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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교회의 공적책임, 역량강화와 훈련이 필수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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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에 기반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 노영상 교수(장신대, 기독교윤리학)

 

 

 

# 공공신학의 주요 명제들


‘공공신학’이란 개념을 처음 쓴 학자는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벨라(Robert N. Bellah)로 추정된다.

 

그는 그의 논문, “Civil Religion in America”에서 초월적인 특정한 신앙들과는 구별된 시민 종교를 “사회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공적 종교”(a common public religion)로 부르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공공신학자, 스택하우스(Max Stachhuose)는 이 공공신학을 넓은 의미로서 정의한다.

 

그는 신학이 ‘공적’(public)이라고 불릴 수 있는 두 가지의 근거에 대해서 말한다. “첫째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우리는 비밀스런 집단이 아니며, 어떤 특권층도 아니고, 비합리적이지도 않고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이해되어질 수 있고 필요한 존재라고 믿는다. 우리는 힌두교도 및 불교도들과, 유대교인 및 회교도들과, 인문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합리적인 입장에서 논의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러한 신학은 공적인 삶의 구조와 정책으로 인도될 것이다. 공공신학은 본성적으로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공공신학의 네 자료 또는 근거(warrant)가 성경, 전승, 그리고 이성과 경험이라고 하였으며, 이것들을 근거로 하여 창조, 해방, 소명, 언약, 도덕법, 죄, 자유, 교회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의 주제(theme)들을 다루게 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독일의 공공신학자 중의 한 명인 몰트만(J. Moltmann)은, 공공신학(theologiapublica)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역사의 공적 세계 속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관심과 희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공공신학은 사회의 공적 문제들에 대한 신학의 공적 상관성을 강조한다.

공공신학은 시카고 학파와 더 연관성을 갖지만, 예일학파의 신학자들도 공공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예일학파의 티먼(Ronald F. Thiemann)은 공공신학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공공신학은 기독교적 확신과 기독교공동체가 살고 있는 더 넓은 사회 문화적인 맥락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것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벤(Robert Benne)은 이르기를, 공공신학은 신학이 “살아있는 종교적 전통의 공적인 환경인, 우리의 공동적 삶의 경제 정치 문화적인 영역에로의 침투를 말한다.”고 하였다. 공공신학은 종교와 사회가 구별되는 것이긴 하되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됨을 언급한다. 또한 공공신학은 하나의 종교적인 전통이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공적 맥락(public context)을 강조한다.

종교는 그 종교가 배태된 이전의 사회적 맥락을 무시할 수 없는 바, 오늘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 종교적 전통을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벤의 입장은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보다는 티먼의 입장과 더 유사성을 갖는다.공공신학은 신학과 윤리의 교차 부분에서 파생된 신학 분야로, 그것을 말하는 학자마다 그 정의가 다양한 편이나, 그 공통분모들을 묶어 대략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공공신학은 교회 내의 사람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 종교적 담론이 이해되고 확신되며 설득(persuasion)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의도된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공공신학은 과학적이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종교적 공동체뿐 아니라, 더 넓은 사회를 포괄하는 문제에 대해 진술한다. 세 번째로, 공공신학은 이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론에 있어 모든 것에 열려져 있는 바, 다양한 도구와 자료와 방법들을 채용하고 있다. 네 번째로, 이런 의미에서 공공신학자란 어떤 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설득력 있게 사회의 공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하며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 공공신학에 기반한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


교회의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을 다하려면, 그 의무에 대한 선언적 내용을 말함으로만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에 앞서 교회의 공적 책임을 위한 역량강화(empowerment)가 전제됨이 필요하다.

 

그 같은 교회의 역량강화를 위해 먼저 요청되는 것은 교회의 신학적 체질개선이다. 오늘 우리의 신학은 그간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해온 한국교회의 전통에 비해, 신학의 공공성을 너무 표피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반성해야 한다.

우리의 신학은 강력한 사회적 리더십을 갖기에는 협소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에 이러한 신학의 기본적 구조를 튼튼히 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공공신학과 그리고 교회의 사회 정책적 관여를 위한 사회 윤리적 고찰의 필요 등, 이 같은 공공신학에의 기본적인 논의들이 더 논구되어야 할 것임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무엇보다 교회가 사회에 대해 자신 있는 말을 하려면, 나름대로의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역량강화를 위해 요청되는 바는, 교회의 전반적인 체질개선이다. 교회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면, 먼저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 교회가 정의롭지 못하면서, 사회가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에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교회의 전반적 개혁과 함께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재정의 투명성, 교회선거 및 인선의 공정성, 사회봉사의 확대 등 사회 앞에 떳떳한 교회가 되었을 때만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보다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역량강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교회나 교인들의 교회 밖의 세상의 일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사회문제에 대한 주의 깊은 이해 또한 이를 위해 전제된다.

 

사회를 모르고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무지하다면, 그 같은 사회 문제들을 놓고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물론 오늘과 같은 분주한 시대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을 경청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검토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같은 서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길게 봐서는 더 시간을 절약하는 일이 될 것이라 본다.

이 같은 교회의 공공성은 그를 위한 교인들의 태도의 훈련을 요청한다. 자기 나름의 확실한 종교적 신념과 신앙심을 가지면서도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한 겸손함과 개방성 및 연대성을 동시에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태도는 자신의 것에 대한 확신과 자신이 없인 불가능한 것으로, 이를 위해 먼저 자신의 의견과 태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의 공공성을 위한 신자의 훈련은 단 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에 대한 꾸준한 훈련과 교육을 통해서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으로, 사회 문제에 대한 나름의 소신을 갖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용기 있게 교회 밖의 사람들과 논의를 해나갈 때, 우리 교회의 사회적 책임 수위가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 기독교윤리로서의 공적 윤리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교회라는 집단과 세속의 사회 사이에 윤리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길을 공공신학은 다루게 마련이다. 이제 그것을 위한 필자로서는 가장 타당할 것 같은 방법을 제시하며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오늘과 같이 각 문화와 전통의 상대성이 인정되는 시대에서, 자신의 주관적 한계를 넘어서서 상대성에 흔들리지 않는 윤리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된다.

이에 있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역적인 방법과 귀납적인 방법들이 그간 실험되어 왔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객관적인 윤리적 명령을 도출하여, 그것으로부터 여타의 모든 윤리적 규범들을 하나 하나 재단해 나가는 연역적인 방법이 오늘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 대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같은 노력의 방향을 칸트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에 의한 논의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 방향은 귀납적인 방법으로, 오늘의 다양한 논의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공동의 합의된 윤리적 원칙들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이 같은 서로간의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행 위에 따른 합의의 도출은, 철학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등에 의해 탐구된 방법으로, 우리는 그러한 대화의 원칙과 기술들을 이용하여 나름의 일치된 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과 같은 다양하고 상대적인 담론들이 판치는 시대에, 상대를 극복하는 객관적 실재에 연이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법론을 찾아내는 데에 있어, 고려해야할 문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만날 수 있는 공동의 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비기독교인과의 공동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구원론보다는 창조론을 통해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기독론과 함께 우주적 성령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일반은총에 대한 치밀한 탐구도 이러한 논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 기독교인 측에서 마련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이 있는 반면, 외부에서 마련할 수 있는 공동의 장도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여, 대화하는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우리가 동일한 인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많은 만남의 장들을 열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각 전통과 문화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윤리적 합의 문제에서 결론에 이를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일단 합의된 것들의 목록을 열거한 다음, 그와 함께 합의되지 못한 목록들을 열거하여 이후의 논의로 확실하게 남겨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러한 합의되지 못한 내용들이 합의된 내용에 미치는 영향과 전체적인 논의에 미치는 영향들이 분석된 후, 그런 대화의 유용성 문제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서로 윤리적인 대회와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그것의 이유를 밝혀 나중의 대화의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다. 윤리적 합의가 되었다면, 합의가 된 대로, 합의가 되지 않았다면 합의가 되지 않은 대로, 대화한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양 그룹은 서로 합의되지 못한 내용을 보고, 서로의 약점과 문제점들을 인식할 수도 있게 된다. 하우워어스(S. Hauerwas)가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세상과의 윤리적 견해의 차이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나름의 윤리적 공헌을 할 수 있음을 말한 바와 같이, 서로 합의할 수 없음이 나름의 큰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리적 대화의 합의점이 예상되지 않는다고 하여, 대화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윤리적 대화의 결과 서로의 상이점이 발견되어 다시 대화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야기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피차에 손해가 되기보다는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 위 내용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장신대 교회와사회연구원이 공동주최로 지난 2008년 10월6일 오후 7시 장신대 여전도회기념음악관 1층 연주실에서 ‘사회복지를 넘어 통합적 사회적 책임으로’를 주제로 개최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2.0 심포지엄 발제문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노영상, “공공신학에 기반한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 기윤실&교회와사회연구원 교회의 사회적 책임 2.0 심포지엄, 2008년 10월6일, 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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