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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성경과 신학

동물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동물도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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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용 교수, 한국구약학회 학술대회서 ‘신학적 동물학에 대한 소고’ 연구논문 발표

 

2015년 4월 21일 기사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인간이 차지하는 자리와 동물이 차지하는 자리는 어디일까?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성을 지니듯 동물들도 하나님과 관계성을 지니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관계성은 어떻게 정의될까?

 

동물,
지배 대상인가? 희생 대상인가?

 

구자용 교수(평택대)는 “동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되지만 동물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의심하며, 또 한낱 동물은 인간 지배의 대상이며, 인간을 위한 일방적인 희생의 대상일 뿐이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물을 지배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구 교수는 “동물은 단지 노획의 대상일 뿐이지 않다. 소나 양, 돼지가 인간의 먹을 것으로 허용됐지만 동물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육과 도축, 혹은 어떤 사정에 의한 처분을 하는 행위, 또한 온갖 동물들을 한탄 구경거리로 만들어서 동물들의 삶을 제한하고, 고통을 주며, 동물들이 살아가는 서식지를 고려 없이 침탈하는 것이 인간의 다스림 혹은 지배 하에 동물들이 위치한다는 일면적 창조의 질서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이러한 왜곡된 시각은 이제 바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동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 줌으로써 종교적인 맹신에서 비롯되는 동물과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남용과 거기서 비롯되는 위험성을 해결하고, 미래에 대한 고려가 없는 무분별한 개발과 인간의 유익만을 위해 동물들을 학대하며, 경제성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산업 경영의 생산 방식으로 인해 초래된 많은 부작용들에 대해 반성하게 하고, 새로운 친환경적인 대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신학적 동물학
동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구자용 교수는 한국구약학회(회장:차준희 교수, 한세대)가 지난 4월 17일 서울신대에서 개최한 ‘제98차 춘계학술대회’에 발제자로 나서 ‘야웨, 동물의 주:신학적 동물학에 대한 소고’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구 교수에 따르면 ‘신학적 동물학’이라는 것은 일반 동물학뿐 아니라 신학에서도 낯선 개념이다. 신학적 동물학은 단순히 이야기한다면 신학적 동물학은 신과 인간, 그리고 동물의 관계 설정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다.

구 교수는 “신학적 동물학에 대한 연구는 외국에서는 이미 제 궤도에 올랐지만 우리나는 2000년대에 들어 가톨릭을 필두로 비로소 학술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됐다”며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부설기관인 ‘한국교회환경연구소’가 지난 2011년 ‘그리스도의 고난, 피조물의 탄식’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생태신학세미나에서 중요한 신학사상과 동물윤리에 대한 각성을 심어주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생태신학세미나에서는 인간 외에 자연도 구원을 열망하는 피조물의 한 부분임을 고백한다면 더 이상 인간의 욕구총족만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거나 자연의 고유한 존엄성을 짓밟을 수 없다는 것과 자연을 착취하거나 자연의 고유한 존엄성을 짓밟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 깃든 평화를 깨뜨리는 비신앙적 행위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윤리적, 양심적 차원 아닌
동물을 향한 하나님 말씀 기억해야


또한 창조설화의 식물과 동물, 인간의 창조 묘사는 생태계를 먹이사슬이 아닌 공존의 창조세계로 이해해야 하며,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아닌 동물의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구 교수는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신학적 동물학이 동물 보호나 동물에 대해 취해야 할 인간의 윤리적 관심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며 “구약의 창조신학과 지혜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동물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동물에 대한 보호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적 태도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특히 “동물이 단순히 인간의 착취의 대상으로만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사상은 구약의 여러 본문들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며 “동물이 차지하고 있는 창조세계 내에서의 위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정립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약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동물에 관계된 본문들에 대해 성서신학적인 면에 대한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아래는 구 교수가 발표한 ‘야웨, 동물의 주:신학적 동물학에 대한 소고’라는 연구논문의 주된 내용이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동물들과 관련된 본문들 중에서 특별히 그들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성을 서술하는 곳과 또한 동물들이 가지는 관계성을 말하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신학적 동물학에 관한 관심을 촉구했다.

 


# 인간과 더불어 지음을 받은 동물

사람과 동물 그리고 식물 사이에 설정된 관계성은 선행하는 단락과 비교할 때 창세기 1장 29-30절에서 사람과 ‘동물’에게 주어진 먹거리에 관한 하나님의 선포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29절의 첫 머리는 앞서 살핀 단락들의 첫 시작 부분과 동일하게 도입 형식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아마도 사람의 창조에 대한 서술인 1장 26-28절과 구분된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물과 인간,
같은날 함께 창조됐다.

 

이 단락에서 하나님은 먼저 ‘너희에게’(라켐), 즉 사람에게, 그 다음에 새와 기는 것들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러콜-하야트 하아레츠)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특히 ‘내가 주다’(나타티)라는 동사가 두 절 모두에 동일하게 사용되며, 사람과 동물에게 각각 주어지는 ‘먹을 것’에 대해 종류의 차이, 즉 ‘씨 맺는 식물(에쉐브 조레아 자라)과 씨 맺는 과실수(하에츠 아쉐르-보 퍼리-에츠 조레아 자라)의 한편은 사람에게, 모든 푸른 풀(콜-예레크 에쎄브)의 다른 한편은 동물에게’란 차이 외에 질적인 차이를 말할 수 없다면, 이 단락에서는 사람과 동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먹을 것’을 공평하게 혹은 각자에게 적절한 것으로 받고 있음을 서술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사람과 동물의 관계성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창세기 2장이 보여주는 창조의 모습은 1장과는 사뭇 다르다. 2장에서는 확실히 사람이 창조의 중심에 서 있으나, 사람 창조 서술에 더불어 언급되는 동물 창조에 대한 설명에도 확실히 주목할 만한 면이 있다. 7절에 있는 사람 창조에 대한 묘사와 19절에 있는 동물 창조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둘 모두에 ‘짓다’(야차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동물과 사람을 짓는 재료가 동일하게 ‘땅으로부터’(민-하아다마)의 무엇이다. 더 주목할만한 것은 창조 행위의 결과로 생겨난 존재를 표시하는 단어가 사람과 동물 사이에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특히 창 2장 19절에서 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3장 20절에서 아담이 그의 아내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사건에 대한 설명과 관련하여 볼 때 독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지배권을 소유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서로 간의 친밀감이 형성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를 드러내고자 함에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이 보여 주는 동물 창조는 비록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창조하는 맥락에서 등장하며, 거기에 동물이 사람에 대해서 갖는 관계성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름 부여’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동물이 확실히 사람에게 매우 친밀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돕는 배필’의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로 지어진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동물

인간과 더불어 지어진 동물은 하나님께 어떤 돌봄을 받고 있는가? 성경의 여러 곳에서의 표현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 역시도 하나님이 세심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임을 보여준다. 그 돌봄은 인간과 동등하게 혹은 인간을 통해 그리고 인간과는 별개로 이루어지고 있다.

창세기 6장 19-22절은 온 세상에 대한 홍수 심판의 진행 과정에서 동물이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동등한 돌봄을 받고 있음을 알려준다. 노아가 사람을 대표하듯 모든 동물의 ‘둘’(쉐나임)이 노아와 함께 ‘생존하도록’(러하하요트 잍타크) 방주에 들여 보내졌다. 특히 21절의 방주 안에서 소용될 양식을 준비케 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이 동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면에서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세상의 양식,
사람과 동물을 위한 섭리
동물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

 

양식에 대한 준비와 저장은 사람이 담당할 몫이나, 그 양식은 결국 ‘너와 그들’, 즉 사람과 동물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이 점에서 방주에 함께 들여보내진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봄은, 특히 사람을 통해 동물에게 ‘먹을 것’을 배려하는 하나님임을 확인시켜 준다.

창 9장 8절 이하는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10절 이하의 서술을 보면, 언약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 이후의 자손들과만 체결될 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과도 체결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은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육체가 다시는 홍수로 진멸되지 않을 것이란 약속이다.

창세기 6장과 9장을 종합해 보면, 사람과 동물의 관계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6장에서 동물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과 동등한 구원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을 통해 먹을 것을 공급받는 존재였다. 둘째, 9장에서 동물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같게 되었고, 조금은 난해하지만 사람에게 먹을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동물을 피가 있는 채먹지 말 것에 대해 금지함으로써 동물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는 다시 홍수 이후의 언약에서 동물들이 사람과 동등한 언약의 대상자가 된다는 사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동물을 돌보시는 하나님

 

시편 104편은 양식상으로 분류할 때, ‘찬양시’에 속한다. 시인은 5~9절에서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갖는 면모를 ‘물’과 관련해 표현한다.

여기에서도 동물을 돌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동물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위들로 묘사된다. 즉, 골짜기에서 솟아난 그 ‘샘’(마으야님)을 산 사이에 ‘흐르게 하자’(10절, 벤 하림 예할레쿤), 그 물을 들의 ‘모든 살아있는 것’(콜-하예토 싸다이)들이 마시고, 그 물로 들나귀가 그 목마름을 해갈한다.

즉, 하나님이 보내는 물은 동물들이 마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물의 공급원이 된다. 그리고 13절에서 역시 분사 구문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묘사인 ‘그의 누각에서 산에 물을 부어주심’(마쉬케 하림 메알리요타브)은, 시인이 직접 화법으로 표현한 ‘당신의 행위에 대한 결실로부터’(밒페리 마아세카) 주어진 상태인 ‘땅이 만족하다’로 연결된다.

이 ‘땅이 만족하다’라는 개념은 다시 14절 이하에서 사람과 동물에게 골고루 분배되고 적용되는 양식(14-15절)과 거처(16-18절) 그리고 시간(19-23절)의 세 측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서술된다. 27절 이하를 보면, 비단 공급뿐 아니라 취하심도 사람과 동물 사이에서 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편 104편은 창조주이시며, 자신의 창조물을 보존하고 돌보는 하나님, 그리고 사람과 동물을 동일하게 돌보는 하나님의 모습을 찬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시편 50편 10-11절과 시편 147편 9절 등은 사람과는 별개로 동물이 하나님에게 귀속된 존재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돌본다는 사실을 서술한다.

먼저 시편 50편 10-11절을 보면, ‘삼림의 모든 짐승’(콜-하예토-야아르)과 ‘하나님의 산의 동물들(버헤모트 버하르레-엘)16)이 ‘내게’(리), 즉 하나님에게 속하였음을 노래한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이 ‘산들의 모든 새’(콜-오프 하림)를 알며, ‘들의 짐승/곤충’(지즈 싸다이)17)이 그와 함께 있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이 동물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시편 147편 9절은 여호와가 들짐승에게 그들의 먹을 것을 주고,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는 까마귀의 새끼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분임을 분사 구문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동물들을 먹이고 기르는 여호와의 모습과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 인간의 경쟁 상대로서의 동물

인간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동물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초하면, 예언서에서의 몇몇 서술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 경쟁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아모스 7장 1-2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지으신 메뚜기는 인간에게 ‘양식의 경쟁자’23)이며, 인간에게 재앙이 된다.

 

동물과 경쟁하는 세계


이사야 13장은 바벨론에 대한 예언(맛사 바벨)을 기록하고 있다. 9a절은 특히 바벨론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욤-야웨)을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바 아크자리 버에브라 바하론 아프)로 규정하고, 그 날이 임하는 결과를 9b절에서 ‘그 땅이 황폐함 가운데 처하게 함’(라숨 하아레츠 러샴마) 그리고 ‘그 땅의 죄인들을 그곳으로부터 진멸하여 없애기 위함’(하타에이하 야쉬미드 밈멘나)이라고 말한다.

그 심판의 결과는 20a절과 21-22절의 대비를 통해 특징적으로 표현되는데, 곧 ‘인간 거주민이 물러감’과 ‘동물들이 그 곳(샴)을 대신 차지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을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동물들은 들짐승(치이임), 광야에서 울부짖는 동물들(오힘), 타조(버노트 야아나), 들양(써이림), 승냥이(이이임), 들개(탄님)로 다양하며,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 세계와 동떨어져 서식하는 야생적 동물들이란 사실이다. 이것을 통해 동물은 심판을 통해 인간이 물러간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하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심판과 연관하여 땅에서 사람을 내쫓고, 대신 동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함은 이스라엘 자신을 향해 적용되기도 하고, 반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의 압제자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예레미야 50장 39절은 이스라엘을 사로잡은 자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땅을 사막의 들짐승과 승냥이 그리고 타조에게 돌리시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호세아 2장 14-15절은 황폐해져서 거친 들이 된 땅을 여호와가 다시 사람이 안전히 거주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말하고 있다.

예언서를 중심으로 살펴 본 위의 본문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과 동물은 땅이라는 삶의 터전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하는 존재이다. 더구나 땅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결정되므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간과 동물은 동등한 존재이며, 경쟁 상대임을 알 수 있다.

 

 

# 인간이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동물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성을 탐구할 때에 욥기 12장 7절에서 욥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던지는 반어적 질문은 동물을 인간이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 흥미롭다. 욥의 말의 전후문맥을 자세히 살피면 조금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으나, 표면적으로 욥은 동물에게, 새에게 질문을 하여 배우라고 말한다.

 

동물, 지혜를 알려주는 존재


8절은 계속해서 만약 땅에게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면, 그것이 너를 가르칠 것이고, 바다의 물고기들이 너에게 자세히 설명할 것이라고 말한다. 계속되는 문맥 속에서 질문과 설명의 대상은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셨음’(9b절, 키 야드-야웨 아시타 조트)임을 알 수 있다.

즉, 의인으로서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에 대해 욥은 동물들에게 물어서 확인을 얻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음’(10절)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가진 그리고 목숨을 지닌 모든 생명체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사람의 판단과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무력화될 때, 동물의 지혜는 놀랍게도 인간의 지혜와 대등한 것으로 평가되든지, 혹은 오히려 뛰어난 것으로 제시된다. 욥기 12장 13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인간의 지혜가 신랄하게 비판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잠언 6장 6-8절은 ‘게으른 자’가 개미에게로 가서 그 개미의 삶의 방식(더라케하)과 지혜를 눈으로 보고 배워야함을 교훈하고 있다. 인간 세계와 같은 조직과 관리 체계가 없으나, 여름과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는 지혜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동물이 인간이 배우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는 본문은 이사야 1장 3절과 예레미야 8장 7절이 있다. 여기서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로 제시되는 동물들은 소, 나귀, 공중의 학, 산비둘기, 제비, 두루미이다.

# 신학적 동물학

신학적 동물학이 창조 세계에서 동물이 인간과 가지는 관계성 하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문제는 앞에서 살펴본 본문들을 통해서 새롭게 정립될 수 있다. 하나님이 ‘땅에 대한 지배권’(dominium terrae)을 인간에게 부여한 것으로 말미암아 인간 중심적으로 성립된 구도는 하나님, 인간, 동물의 수직적 종속관계로 대표된다.

그리고 동물은 인간이 존재하는 것을 위한 하나의 객체일 뿐 창조 세계에서의 주체가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세계 창조에 대한 서술들을 상세히 살펴보면, 창조의 구도에는 이러한 단순한 수직적 종속 관계만이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동물과 사람, 누가 우위인가?


하나님은 동물을 인간과 동일한 방법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의 옆 자리에 당당히 자리하게 하였다. 먹을 것을 공평하게 정하여 주었고, 언약의 대상으로 인정하였다. 동물의 주로서, 그들을 보살피는 하나님의 모습은 오히려 인간보다 동물들에게 더 친근한 모습으로 각인된다.

 

인간에 대한 심판의 맥락에서 인간을 내쫓고 그 땅을 동물들이 차지하게 한다. 하나님의 편에서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리는 동물들은 인간 세계를 비웃기까지 한다. 지혜문학에서 인간이 동물로부터 무엇인가 교훈을 얻어야 함을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어리석고 게으른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학적 동물학에서 추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동물의 관계성은 창조주 하나님을 정점으로 그 밑에 인간과 동물이 서로 동등한 관계성을 가지고 종속되어 있는 두 종류의 구도(표 2, 3)로 제시할 수 있다. 특히, 인간과 동물이 창조주 하나님에 피조물로서 동등한 관계성을 갖는 두 구도는 좀 더 세분하여, 인간에게 약간의 우위를 두는 구도와 동물에게 약간의 우위를 두는 구도로 나눌 수 있다.

신학적 동물학에 대한 관심과 목표는 결코 학문적인 논의에만 있지 않다. 오늘날 자연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관심과 노력이 신학적 논의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본래 창조의 질서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동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물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의심하며, 또 한낱 동물은 인간 지배의 대상이며, 인간을 위한 일방적인 희생의 대상일 뿐이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동물은 단지 노획의 대상일 뿐이지 않다.

소나 양, 돼지가 인간의 먹을 것으로 허용되었지만, 동물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육과 도축, 혹은 어떤 사정에 의한 처분을 하는 행위, 또한 온갖 동물들을 한낱 구경거리로 만들어서 그들의 삶을 제한하고, 고통을 주며, 동물들이 살아가는 서식지를 고려 없이 침탈하는 것이 인간의 다스림 혹은 지배하에 동물들이 위치한다는 일면적 창조의 질서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이러한 왜곡된 시각은 이제 바로 수정되어야 한다.

동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 줌으로써, 종교적인 맹신에서 비롯되는 동물과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남용과 거기서 비롯되는 위험성을 해결하고, 미래에 대한 고려가 없는 무분별한 개발과 인간의 유익만을 위해 동물들을 학대하며, 경제성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산업 경영의 생산 방식으로 인해 초래된 많은 부작용들에 대해 반성하게 하고, 새로운 친환경적인 대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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