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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신학과 신앙의 미숙함이 기독교의 ‘배타성’ 부각시켜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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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 “배타의 기독교에서 배려의 기독교로 바뀌어야” 

 

2014년 4월 기사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성은 분명히 신학적, 신앙적 미숙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미숙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배타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배려의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최근 울산기윤실에서 개최한 포럼에 강사로 참여했던 기윤실 정직윤리운동본부장 신동식 목사(빛과소금교회)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 배타성:배타와 배려 사이’라는 강의를 통해 기독교가 사회나 타종교로부터 배타적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는 미숙한 신앙과 공격적 선교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즉,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게 신앙을 표현해야 하지만 미숙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사회나 타종교인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이 크게 부각됐고, 하나님의 나라를 복음 선포와 삶의 실천으로 꾸준히 이루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힘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공격적 선교로 배타적인 종교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다양한 진리를 긍정하는 포스트모던 시대, 복잡한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더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보다 지혜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표현해야 하지만 신학적, 신앙적 미숙함으로 기독교가 이른바 ‘동네북’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신 목사는 “이제 배타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배려의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며 “배려는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거나 마음을 써서 보살펴 주는 것이다. 다종교사회에서 기독교는 보다 지혜롭게 공격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내하고 배려하면서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 기독교는 배타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타종교에 정말 배타적인 종교일까? 아니면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배타적이라고 비춰지고 있는 것인가? ‘배타’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반대하여 물리치다’이다. 이 말 대로라면 기독교는 타종교를 반대해 물리치는 집단이라는 의미가 있다. 정말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말인가?

신 목사는 “만약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를 배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 정의나 복지 부분에서 타종교와 연합된 일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타종교인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 목사는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구원관이 타종교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를 향한 타종교의 배타성은 구원론의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기독교 배타성에 대한 논의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 극에 달았다는 것이 신 목사의 주장이다. 당시 가장 많이 논의됐던 것이 바로 ‘종교 편향성’의 문제였다. 신 목사는 “장로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나타난 정부의 편향적 시각을 참지 못했던 타종교인, 특히 불교계가 목숨 걸고 투쟁하면서 기독교의 편향성과 배타성이 크게 부각됐다”고 설명했다.

결국 오늘날 기독교의 배타성은 종교적 편향성 문제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신 목사에 따르면 불교인들이 화가 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 홀대 받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공룡이 된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 즉 ‘성시화운동’에 대한 불편함이다.

 

 

불교인으로 알려진 길희성 교수(서강대 명예교수)는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해 “가톨릭과 개신교 할 것 없이 기독교의 배타성의 근본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화하여 하나님 자신의 위치에 올려놓은 데서 비롯된다”며 “한국 기독교 특유의 배타성은 여기에 더하여 교회의 풍부한 신학 전통과 영성을 무시한 편협한 문자주의적 성서신앙과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대속신앙에서 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수 자신의 신앙이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신 목사는 “기독교는 이와 같이 타종교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한 문제에 분명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 미숙한 신앙이 성시화 운동의 의미 못살려

그렇다면 기독교는 배타적이지 않는데 왜 배타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배타적이지 않은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미숙한 신앙 때문이다.

신 목사는 “미숙함은 자칫 무례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성경의 가르침처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나타내어야 하는데 미숙함으로 다른 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사회는 다종교사회로서 오랜 시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서로 부딪히지 않고, 자신들의 가르침에 충실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독교와 타종교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신 목사는 지혜의 부족함, 미숙한 신앙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신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이다.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그러한 순교의 열매가 있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선한 일을 하여도 미숙하면 오히려 독이 될 때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개적인 ‘성시화 운동’이다. 성시화 운동의 본질을 설명하기도 전에 교회 밖의 사람들은 기독교 제국을 만드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는 것. 타종교인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입장을 종교전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더구나 정치인들은 성시화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시 봉헌 발언은 타종교인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신 목사는 “성시화가 기독교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다종교사회에서 전쟁선포와도 같다. 그것이 아니고 건강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여기에는 모든 종교와 시민단체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미숙한 신앙으로 권력과 결탁하여 일을 저지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배타성은 극에 다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거룩한 도시는 선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일하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 불편과 거룩한 삶이 실천되어질 때 이우러지는 것”이라며 미숙한 신학과 신앙의 모습이 기독교를 부끄러운 종교로 만든 것이라고 진단했다.

 

 

# 공격적 선교로 하나님 나라 만든다?

기독교를 배타적으로 만든 또 한 가지 원인은 바로 공격적 선교다. 신 목사에 따르면 공격적 신앙은 미숙한 신앙에서 나온 열매와도 같다.

신 목사는 “성경은 지상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투는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오해한 이들이 종종 칼을 통해 교회를 세우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서구의 십자가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들의 부를 착복했던 참으로 수치스러운 역사다. 여기에서 외형적 권력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가진 자만함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신 목사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한국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이것은 국내의 모습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잘못된 종말론적 신앙도 한 몫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본다면 훼불 사건과 봉은사 땅 밟기 사건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젊은이들의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알게 모르게 만연되어 있는 기독교의 오만함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선포와 삶의 실천으로 작지만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격적 신앙은 모든 것을 힘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 목사는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분명히 다르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에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이 종종 발견되면서 기독교는 배타적인 종교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배려적인 기독교로

그렇다면 미숙하고 공경적 선교의 무지함을 걷어내고 배타적 기독교에서 배려적 기독교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신 목사는 △다종교사회를 인정할 것 △교리적 차이를 인정할 것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선교활동 전개 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신 목사는 “다종교사회를 인정하자는 것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종교전쟁만 남게 된다”고 설명했다.

한 공간에서 다종교인들이 살아가는 것을 우선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인격적인 관계는 필수적이다. 타종교에 대해 기독교는 인격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신 목사는 “다원적 상황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적 교양을 갖을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에 가장 합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누룩과 같이 퍼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교리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실 모든 종교는 자신들만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무시되면 더 이상 독립된 종교로서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교리적 차이를 바로 아는 것이 배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 목사는 “배타성의 문제에 있어서 서로의 교리적 차이를 인정하고 진리에 대한 인격적 나눔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며 “다종교 사회에서 서로가 공존하는 길은 서로의 교리를 인정하고, 진리에 대하여 인격적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인격적 선교’도 반드시 필요하다. 신 목사는 바울의 선교적 모습을 예를 들었다. 바울은 결코 공격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 다종교사회였던 아테네에서 바울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지만 우상을 훼손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주장을 말하며 토론했다. 복음의 진리를 매우 인격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면서 회심자도 얻었다.

신 목사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기독교적인 진리가 분명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다종교 사회에 사는 이들과 진리에 대하여 토론 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인은 누구보다도 인격적인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진리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배타성은 신학적, 신앙적 미숙함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의 미숙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회, 다종교사회에서 기독교는 동네북이 아니라 삶의 나침반이 되기 위해 바른 제사를 가져야 한다.

신 목사는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임을 다시금 생각한다면 다 종교 사회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배려심을 잘 나타내는 일이다. 공격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내하며 배려하면서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며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배려적인 기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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