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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창조론, “예수의 사역, 특별계시와 자연계시의 연결고리”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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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 ‘제16회 창조론 오픈포럼’서 주장

 

2015년 2월 9일 기사

 

“예수의 자연계시는 두 가지 측면, 즉 자신이 곧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동시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구속계시를 향한 연결고리를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는 지난 7일 오전 9시30분 삼일교회에서 개최한 ‘제16회 창조론 오픈포럼’에 참여해 복음서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자연계시에 대한 신학적 함의를 이끌어내는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예수의 자연 계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조덕영 박사는 결론 부분에서 “이신론의 영향 속에서 ‘자연에 의존하는 신학이 계시를 뒷받침하기보다 희생시켜 왔다’는 생각이 20세기 신학을 지배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따라서 지난 세기 신학자들이 자연계시의 합리성을 알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라거나 무지한 신학자라는 공격을 염려하거나 자연신학이라는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자연계시의 유용성조차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조 박사는 “지금까지 예수의 자연계시를 별도로 추적한 본격적 연구가 신학의 주변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며 “하지만 예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대해 어떤 구도로 바라보시고 해석했는지 살펴보고, 그 일반계시가 어떻게 구속의 계시로 연결되는지 추적해 보는 작업은 꼭 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연계시에 대한 정리는 조직신학의 한 분야로 일부 정리된 것들이 부분적으로 존재하지만 예수 스스로 자연을 바라본 자연계시에 대한 언급과 예수 사역에 나타난 자연계시적 측면을 별도로 정리하는 신학적 작업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연구논문이 연구의 당위성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반면, “시간과 자료의 제약과 촉박함이 이 연구를 마치 주행의 난코스를 달리는듯한 미로 속으로 바지게 만들기도 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의 제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가 바라보고 언급하고, 사역한 공생애를 통한 창조계시(자연계시)를 밝혀보고 구속계시로 연결하기 위한 접촉점을 찾는 작업으로서의 예수의 자연계시에 대한 추적은 신학적 미로이긴 하지만 의미 있는 작업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조덕영 박사가 이날 발표한 ‘예수의 자연계시’에 대한 연구논문 내용을 일부 정리했다.

 

 

 

 


#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 계시에 의지해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이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실재를 인식한다는 면에서 자연계시(또는 창조계시)라고 불린다. 즉, 일반 계시는 언어가 아닌 사물과 관련된 것으로부터의 계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일반계시의 주제는 주로 자연과 역사와 인간의 내면과 관련된다.

특별계시는 인간이 일반계시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의 길, 곧 인간 구속의 길을 제시한다. 이렇게 두 계시가 다른 영역을 보여주는 계시지만 창조와 구속은 본래 분리된 개념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구속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창조가 없는 구속은 의미가 없다. 본질상 창조를 떠나서는 구속을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창조교리는 발전하지 않고 구속교리만 발전해 온 감이 있다.

20세기 들어 이같은 경향은 구약신학과 교의신학 양편에서 심화된 감이 있다. 그 중심에는 구약 신학자 폰 라드(Gerhard von Rad, 1901~1971)와 교의학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같은 학자들이 있다. 이들이 볼 때 자연은 늘 구속은총 앞에 무력하거나 구속에 종속될 뿐이다.

하지만 사실 창조를 무시하고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주의 시작이 창조요, 인간의 시작도 창조요, 천국도 새 하늘과 새 땅, 곧 재창조의 장소다. 이렇게 자연계시의 중요성을 모든 신학자들이 외면하거나 방치해 온 것은 아니다.

에밀 브르너(Emil Brunner, 1889~1966), 토마스 토렌스(Thomas Torrance),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 등은 자연계시에 주목한 최근의 주요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 특별계시와 자연계시의 연결고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속의 역사적 존재로 지구 안에 속한 일원이 되었다. 그 제한된 존재인 인간에게 하나님은 계시라는 도구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그 기독교적 계시는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계시와 더불어 언약이라는 관계 도구를 갖고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일부 알면서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아닌 본성(롬 1:28) 속에서 특별계시를 받고, 깨닫고, 알게 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별계시 이전에 인간은 타락과 에덴동산 추방에 따른 세상의 우주적 붕괴와 하나님의 세상 심판에 대한 인식이 필연적으로 먼저 온다. 이것은 특별계시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계시의 영역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구제불능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요1, 1:8).

타락된 본성을 갖고 죄 속에 살면서 죄악의 결과들을 경험한다. 그 경험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다시금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하고 희미한 인식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연계시(창조계시) 속에서도 구속계시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신앙과 신학이 나타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런 견해는 예수 탄생과 선교 이전에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이나 인류에게도 빛이 있을 수 있었다는 안도감을 주는 견해도 동시에 제공했다.

 

 

 

 


예수 이외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 하더라도 성경의 하나님은 예수 이전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 대해서는 허물치 않으시는 하나님(행 17:30) 이심을 알려줌으로써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복음이 옹졸하고 편협한 틀 속에 갇힌 진리가 아님을 보여주셨다.

이러한 자연계시를 갖고 신학을 전개하는 것을 자연신학이라고 한다. 즉, 자연신학은 특별계시에 호소하지 않고, 일반계시 안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증명하거나 믿음을 정당화하려는 논증이다. 자연신학은 19세기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으며, 오늘날 지금까지 지속되는 신학사의 논제 가운데 하나다.

사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따라서 계시가 구분이 되고 분별은 되나 분열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계시도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이 같은 신학적 탐색의 기초 자료로서 본고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서’ 예수 자신이 보여주신 자연계시가 어떻게 구속계시와 접촉점을 이룰 수 있는지 살펴본 것이다.

# 복음서에 나타난 자연계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는 기독론은 늘 기독교 조직신학의 중심부를 이루어왔다. 그것은 기독교 구속신학이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문제는 기독론의 핵심을 이룬다.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요 기독론의 중심이다. 예수의 자연계시가 자연을 초월함 속에서 전개되는 것은 삼위의 제2위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의 모습을 드러낸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에서 그 신성을 찾는다.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주’ 등이다. 물론 예수는 스스로 ‘내가 창조주이다’라는 식의 공표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신성을 가진 존재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묘사하면서 영적 존재들도 피조된 존재들이라고 설명한다(골 1:16).

또한 복음서 저자들은 심판의 복음을 자연스럽게 종말의 복음으로 연결시킨다. 예수는 이 복음서 안에서 자연스럽게 심판을 종말의 복음에 연결시킨다. 예수는 심판주 하나님으로서 종말적 계시에 대해 회개, 죽음, 영혼, 천국 비유, 부활, 재림, 최후 심판의 문제들을 다룬다.

복음서는 섭리에 대해서도 다룬다. 섭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방식을 말한다. 성육신과 함께 세상의 제한 속으로 들어오신 예수께서는 섭리의 계시 속에서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가기 위한 생애를 사셨다.

즉, 하나님 섭리의 영역도 하나님의 창조세상의 영역에서 구현된다는 면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계시를 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섭리는 하나님께서 결코 세상을 방치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세상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권능 가운데 준비되고 계획된 영원한 예지와 예정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는 물질세계의 자연은총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차별 없이 베풀어지는 선물이라고 설교(마 5:45, 10:29)하면서 자연을 통한 계시는 자연스럽게 ‘보존’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만든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들과 협력한다. 이 말은 미리 정하신 만물의 적용법칙에 따라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적 질서대로 정확히 행동하게 하는 신적 능력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고,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동시에 모든 범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책임을 다함으로 하나님께 협력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인형처럼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 일은 세상에 맡기고, 예수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했다(마 8:22).
하나님은 만물이 자기 존재의 목적에 응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지속적으로 다스리신다. 하늘과 땅, 즉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는 각각 다르게 통치되나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다(마 28:18). 이 통치는 보편적이며 특수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하며, 제자들은 그 통치자의 명령과 약속 아래서 사역해야 한다(마 28:19~20). 이렇게 예수의 주권적 통치는 우주적이고 종말적이고 미래적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는 복음서 속에서 자신의 신적 속성과 신적 사역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영원성(요 1:1, 8:58, 17:5), 전지전능함(마 9:4, 16:21 / 막 5:11~15 / 눅 6:8, 7:14 / 요 1:48, 2:25 등), 무소부재(마 18:20, 28:20 / 요 1:18, 3:13 등)은 신적 속성을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예수님이 스스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의 원천이라고 계시한 것도 신적 속성을 증거하며, 다른 인간과 달리 그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인 것도 신적 속성을 가진 분임을 증거한다(눅 4:34 / 요 6:69 등).

다만, 예수께서 자연을 통해 삼위일체를 증거하려고 한 구체적인 모습은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초월의 삼위일체를 자신이 창조한 내재의 자연을 통한 한계를 지닌 유비의 방식으로 증거하려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자신이 바로 삼위일체 아니신가? 피조물 안에 인간이 유비의 방식으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완전하고 온전한 계시는 아니나 인간은 그 흔적의 부스러기를 하나둘 찾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예수와 신학자 사이의 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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