

교회와 기독교는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에 대한 연구와 토론, 임상사례 발표 등을 통해 이들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해야 한다. 성 대상 도착이 심하지 않은 동성애자의 경우 이성애로 데려올 수 있는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남자가 여자의 정체성으로 혹은 여자가 남자의 정체성으로 있어왔고 오랜 동성의 성적 경험을 실행해 왔다면(이들은 완전도착의 동성애라 할 수 있다) 이들을 이성애로 되돌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동성애자이면서 이성과 교제하며 이성을 통해 자녀를 낳는 경험까지 한 양성적인 사람들의 경우도 이성애로 되돌릴 가능성은 있다. 이들을 돕는 일에는 절대적으로 ‘신앙의 은총’과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2) 동성애의 자살적 성향에 대한 교회의 책임

동성애는 남성과 여성의 성 정체성이 확립되기 전인 원초적 유아성욕의 상태, 엄마와의 2자관계인 지고의 상태에 고착된 것이다. 엄마의 상징은 아무런 간섭도 없는 지상낙원을 표상한다. 이 낙원에 남성성과 여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은 세상과 유리된 삶, 남들이 들어갈 수 없는 세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 아버지를 잃어버린 세계, 현실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세계를 살게 된다.
 
이들은 주어진 보편적 틀(아버지의 법)이 적용될 수 없는 원초적 상황에 빠져있다. 이로 인해 동성애자들은 운명적으로 어두운 삶과 비극적 종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혹 동성애자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 자세를 갖는다고 해도 그 이면에는 환경의 벽, 사회적 통념으로 인한 좌절이 숨어 있고 이 때문에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 항상 죽음에 더 가까이 있게 된다. 그것이 비록 질병에 걸리는 일일지라도 수동적인 자살의 형태를 띤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사회를 대표하는 법, 곧 아버지의 법으로 진입은 인간은 한 인격의 주체로서 태어나게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성 정체성을 확립시킨다. 그러나 동성애의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다가갈 수없는 세계이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서 독립하지 못한 남성 동성애자는 다른 누구 보다 무자극 상태, 곧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죽음본능이 더 우세하다. 동성애 자 일수록 어머니와의 젖가슴과의 융합에 대한 소원, 즉 대상이 따로 없는 자기애적 만족 상태의 환상을 성취하려는 소원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서는 욕구 총족을 목적으로 하는 대상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W.W. Meissner,431) 이러한 사실은 자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자살 시도는 자아 경계의 상실과 어머니와의 융합의 소원을 포함하는 심각한 퇴행적 상태들과 관련된다. 따라서 자살 환상들은 어머니 가슴에서 잠드는 초기 유아기 환상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대상관계의 초기 미분화된 상태에서의 어머니와의 연합과 분리라는 복잡한 문제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432) 자살 의도는 자기 징벌적, 자기 파괴적 충동들의 역동을 표현한 것이며 자기애적 자기 성취와 자기표현에 대한 깊은 무의식적 소원들과 욕구의 표현인 것이다.(433) 엄마라는 품, 그곳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에 동성애자들은 더 강하게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상실은 어쩌면 신이 정해준 안전한 틀에 머물지 못했던 그 누군가의 과실로 인한 것이다. 이들의 그 원초적 욕망은 그들의 성적 욕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마치 엄마의 품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아이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이들은 조급히 죽음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그들의 삶은 비관적이고 우울하게 마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기독교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3) 물질주의의 가장 복잡한 위장=> 동성애

동성애와 물질주의의 연관성은 창세기 19장5~8절에 기록한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에 대한 상징으로 오직 동성애 사례 한가지를 예로 든다. 동성애를 sodomiste(남색가)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Jadques solé, 1976, 232) 동성애는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성숙을 가볍게 여기고 감각과 쾌락의 보이는 것에만 치중한 결과다. 자본주의의 저급함이 바닥까지 내려간 표상이 바로 동성애라는 사실을 교회는 인지해야 한다. 동성애의 간접적 원인에 교회가 참여하고 있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동성애에 대해 오직 배타적으로 일관하는 교회의 모습은 곧 자신의 그림자를 외면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도피 행각이 아닌지 살펴야 한다.

 

 

 

5. 논의에서 얻은 몇 가지 대안

1) 동성애가 유전적이거나 선천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기독교는 정확히 반론할 수 있는 지식과 자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2) 아동기에 발생하는 병리는 신경증이고 치료가 가능한 병이지만, 유독 같은 시기에 발생한 동성애를 치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정신과학의 입장은 이미 오래전에 사도 바울이 동성애를 진단한 말씀과 일치한다.

3) 동성애를 이성애로 바꾸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책무는 아니다. 성경도 동성애자가 이성의 사랑으로 바뀌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悔改(뉘우칠 悔, 고칠 改) 즉, 동성애자가 뉘우치고 돌아설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부인되어서는 안된다.

4) 교회는 자신의 동성애를 부끄러워하며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자신이 동성애인줄 착각하고 동성애 카페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이 이성애라는 사실을 알고 돌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5) 동성애자들이 교회에 올 경우 그들에 대한 배타성(짐승이나 괴물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으로 인해 교회에 적대감을 갖게 하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이며 누가 유기된 자인지 (“상실한 마음대로 두었다”[롬1:28]는 말씀처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뉘우치고 돌아서길 원하거나 자신의 병리를 치료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인간의 지혜와 능으로 불가능 할지라도) 동성애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복음이 제시되기 위한 전초작업이 동성애라는 이유로 거절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도 하나님은 은총아래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물론 그들이 돌이킬 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6) 이를 위한 기독교적 차원의 연구소라든가 교단차원의 특수사역 팀을 만들어야 한다. 교회는 그들의 병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대책 또는 치유책(기독교적 신앙 안에서)에 대한 자체 메뉴얼을 갖고 있어야 한다.

7) 교회는 그들의 상처를 만지고 사랑하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들도 피해자들이다. 그들이 회개한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단 이러한 긍휼은 개별적 만남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들이 집단화된 세력으로 또는 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문제의식을 갖고 조직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참고문헌>

Chodorow, Nancy J. Reproduction of Mothering,(1978) 김민예숙, 강문순 역, 『모성의 재생산』 (서울: 한국심리치료 연구소, 2008)
Freud, S. Über die Psychogenese eines Falles von Weiblicher Homosexualität,(1920a), 김명희역, 『여자 동성애가 되는 심리』 (서울:열린책, 1996)
--------, Hemmung, Symptom und Angst,(1926d), 황보석 역 『억제, 증상 그리고 불안』(서울:열린책, 1997)
--------, Hysterische Phantasien und ihre Beziehung zur Bisexualität(1908) 황보석 역, 『히스테리 성환상과 양성소질에 관계』(서울:열린책, 1997)
--------,Über einige neurotische Mechanismen bei Eifersucht, Paranoia und Homosexualitä(1922[1921]) 황보석 역, 『질투, 편집증, 동성애의 몇가지 신경증적 메커니즘』 (서울:열린책, 1997)
--------, 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1910), 정장진역, 『레오나 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서울: 열린책, 1998)
--------, On Narcissism: An Introduction(1914). trans. by James Strachey, v. 14. (London: The Hogarth Press, 1973)
Freud, S. 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1905). trans. by James Strachey, v. 7. (London: The Hogarth Pres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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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y, Peter 정영목 역, 『프로이트 2,(2006)』(서울:교양인, 2011)
Lacan, J.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Ⅺ, Translated by Alan Sheridan (U.S.A: Norton, 1998)
Lacan, J. Encore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ⅩⅩ Edited by Jacques-Alain Miller Translated by Notes by Bruce Fink.(New York, Norton, 1998)
Meissner, W.W. 『편집증과 심리치료(1986)』, 이재훈 역,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1998)
Norman, Richard. The Moral Philosophers(1983), 안상현 역, 『윤리학 강의』 (서울:문원1994)
Reich, Wilhelm. Die sexuelle Revolution, (1966) 윤종수 역, 성혁명, (서울, 새길, 2000)
solé, Jadques. 이종민 역, 성애의 사회사 [1976] (서울: 동문선, 2001)
http://comic.naver.com/challenge/detail.nhn?titleId=628882&no=1, 동성애자의 양심고백 ‘김정현’
A Picture, Brokeback Mountain(2005) 감독: 이안(Ang Lee)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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