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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개혁교회 신앙과 신학 위협하는 신사도운동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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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 영성과 개혁주의 / 최윤배 교수(장신대, 조직신학)

 

신사도 개혁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의 사상과 뼈대를 수립한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신사도 운동의 기원을 1906년 아주사 부흥(Azusa Rivival)으로 규정한다. 1900연말 저녁에 캔자스(Kansas)에 있는 토페카성서대학(Bible College in Topeka)의 학생들이 모여 송년집회를 가졌다.

여기서 찰스 폭스 펄햄(Charles Fox Farham)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안수기도를 부탁한 여학생 오즈맨(Agnes Ozman)에게 기도를 해주었는데, 오즈맨이 중국어 방언을 했다.

 

펄햄의 제자들 중에 한 명이었던 세이모어(William J. Seymour)라는 흑인 목사도 나중에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성령세례로서의 방언을 체험했다. 그 후 오즈맨과 세이모어에 의해서 시작된 현대 오순절(Pentecost, 펜테코스트) 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 기독교 영성


우리는 기독교역사와 신학에서 나타난 영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성서적 관점에서 여과시켜 수용하면서도, 모름지기 “기독교” 영성 또는 “기독교적” 영성의 초석으로서 네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론적인 기초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 영성의 삼위일체론적 관점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의 여러 관점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모든 시각들 중에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기독교 영성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특징을 가진다. “기독교 영성(christelijke spiritualiteit)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에 대한 훈련과 묵상이다.”

둘째, 기독교 영성은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은 “이제 올 영원한 세계를 바라봄 때문에 지금 있는 이 세계를 외면하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이 세상의 참된 존재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 한계를 바로 인식함으로써 이 세상을 바르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셋째, 기독교 영성은 모름지기 ‘기독교적’이 되려면, 기독론(그리스도론)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우리의 영성의 실체를 찾을 수 있음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열려진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롬5:1, 10-11, 고후5:18).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화목의 관계이다(롬8:14-16, 갈4:6).”

 

넷째, 기독교 영성은 피조세계의 모든 장(場)들(그리스도인, 교회, 인간, 가정, 국가, 역사, 환경, 생태, 자연, 우주 등)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결부되어 성령론적이어야 한다.

 

창조주와 섭리주 및 구속주 성령께서 인간, 가정, 국가, 역사, 생태, 자연과 우주 전체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해석과 선포와 적용과 실천을 가능케 하신다.

 

기독교 영성은 피조세계에 있는 모든 은사와 생명은 성령의 활동의 결과임을 인정하는 삶이며, 은혜로 비롯된 삶이며, 성서에 기초한 삶이고, 거룩한 교회와 성도의 교통으로서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 개혁주의 정의


‘개혁주의’ 또는 ‘개혁적’ (reformed; reformierte; 네덜란드어로 gereformeerd 또는 hervormd)이라는 일차적 의미는 ‘역사적(歷史的) 개혁신학(改革神學)’ 전통을 말한다.

 

역사적 개혁신학 전통은 세계 도처에 ‘개혁교회’ (the Reformed churches)와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es)라는 이름으로 약 500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6세기 ‘개혁파 종교개혁자들’ (Reformed reformers; 츠빙글리, 마르틴 부처, 깔뱅, 베자, 존 녹스 등)은 루터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을 비롯하여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사상을 공유하면서도 루터와 그의 전통을 잇는 루터교회 전통과 차이를 보였다.

개혁파 종교개혁신학은 후대 개혁파 정통주의신학(「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H. Bavinck, A. A. Hodge 등)과 개혁파 신정통주의신학(「바르멘 신학선언」, K. Barth, E. Brunner 등)을 거쳐 오늘날 현대 개혁신학전통(네덜란드의 A. A. van Ruler, G. C. Berkouwer, H. Berkhof, J. van Genderen, A. van de Beek, 남아프리카공화국의 A. Heyns, 독일의 J. Moltmann, M. Welker, O Weber, 체코의 J. Lochman, 영국 스코틀랜드의 T. F. Torrance, 미국의 C. van Til, D. L. Migliore, J. H. Leith, I. J. Hesselink 등)과, 한국개혁신학전통(예장통합의 이종성, 이수영, 김이태, 김명용, 김균진, 김영한, 기장의 박봉랑, 오영석, 예장합동의 박형룡, 김명혁, 길희성, 서철원, 조봉근, 권호덕, 이승구, 김재성, 예장 고신의 이근삼, 유해무 등)에까지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츠빙글리와 부처와 깔뱅으로부터 시작된 ‘개혁적’ 또는 ‘개혁신학적’ 전통은 깔뱅의 제자 베자(T. Beza)를 통해 유럽대륙에서는 ‘개혁교회’의 이름으로 발전하였고, 깔뱅의 제자 존 녹스를 통해 영국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장로교회’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장로교회는 주로 미국 남?북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등이 파송한 장로교회 선교사들로부터 ‘역사적 개혁신학’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런 전통이 우리나라에서는 ‘개혁주의’, ‘칼빈주의’ 등 다양하게 불리어 지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교단이나 학자에 따라 종교개혁신학이나 특정한 시대의 개혁신학 전통이나 특정한 학자의 개혁신학 사상에만 국한시켜 너무나도 좁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500년 역사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개혁교회의 신앙과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개혁된 교회(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개혁성과 개방성을 가진 명제를 신앙과 신학의 주요 원리와 정체성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 까지 올바른 개혁신앙과 올바른 개혁신학 전통에 대한 계승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구속사적 발전 속에서 개혁신학 전통을 올바르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럴 때 ‘개혁주의’ 또는 개혁신학 전통은 비로소 항상 “살아 있는 개혁신학 전통”이 될 것이다. 바빙크나 유해무는 자신들의 조직신학을『개혁교의학』으로 명명했다.

 

 

 

 

 

 

# 신사도 운동의 역사(歷史) 개요


신사도 개혁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의 사상과 뼈대를 수립한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신사도 운동의 기원을 1906년 아주사 부흥(Azusa Rivival)으로 규정한다. 1900연말 저녁에 캔자스(Kansas)에 있는 토페카성서대학(Bible College in Topeka)의 학생들이 모여 송년집회를 가졌다.

 

여기서 찰스 폭스 펄햄(Charles Fox Farham)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안수기도를 부탁한 여학생 오즈맨(Agnes Ozman)에게 기도를 해주었는데, 오즈맨이 중국어 방언을 했다. 펄햄의 제자들 중에 한 명이었던 세이모어(William J. Seymour)라는 흑인 목사도 나중에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성령세례로서의 방언을 체험했다. 그 후 오즈맨과 세이모어에 의해서 시작된 현대 오순절(Pentecost, 펜테코스트) 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신사도 운동의 본격적 기원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캐나다에서 크게 확산된 ‘늦은비 운동’ 사상이다. 늦은비 운동은 방언을 기독교의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 간주했던 찰스 펄햄 등의 사상이 더욱 발전된 바, 늦은비 운동의 정확한 명칭은 ‘늦은비의 새 질서’(New Order of the Latter Rain)이다.

 

그 시초는 미국인 윌리엄 브랜험(William Marrion Branham, 1909-1965)이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캐나다인 조지 호턴(George Hawtin)과 헌트(P. G. Hunt)가 서스캐처원 노스 배틀퍼드(North Battleford, Saskatchewan)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이곳이 늦은비 운동의 실질적인 발생지가 되었다.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는 1949년 시애틀 제23차 총회에서 늦은비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그 후 늦은비 운동은 수십 년간 잠적했다가, 1980년 이후 빈야드 운동과 피터 와그너의 제3의 물결운동 등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어 나타났다.

이단(異端)으로 판명되어 사라질 것 같은 늦은비 운동은 198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마이크 비클(Mike Bickle, 1955-), 밥 존스(Bob Jones), 폴 케인(Paul Cain) 등을 중심으로 ‘캔자스시티의 선지자들’(Kansas City Prophets; KCP)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운동에 대한 어니 그루엔(Ernie Gruen) 목사의 폭로 보고서(Documentation of the Aberrant Practice and Teaching of the Kansas City Fellowship)는 신사도 운동에 대한 매우 중요한 비판 자료이다. 마이크 비클이 개척한 캔자스시티펠로우쉽교회(Kansas City Fellowship, KCF)는 나중에 메트로 크리스천 펠로우쉽교회(Metro Christian Fellowship)로 개명하였고, 3,000명 이상 모이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그 후 마이크 비클은 이 교회를 사임하고, 지금의 ‘국제기도의 집’(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IHOP)을 세우고, 1983년에 들었던 ‘다윗의 장막의 영(the Spirit)으로 24시간 기도하라’는 음성을 따라 24시간(356일) 기도운동을 통해 신사도 운동을 전 세계에 확산시키고 있다.

또한 늦은비 운동은 198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존 윔버(John Richard Wimber, 1934-1997)에 의해서 ‘빈야드 부흥운동’으로 크게 부활하였다. 존 윔버는 척 스미스 목사가 인도하는 갈보리 채플(Clavary Chaple)에 합류하였으나 1982년에 탈퇴하였고, 켄 걸릭슨 목사가 이끌던 빈야드 크리스찬 펠로우쉽(Vineyard Christian Fellowship/s)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훗날 전 세계적인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이 일어나게 된다.

 

 

 

 

 

 

빈야드 운동은 1989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보이는데, 1989년은 신사도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왜냐하면 마이크 비클과 ‘캔자스시티의 선지자들’ 그룹이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폴 케인이 마이크 비클과 존 윔버 사이의 다리를 놓았다. 존 윔버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피터 와그너는 2000년 텍사스 주의 댈러스(Dallas)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어 ‘국제사도연맹’(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 ICA)을 결성했다.

위와 같이 198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왕성하게 일어났던 빈야드 운동은 1990년대 중반에 토론토와 플로리다 펜서콜라를 중심으로 다시 크게 일어났다.

 

1994년부터 존 아놋(John Arnott)은 토론토공항교회(Toronto Airport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으로 소위 ‘토론토 블레싱’(Toronto Blessing) 또는 ‘거룩한 웃음 운동’(Holy Laughter Movement)을 일으켰다. 존 아놋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아 후에 신사도 운동의 세계적 기수가 된 사람은 안재호(Che Ahn, 체안) 목사인데, 그는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에 있는 추수반석교회(Harvest Rock Church)에서 목회하였고, 2008년 타드 벤틀리(Todd Bently)의 사도임직식에서 피터 와그너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칭 사도이다.

 

그는 현재 루 잉글(Lou Engle)과 함께 약 500명의 신사도 운동 교회 지도자들로 구성된 ‘국제추수선교회’(Harvest International Ministries; HIM)를 이끌고 있고, 또한 ‘와그너 리더십연구소’(Wagner Leadership Institute; WLI; 대표 홍정식)의 대표 강사로서 성령과 성령의 능력의 ‘임파테이션’(impartation, 배분, 전달)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1995년에 플로리다의 펜서콜라에서도 토론토에서 일어났던 빈야드 웃음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펜서콜라의 부흥은 1994년 브라운즈빌교회(Brownsville Assembly of God; 존 킬패트릭 목사)의 중심인물들이 토론토공항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다시 말하면 펜서콜라 부흥은 1995년 6월에 킬패트릭 목사가 존 아놋과 친분이 있던 스티브 힐(Steve Hill)을 자기 교회의 부흥강사로 초청했을 때 일어났다.

 

 

 

 

 

 

#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신사도 영성 비판

 

1.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歷史的) 회복을 통한 역사적(歷史的) 보편기독교회의 권위 부정한다.

신(新)사도(使徒) 운동은 소위 ‘두 날개’로 불리는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歷史的) 회복과 부활을 주장한다. 신사도 운동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에베소서 4장 11절의 말씀대로 오중(五重) 직분(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복음전도자, 목사, 교사)을 교회에 허락하셨지만, 세속화된 교회들과, 교권으로 횡포를 휘두르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교회사 속에서 사라지게 했지만, 하나님께서 종말의 대추수기(大秋收期)를 맞이하여 신사도 운동을 통해 새(신, 新)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세우신다.

 

소위 ‘신사도 개혁교회’를 지휘하는 하나님의 엘리트 일꾼들에 해당하는 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일반 목사들은 물론 구약의 선지자들과 바울 사도를 포함하는 신약의 사도들 이상(以上)으로 강력한 영적 능력으로 부흥과 추수를 위한 종말적 목회 사역과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신사도 운동의 ‘두 날개’ 주장에 대해 우리는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택하셨던 열두 사도들과, 가롯 유다 대신에 뽑힌 맛디아와(행1장),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바울 사도가(행9장) 지녔던 사도직과 동등한 사도직이 지금도 역사적(歷史的)으로 반복될 수 있는가?” 현재도 사도직과 선지자직이 역사적(歷史的)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주장은 개혁신학적 입장과는 정면으로 충돌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무 도움이나 도구가 없이도 친히 사역을 하실 수도 있고, 천사를 시켜서 사역을 하실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그의 사역의 도구와 수단으로 삼아 일하시는 편을 선택하셨다.

 

다시 말하면, 칼빈은 교회의 직분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대한 성경주석을 근거로 특정한 시대에만 필요했던 교회의 ‘임시직’(extraordinarium; extraordinary office; temporary office)에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를 포함시키고, 교회시대에 항상 필요한 ‘일상직’ 또는 ‘항존직’(perpectuae; ordinary office; permanent office)에 목사와 교사를 포함시킨다.

 

 

 

 

 

 

그러면 지금도 “교회가 사도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나 “교회가 사도적(apostolic)이다.”(apostolicam Ecclesiam)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네덜란드의 후껜데이끄 (J. C. Hoekendijk)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교회의 세상에 대한 봉사를 교회의 사도성으로 이해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간주하여, 현재 교황이 제1대 교황이었던 베드로의 교황권을 역사적(歷史的)으로 계승하는 것을 사도직의 역사적 계승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반대하여 칼빈은 교회의 사도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교회가 구약성경의 선자자들의 말씀과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진리의 연속성과 ‘교리의 연속’(successio doctrinae)을 유지할 때, 그 교회는 사도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도적이며, 사도적 교회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진리의 연속성 속에 있는 교회가 바로 사도적인 교회이고, 이런 교회가 바로 사도적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미 교회 안에 있는 교회의 직분(교황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직접 부여했던 사도직이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신사도 운동은 그 동안 교회사 속에서 없어졌던 사도직과 선지자직으로 오늘날 부름 받아 임명된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 세워지고 이룩될 ‘신사도 개혁교회’를 주장하고 있다.

결국 신사도 운동은 약 2000년간 사도직과 선지자직을 교권을 위해 일방적으로 폐기시키고, 이 두 직분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사상의 보편 기독교회의 권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셈이 된다.

 

2. ‘직통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로서의 정경(正經)의 절대성 붕괴

신사도 운동이 주장하는 ‘두 날개’로서의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 회복은 기독교는 물론 개혁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고백하는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 원리를 뿌리째 뽑아버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신사도 운동은 신(新) 사도와 선지자는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예언’을 받아서 예언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소위 ‘직통계시’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2000년 교회사 속에서, 특히 몬타누스(Montanus) 이단(異端)에게서 발견되는 ‘직통계시’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로서의 정경의 절대적 권위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사상이다.

칼빈도 그의 당시에 성경 자체를 무시하고, 성경 이외에 교회나 그리스도인 각자의 상황에 따라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계시’를 주장한 열광주의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칼빈에 의하면,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 이외의 ‘새로운 계시’를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서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 목회자의 설교를 경청함으로써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말씀에 동일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3. 비성경적 성령론을 통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비정상적, 비윤리적 삶

신사도 운동에서 자칭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행해지는 예언 행위는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우리가 앞에서 말했다시피, 오늘날의 ‘예언’은 직통계시를 통한 “새로운 계시”를 받는 방법이 아니라, 정경으로서의 66권 성경을 성령의 내적 조명과 기도를 전제한 올바르고, 책임적인 해석학적 과정을 통해서 이해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된다.

 

개혁파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는 그의 당시 이 문제로 열광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지금도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열광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그의 당시 목사와 교사(신학대학교 교수, doctor)가 성경에 기초한 설교와 신학을 통해서 선지자의 기능을 교회론적으로 대신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꿈이나 느낌 등을 통한 미래 일에 대한 예감이나 예측 등을 예언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성경의 계시에 기초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성경적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주로 다음 세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 제사장, 왕 등을 비롯하여 오늘날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름 받을 때, 성령의 임재의 약속과 상징으로서 공적 직무에 취임하는 경우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 공식 취임하실 때 세례를 받으신 경우가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유아세례나 (성인) 세례를 받을 때 만인제사장직(모든 신자 제사장직;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속에서 성령세례와 결부되는 경우가 있다. 이 세 경우는 모두 성령론과 결부되지만, 성령의 전적인 자유가 반드시 전제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성령론, 특히 성령의 은사론과 관련하여 신사도 운동 속에서 방언 현상, 우울증 등 치유 현상, 예언 현상, 이적과 기적 현상이 나타나면서 괴이한 소리 현상, 쓰러짐 현상, 술취한듯 비틀거리는 현상, 혀가 풀려서 웅얼거리는 현상, 발광하면서 괴성을 지르는 현상, 울음 현상, 금이빨과 금가루 현상, 웃음 현상, 입신 현상, 심리학이나 최면술 등의 효과 현상 등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위와 같은 현상들을 주도하는 대부분의 신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은 물론 위의 현상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어 이전보다 더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정상적이고, 올바르고, 거룩한 삶을 살기보다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파괴적이면서도 비윤리적인 비정상인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신사도 운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해외에서 신사도 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집회 도중에 수많은 거짓 예언을 하고, 심리술이나 최면술을 사용하여 속이고, 성적(性的)으로 타락했고, 많은 추종자들은 정상적인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힘들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마7:15-27)

 

신사도 운동은 지나치게 ‘새 포도주’, ‘성령의 술’, ‘군화(軍靴)신은 신부(新婦)’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신비주의적 구원론을 띠는가 하면, 매우 전투적인 신앙운동을 추구한다. 물론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tans ecclesia)이지만, 신사도 운동이 사용하는 ‘군대’(‘요엘의 군대’, ‘예수의 군대’ 등) 개념은 근본주의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전투적 개념이 지나치게 강하다.

 

4. 잘못된 구원과 선교 방법을 통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오도(誤導)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칭의나 회개나 성화 이해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신앙이 항상 전제된다. 신사도 운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과 용서를 전제한 참된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율법주의적 정죄와 회개 이해가 나타난다.

‘다윗의 장막’에 근거하여 신사도 운동은 24시간 365일 연속 중보 기도와 예배를 강조한다. 기독교에서 기도와 예배가 절대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고 지극히 정상적이다. 문제는 정상적이고도 일상적인 삶을 완전히 제쳐 놓고 특정한 장소에서 기도와 예배에만 며칠씩 몇 달씩 몇 년씩 몰두하는 것이다.

 

신사도 운동이 이해한 중보기도의 개념에는 큰 문제가 있다. 신사도 운동에서 중보기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구속주이시며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차원에서 중보기도가 아니다. 신사도나 선지자나 특정한 사람들이 구속주이며 유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중보자들이 되어 중보기도의 은사와 직분을 특별히 받았다는 사실이다.

 

 

 

 

 

 

신사도 운동은 지나치게 ‘새 포도주’, ‘성령의 술’, ‘군화(軍靴)신은 신부(新婦)’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신비주의적 구원론을 띠는가 하면, 매우 전투적인 신앙운동을 추구한다. 물론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tans ecclesia)이지만, 신사도 운동이 사용하는 ‘군대’(‘요엘의 군대’, ‘예수의 군대’ 등) 개념은 근본주의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전투적 개념이 지나치게 강하다.

선교방법과 관련하여 ‘영적 도해’(Spiritual Mapping), ‘지배권’(dominion), ‘땅 밟기 중보기도’(Prayer Walk), ‘선포 기도’, ‘7대산 정복 운동’,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 등은 미신적이거나 이원론적인 방법과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근거한 선교 방법으로써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5. 신학과 성경에 대한 몰이해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반(反)신학적, 비성경적 사고로 유도(誘導)

신사도 운동의 지도자들(신사도, 선지자, 목사, 평신도)의 대부분은 사회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교회에서 신앙훈련도 받지 못했고, 정상적인 신학 교육기관에서 신앙훈련과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고학력주의나 엘리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예외는 있지만, 어떤 사회에서도 지도자가 되려면 그 직위와 분야에 걸맞는 인격성과 전문성을 구비해야 한다.

신사도 운동 속에 있는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신학에 대한 이해와 성경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설교 내용 속에 잘못 이해된 교리 내용이나 잘못 해석된 성경 주석 내용이 다반사(茶飯事)다.

 

신사도 운동 속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리와 신학에 대한 증오심마저 있는 것 같다. 기독교회와 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삼위일체론을 잘못 이해하여 반(反)삼위일체론에 빠지는가 하면, 성경을 종종 문자적으로 또는 알레고리적으로(allegorical) 해석한다.

 

 

 

 

 

 

# 결론 부분에서


신사도 운동의 영성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를 통해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유익을 얻었다. 하나는 신사도 운동의 영성과 신학이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위협하는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기존 교회는 자신의 영성과 신학의 취약한 부분을 뒤돌아 보아야한다는 사실이다.

 

“개혁된 교회(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신앙과 신학의 주요 원리와 정체성을 우리는 계속 실천해야할 것이다. 개혁교회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항상 다스리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

 

* 위 내용은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2013년 6월7일 오후 4시 학술원 세미나실에서 ‘신사도 영성과 개혁주의’를 주제로 개최한 ‘제30회 월례발표회’ 발제문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최윤배, “신사도 영성과 개혁주의”, 기독교학술원-제30회 월례발표회, 2013년 6월7일, 서울:기독교학술원 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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