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예수의 생명운동, 하나님의 정치경제인 ‘생명경제’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728x90
반응형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 / 김용복 박사(전 한일장신대 총장)

 

2014년 11월 13일 기사

  

한일장신대학교와 21세기기독교사회문화아카데미가 지난 11월 6일부터 8일까지 ‘협동종합시대 한국 교회의 선교방향’을 주제로 추계 공동학술대회를 진행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한국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주제로 기조발제를 진행한 전 한일장신대 총장 김용복 박사의 주장을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 주>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한국 교회의 선교적 과제-생명경제에 대한 경전적 고찰>

생명은 모든 생명체의 삶과 실림을 포괄하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개념이다. 생명경제란 모든 생명체가 함께 살리고 살아가는 “살림살이”로 규정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생명의 집을 경영(Oikonomia=Oikos+Nomos)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전통에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하여 경(經)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을 가진다. 현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정치경제(政治經濟)를 의미한다.

성경은 본래 아시아 종교의 경이었다. 성경은 아시아의 문명권에서 아시아의 언어로 아시아의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쓰여 진 책이었으나 희랍철학과 로마문화의 여향을 받게 되었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서양의 책처럼 오해되고 서양의 문화적 배경에서 해석되었다. 본래부터 성경은 아시아의 책이다. 성경책의 아사아적 정체성은 아시아의 생명문화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된다. 성경의 생명관은 아시아의 생명관과 문화적 궤도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예수운동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할 것이다. 예수는 본래 아시아민중으로서 서방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저항하는 운동을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히브리성경과 초대 기독교의 경전을 예수운동을 초점으로 하여 읽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와 로마제국과의 대립적 관계를 틀로 잡는 것은 오늘 우리민중이 지구화된 시장과 지구적 제국에 대응할 수 있는 생명의 정치경제를 모색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가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개한 복음선포운동, 생명운동을 오늘의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실현하려는 것이다.

예수의 생명운동이 죽임과 파괴의 체제인 로마제국(Pax Romana)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질서를 창출하기 위하여 전개 되었다. 오늘의 우리는 이 시대에 새로운 생명질서의 비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예수는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운동을 전개한다. 예수는 창조질서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新天新地의 창조이다. 희년이나 안식년은 복고적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미래의 창조이다. 신 안식년, 신 희년의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옛날 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새 생명과 새 생명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인간이 새롭게 창조(태어남)됨을 역설한다. 그래야만 영원한 생명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은 예수의 새 계약을 맺는 운동으로 연결된다. 이 새 계약은 새 계명(New Commandment)을 의미한다. 이것이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담보한다. 초대 신앙공동체는 예수의 생명운동, 영원한 생명운동을 새로운 창조 질서 새 생명의 질서로 인식하였다.

 

 

 

# 예수의 생명경제 구성

경제 즉 살림살이(살리고 사는 생명)는 성경에 친숙한 말이다. 예수와의 관련 속에서 말한다면 임마누엘(Emmanuel)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살림살이를 하신다.)에서 “하나님의 경치경제”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와 살림살이를 경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요한복음 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표현되어 있다.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사역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죽었다가 부활한 사건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생명의 정치경제를 꾸려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살림살이는 생명을 살리고 생명이 살며 생명이 풍요롭게 성취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히브리 성경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것이며 동시에 이사상은 초대교회가 이어 받는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같이 거하며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 생명경제, 생명의 정치경제의 기본구성이다.

 


# 희년의 정치경제는 생명경제

예수는 희년의 정치경제를 복음 선포의 핵심으로 삼았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장 18~19절). 이것이 예수의 생명운동, 생명경제운동의 헌장(Charter of Zoe Economy)이다. 마태 6장의 주기도문원문을 상고하면 희년이 경제적 기도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사회경제적 안전) 우리의 빚은 탕감하여 주옵소서(희년)”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희년의 근거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의식주 문제의 핵심적 요소가 되는 것이 생명경제의 원론이다. 마태 6장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식, 의, 주 문제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할 것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희년의 정치경제는 만나의 법칙을 내포하고 있다. 이 법칙은 예수의 떡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의 굶주린 민중을 먹이는 기적과 직결된다. 그리고 초대 예수공동체(사도행전)의 “나눔의 경제”와도 연결된다. 하나님에 대한 경제적 신뢰와 나눔의 법칙은 생명경제의 핵심적 내용이다.

만나의 법칙은 분배의 법칙 중에서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건은 추상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공동체이 생명질서를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가령 분배에 있어서 평등분배라든지, 업적에 기준 한다든지, 또는 필요에 의한 분배를 한다든지 하는 원칙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곧 생명질서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동체에서 가장 포관적인 정의, 약자중심의 정의, 어떠한 탐용도 허용하지 않는 정의를 실현하신다. 이것이 나눔의 원칙이다. 여기서 모든 생명체는 그 공동체의 주체임으로 나눔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자선사업과 같이 힘이 있고 돈이 있는 자의 배려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의 참여를 보장하는 분이다.

희년의 배경은 또 안식년이다. 안식년은 노예노동을 해방하는 것이다. 안식은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착취하고 과다노동을 통하여 탈취하는 고역(Toiling)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안식년의 법은 바로 밑에서 고역 하던 노예들의 해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근대의 지구화는 아프리카나 여타지역에서 노예매매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그대 산업체제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고역하게 하는 역사로 연속되고 있다. 오늘 지구화의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은 노예노동과 같은 고역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희년의 정치경제는 토지의 분배와 개혁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토지와 모든 재화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대지주라는 뜻이 아니고 역으로 어떤 인간도 토지를 사유하여 하나님의 생명경제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이다.

토지의 국유개념, 토지의 공 개념, 토지의 사유개념은 토지의 소유개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토지는 시장화 되고 산업화되고 토지는 객체화되었다. 오늘 지구시장은 토지를 시장에 완전 종속시키고 시장의 목적에 따라서 상품화하고 있다. 희년의 토지 개념은 토지는 어떤 경우에도 한 지역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나 국가적 소유주, 기업적 소유주, 개인적 소유주이게 이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토지이전이 곧 그 공동체의 생명질서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오늘 지구화의 과정에서 토지는 세계적으로 거래되고 모든 규제는 풀려 토지가 시장에서 매매된다.

성경에서는 땅의 안식이 중요하다. 토지는 그 지력을 회복하는 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본래 토지를 분배받은 경작자라 할지라도 휴경을 통하여 토지의 지력, 생명력을 회복하여야 한다. 토지를 과용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 토지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토지의 인식이요 희년의 법칙이요 생명경제의 기본원칙이다.

성경에서 모든 생명체는 주체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와 영원한 계약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인간, 동물, 식물, 미생물 등 그리고 땅 자체가 있는 주체이다. 인간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소유 또는 사유하고 객체화하여 인위적 조작하고 파괴하고 죽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질서에 위배된다. 하나님의 생명질서의 공산성, 상생성을 존중해야 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하나님의 생명질서, 하나님의 생명경제는 인간의 영욕을 위하여 소유되고 거래되고 인위적으로 조작되고 파괴될 수 없다. 오늘 소위 생명윤리는 생명과학을 통하여 생명체를 축소 주의적으로 연구하고, 생명공학을 통하여 생명체를 통제하며 조작하며, 생명산업을 통하여 생명체를 사유화하고 상품화하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생명윤리는 생명과학, 생명공학, 생명산업의 공리성과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생명을 시장화 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 예수의 생명운동 전개

예수는 성전경제에 대하여 강력한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다. 유대교는 본래 희년정신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종교운동이어야 했다. 그러나 성전과 유대교는 재국의 질서에 편입되고 시장질서에 편입되어 “도둑의 소굴”로 전락하였다.

유대교성전경제는 고가의 장식품으로 치장된 성전건축과 그 운영은 돈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고 유전자는 칭송의 대상이었고 무전자는 천대받았다. 예수는 이런 성전경제를 심판하였다. 특히 예수는 성전의 용품을 거래하는 상행위(시장)와 금전교환(외환시장)을 맹렬히 공격하고 직접 행동으로 철거하였다. 예수에게는 유대교성전이 희년의 정치경제의 모형이 되었어야 했다. 초 대기독교신앙공동체는 희년의 정치경제를 실현하려는 운동이었다.

예수는 로마의 정치경제에 대하여 궁극적인 대응을 하였다. 로마의 지배와 경제적인 착취는 하나님의 정치경제에 대치됨을 명시하였다. 로마의 수탈적인 세금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치경제와 대조 시켰다(마태 22장 19절~). 결국 식민지 수탈과 민중의 희생을토대로 한 로마의 정치경제를 부정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제국무역과 상거래를 혹독히 심(비)판하였다.(계 18장 12절~132절) 메시아 정치에서의 생명질서와 대조시켰다(계21장 1절~5절; 22장).

예수는 하나님의 정치경제와 절대화된 제국의 정치경제를 대립시킨다. 예수운동에 속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맘몬은 금권지상주의로서 생명의 희생을 발판으로 하여 형성된 정치경제질서, 즉 희생의 정치경제이다. 하나님의 정치경제는 생명의 정치경제인 것이다.

오늘 지구화나 제국체제하에서 모든 생명체는 객체화되고 상품화되고 있다. 세계시장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그 지배체제(IMF, World Bank, G-7)를 구축하고 모든 생물체의 생명을 위협하고 희생시키는 전체주의 체제를 가추고 있다. 이것은 맘몬의 체제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생명운동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예수는 생명창조에 참여하였다고 요한은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운동의 근원에 관한 증언이며 생명행동(삶)의 태극이다. 예수는 말씀으로 참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 역시 생명창조의 파격적인 차원에 대한 증언이다.

예수, 생명의 창조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친숙했던 창조론을 반추하게 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생명질서의 궁극(태극)이지 일회적인 시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의 생물학적, 생명 과학적, 생태학적 시작이라고 혼동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왜냐하면 성경의 창조론을 생물학, 생명과학의 교과서처럼 읽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조는 카이로스적 사건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고 통합하는 사건이다. 즉 성경의 창조질서는 죽임과 파괴의 질서, 즉 흑암의 질서와 대립된다. 하나님은 흑암과 혼돈의 “질서”를 극복하고, 생명의 질서를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론과 로마제국과 같은 흑암과 혼돈의 질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토대로 한 생명의 질서를 창조하신 것이다. 이 창조사건은 태극적 사건이다. 말씀(로고스)으로서의 예수의 창조행위는 바로 죽음과 흑암의 질서를 극복하고 생명의 질서를 창조한 것이다.

 

 

 

이 창조질서는 우선 생명의 정원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 생명의 정원에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상생하고 공생할 수 있도록 생명질서를 정하셨다. 첫째로 이 생명질서는 하나님의 법(정의)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임으로 인간은 그 한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생명의 동산의 핵심에 “지혜의 나무(Tree ofKnowledge)를 심으시고 인간이 이에 접근하는 것을 금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이 금기를 어겼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생명질서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창조된 생명질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정복”과 “보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1장28절에는 정복하라(Subdue and Dominion over)는 단어, 창세기 2장15절에는 옷입히고(Dress=Serve) 보전하라(Keep+Guard)는 단어를 써서 인간과 자연의 질서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창세기의 가르침은 서구신학이 서구 근대과학과 기술체제의 태도와 방법을 긍정하게 하는 데 이르게 하였다. 서구신학은 인간이 자연을 객과화(인식논적인 지배)하고 탈취하며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여 주었다. 이것은 서구기독교가 제국체제 속에서 살아오면서 “정복적 태도”를 합리한 데 그 원이니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상생적이고 공생적인 아시아적 생명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여 창조질서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맥락에서는 쉽게 창조질서란 인간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보살피고 가꾸어 공존공생 공영하여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정치경제는 모든 생명체의 공생, 공영의 질서를 내포한다.

창조질서는 계약질서이다. 하나님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충만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약속하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Torah)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계약관계는 인간뿐 아니라 땅과 모든 살아있는 존재와 맺은 것이다. 창세기 9장에서는 하나님은 땅과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과 다시 계약과계에 들어간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하나님이 땅과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계약의 파트너(동반자)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과 더불어 주체적인 존재로 계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정치경제는 모든 생명체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질서를 내포한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땅>이 생명의 정원을 형성한다. 땅은 우주의 중심이다. 우주는 생명의 집이다. 땅이 생명의 정원인 것처럼 우주는 생명의 집이다. 하나님은 땅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땅과 약속을 하셨다. 무지개는 그 징표이다. 땅은 생명의 정원이요 우주는 생명의 집인데 모든 생명체는 여기서 풍만함을 누린다.

생명경제는 땅과 우주는 생명체임을 전제한 정치경제이다. 땅을 죽은 것으로 취급하거나 땅을 죽이고 파괴하는 생명경제는 있을 수 없다. 여기 앞이 이야기 된 땅의 안식(Sabbathof the Land)이 쉽게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땅은 그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다. 생명체는 땅의 도움을 받을 뿐이다.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장은 하나님은 땅과 계약을 맺어 그 어떤 인간도 땅을 소유물로 할 수 없도록 한다는 뜻이다.

땅의 소출은 인간과 모든 생명체의 공동작품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가 공생, 공영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고 받아야 한다. 이것이 모든 생명체의 번영의 비결이다. 따라서 땅의 회복, 지역공동체의 재생, 사회경제적 안전의 재건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정치경제의 구조적인 틀이었다. 땅이 살고 땅이 해방되어야 생명경제는 이루어진다.

 


<Copyright데오스앤로고스 / 무단 복제 및 전재,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