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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사적인 것은 아니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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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아카데미, ‘공적신앙과 청년사역’ 주제로 제5회 청년사역 컨퍼런스 개최 

 

2014년 4월 기사

▲ 청어람 아카데미가 지난 25일 '공적신앙과 청년사역'을 주제로 제5회 청년사역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날 총체적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대안은 '공적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점이 강조됐다.

- 공적신앙은 개인과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
- 복음의 보편성으로 세상과 공존하며 살아가라.
- 공적신앙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이론적 학습에만 머물지 말고 ‘실천적 학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교회력’에 따른 예배 계획에서 ‘사회력’에 따른 연간 계획으로 심화시켜라.
- 공적신앙 네트워크 및 공적신앙 성경공부 교재 및 커리큘럼 재구성하라.
- 공적신앙은 개인의 차원에서 공동체 차원으로 일관성 있는 영성형성의 과제 위에서 다뤄라.


‘개인 구원’의 강조 때문일까. 복음을 지나치게 개인적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복음은 원래 공동체적이다. 교회는 공동체다. 교회가 복음을 추구하는 한 복음은 공동체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는 공동체적 복음을 선포하며, 개인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한다. 그리고 개인의 신앙이 공동체 안에서 제대로 표현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사회 안에서조차 그 신앙이 공동체적 복음에 입각해 올바로 구현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공공성’ 혹은 ‘신앙의 공공성’이다. 보통 공공신학이나 공적신앙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한마디로 복음을 단순히 ‘자기계발’이나 ‘힐링’ 정도의 개인적인 신앙으로만 인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청어람 아카데미(대표:양희송)가 지난 25일 오전 10시 창천감리교회에서 ‘공적신앙과 청년사역’을 주제로 제5회 청년사역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총체적 위기에 빠진 한국 교회의 유일한 돌파구는 ‘공적 신앙’에 있음을 한국 교회 미래인 기독청년들과 청년 사역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마련됐다.

주최 측은 “신앙의 관심사를 개인의 내면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층위까지 적극적으로 포함하는 태도를 ‘공적신앙’이라고 부른다”며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신앙 안으로 포괄해내려는 전향적인 태도가 핵심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공적신앙’을 청년사역자들의 생태계로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이날 발제자로 참여한 이강일 소장(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양희송 대표(청어람) 등의 주요 발표 내용을 정리해봤다.

 

 

# 복음주의운동, 공적신앙으로 나아가라 / 이강일 소장

1. 복음주의 진영이 사회참여의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 정립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미 공적신학은 나름의 신학전통과 다양한 방법론으로 사회문제에 대응하고 있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물론이고, 사회문제에 대한 대응능력이 현저하게 낮아진 복음주의 진영에게는 평가보다 배움이 더 절실한 상황이다.

2. 복음주의운동은 보수적 개신교인들을 주된 청중으로 삼고 있다. 이들과 함께 공공적인 기독교 활동을 해나가려면 이들의 신학과 언어로 말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상담에서도 먼저 공감적 경청에 집중하고 그들의 말로 반응하는 과정을 중시하고 있다. 하물며 보수주의 정서가 강한 회중과 함께 하는데 이런 공감적 태도는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된다.

3. 사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회심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정체성을 보호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그 관심이 다른 이들도 같은 체험과 정체성으로 초대하려는 개인전도의 동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내재적 특징 때문에 복음주의운동은 성경이 보여주는 통전적 전망을 실현시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의 보수적 정체성이다.

4. 복음주의운동이 사회참여 혹은 공적 도전을 하려면 2차 대각성운동의 사회개혁의 모티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사회운동이론으로 무장된 운동가들이 아니었는데도 전도하는 일과 사회를 개혁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개인주의적인 성결론가 종말론과 관련된 동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성결을 통한 주님과의 연합의 열망의 방해물은 바로 죄악이었다. 그 죄악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성결에 방해되는 것은 제거 대상이었다.

 

 

5.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현재 삶과 이어진다는 후천년적 재림사상을 믿는 이에게 노예제도나 여성의 인권 문제 등은 사회적 개선을 막는 요소였다. 사회적 개혁이 지연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늦춰지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적극적인 사회개혁이 추진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전통적 성결론과 종말론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헌신적인 사회개혁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6. ‘광장에 선 기독교’라는 책의 저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복음주의운동의 공적신앙 구현을 위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라는 최종적 비전이고, 둘째는 공존의 자세다. 이 비전과 자세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복음주의운동의 공적신앙의 구현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7. 복음주의자들의 공적 신앙은 대체로 개인과 교회를 넘어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교회사적으로 하나님나라의 형태는 몇 가지로 제한되기 때문에 잘 검토해야 한다. 사회 안에 국가와 교회가 존재하는데 그 질적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가 철저하게 인정되는 관점이 우리의 공적신앙의 비전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8. 볼프는 고유한 종교적 정체성과 공공성에 대해 나름의 대안으로서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다원주의’를 제안한다. 이것은 종교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전형적 종교다원의 논리가 아니다. 각자는 자신의 신관을 견고히 유지하면서도 남의 종교와 경전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해주어라”(마 7:12)는 보편성을 띠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과 공존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 신앙의 공적 전환, 이렇게 시도하라 / 백소영 교수

1. 공동체윤리의 차원에서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학자인 월터 부르그만은 열왕기하 18~19장의 앗수르와 유다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를 예로 들며 신앙인들의 사회적 참여가 공적이기 위해 무엇보다 ‘이중 언어’ 구사가 필수적임을 강조한 바 있다. 즉, ‘성벽 뒤의 신앙공동체의 언어’를 성벽 위에서 중재를 위한 ‘공적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이 말은 타협을 하라는 의미가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이다.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소통해야 한다는 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면서 유대제의적인 ‘속죄제’를 그대로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희생양’이나 ‘대속’이라는 언어를 사용해 그냥 전도한다면 어디 성 밖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너희들이 우리 언어를 배워라”라는 접근은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오히려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가장 적절하게 번역할 언어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적 내용들을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자들은 보통 ‘가정’도 공적 담론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국교도 친화적인 왕권에 의해 교회와 사회개혁에 실패하자 이를 한 가정 안에서 이루는 방향성으로 전환한 적이 있었다. 국교도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적 영역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4. 하지만 사실 그때부터 가정을 교회의 가장 작은 형태로 인식하면서 축소된 사회를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하며 그 안에서 사회를 개혁할 미래의 일꾼들을 길러내려 했던 청교도 가정은 분명 공적 차원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경건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라난 능력과 경건을 겸비한 ‘교회오빠’들이 서양에서도, 한국에서도 대거 양산된 바 있다

5. 우리나라에서도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가정의 공적 비전을 찬성하고 강조한다. 시민적 책임을 다하는 경건한 신자 양성을 위한 교회와 가정, 학교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간의 유기적 교육을 강조하기도 한다. 가정은 이러한 교육 생태계의 주요한 영역으로서 공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6.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지 않고, 공적 참여의 적극적 자세와 역량만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현대의 공사 이분적인 ‘칸막이화’와 성별 분업적 구조의 문제를 놓치고서 가정의 공적 참여, 교육 생태계로서의 역할을 말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7. 신앙인들의 공적 참여는 기독교적 콘텐츠를 사회로 확산시키는 신정정치에의 욕망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채워나가기 위해 시민사회의 일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논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8. 하나님나라는 사회적으로 말하자면 ‘유토피아’다. 즉, 아직 이 땅에 장소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미래에서 현재의 우리를 끊임없이 불러내고 있는, 하여 그 미래를 기준으로 현재를 기억하라고 촉구하는 기준점이다. 그 미래를 현재로 불러오기 위해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개별 사건을 일으키는 그 모든 신자들은 크든 작든, 개인으로 하든 단체로 하든, 이미 ‘신앙의 공적 참여’를 그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청년사역, 공공성의 지평을 열자

1. 과연 ‘공적신앙’이 대안인가?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짐 윌리스의 표현은 정곡을 찌른다.

2, 어떤 이념적, 정치적 진영 논리에 손쉽게 편승하는 것 말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정돈해야 한다는 것은 당면한 요청이다.

3. ‘공적 신앙’에 대해 발언하는 모든 이론가들은 우리가 공공의 영역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의 신앙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우리의 시야가 확장되려면 ‘신학적 개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에서는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던 ‘기독교 세계관’운동에서 이런 관심사가 어느 정도 대두됐으나 어느새 그 공백기가 20년에 이른다. 최근에 다시 ‘공적 신앙’의 이름으로 제기되는 주제는 그런 면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지금의 시대에서 기독교 복음은 ‘정의’라는 개념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이 ‘공적 신앙’이다.

4. ‘공적 신앙’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이론적’ 학습에만 머물 수는 없다. 사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실천적’ 학습이다. 먼저 그간 우리의 신앙체계를 되돌아보면서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결여됐는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검토해야 한다.

5. 한국교회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교계 지도자 1~3위로 꼽히던 인물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몰락한 가운데 비로소 심각하게 ‘교회성장’ 담론은 목회자나 일부 교인들의 관심사일수는 있지만 기독교 신앙이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인정받는 정당한 방법이 될 수 없음을 실감하고 있다.

6. 개신교 복음주의권에서 사회선교를 내걸고 시작한 ‘성서한국’ 운동은 운동주체의 역량 이상으로 뜨거운 대중적 호응을 받았고, 주요 대학생 선교단체들은 ‘사회선교부’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사회선교를 전면에 내 건 단체들도 여기저기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이제 기존의 교회가 ‘사회 정의’의 문제를 다루기에 필요한 협력 네트워크가 갖추어지기 시작한다는 조짐이기도 하고, 선도적으로 협력과 연대의 실험이 시작될 때가 되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청년사역자들은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포착하고, 이를 사역의 내부 동력으로 삼을 때가 됐다.

 

 

7. 그렇다면 신앙공동체 차원에서 어떤 적용을 할 수 있을까? 90년대 초반 서울의 중대형교회 중 대학청년부가 활성화되어 있던 교회의 학생 대표자들이 한 학기 동안 모여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10여 개 교회 사례를 모을 수 있었는데, 각각 어떤 커리큘럼을 갖고 있고,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며, 그 과정을 통해 발견한 개선되어야 할 점 등을 찾아내어 당시의 전형적인 양육과정을 개선해보자는 것이었다.

8. 그때 나왔던 결론 가운데 첫째는 대부분 계단식으로 각 단계를 이수하면 그 다음으로 이어지던 양육과정은 실제로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대안으로는 단계별 과정이 아니라 관심별로 수평적 배움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마 ‘기독교 변증’이나 ‘주제별 독서모임’ 등이 지속적으로 제공될 수도 있고, 전문 사역단체의 강좌를 아웃소싱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9. 둘째, 신앙공동체가 운영되는 방식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가에 대해 물었다. 매우 행정조직이 잘 짜인 곳도 있었고, 영향력 있는 소수에게 힘이 실린 조직도 있었다. 일대일 훈련을 중심으로 매우 위계적인 조직도 있었다. 좋은 공동체는 대략 3년 정도의 시간 안에 보살핌을 받고, 배우고, 남을 돕고 중요한 의사결정에 책임 있게 참여하는 훈련을 고르게 거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고, 신앙공동체가 사회의 다른 어떤 조직보다 민주적 의사결정과 갈등해결 과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공간임을 인식했다.

10. 그러나 이러한 기회를 포기하고 매우 퇴행적인 방식으로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은 거기에 속한 사람들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좋은 시민교육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앙공동체의 운영 목표는 조직 관리의 용이성 보다는 구성원들에게 공동체 형성의 경험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11. 셋째, 신앙공동체의 훈련 내용이 세상에 나아갈 때 필요한 것을 제대로 구비시켜 주는가를 물었다. 교회 생활은 능하게 하겠지만 세상 생활은 무방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인정했다. ‘직업 소명론이 기반한 사회진출’을 당시 선교운동을 통해 해외선교에 헌신한 이들이 준비하는 만큼은 제공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12. 그렇다면 ‘공적 신앙’을 신앙공동체의 지향으로 삼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택할 수 있을까? 첫째, 예배다. 설교와 가르침에 있어 성경적 강조점을 회복시켜주어야 한다. ‘공적 신앙’에 대한 논의는 정치사회적 이슈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예술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태도로 연결될 수 있다. 예술전공자 및 전문가들이 있다면 이들의 자기표현이자 자기고백으로서의 직업들은 예배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유력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또한 ‘교회력’에 따른 연간 계획을 좀 더 확장한다면 ‘사회력’에 따른 연간 기획으로 심화시킬 수 있다.

13. 둘째, 성경공부다. 수십 개에 이르는 ‘예수의 비유’를 현대의 언어로 옮겨 써보는 과제를 소그룹 단위로 해보는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현대적 맥락을 살피고, 이를 다듬어 내는 과정을 거친다면 공적 신앙훈련의 기초가 될 수 있다.

14. 사회적 성경공부를 시도할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배제의 사례에 대한 연구와 이를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하는 작업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이러한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공적 신앙 네트워크’가 만들어져야 한다.

15. 셋째, ‘공적 신앙’ 논의에 맞춰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다. 계속 출판되고 있는 책과 자료들은 공적 신앙이란 주제에 따라 매우 효과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미 여러 교회들에서 시도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 과정들은 약간의 업그레이드만으로도 매우 풍성해질 수 있다. 온라인 강좌들의 선택 폭도 넓어지고 있다. 독서모임의 전략적 활용도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16. 사회적 현안에 대한 직접 참여와 공론의 장 경험이 격려될 필요가 있다.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 가운데 사회적 갈등 현장에 뚝심 있게 참여하는 사례들도 나오고 있어서, 과거처럼 구제나 구호 중심의 활동에서 더 다양화되고,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볼 수 있다.

17. ‘공적 신앙’은 개인의 차원에서 공동체 차원으로 일관성 있는 영적 형성의 과제 위에서 반드시 다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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