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교회 쇠퇴보다 두려운 것은 예언자의 소리가 사라지는 것”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7.
728x90
반응형

 

홍국평 교수, ‘2014년 미래교회 컨퍼런스’에서 강조

 

2014년 6월 25일 기사

 

“두려운 것은 한국 교회의 쇠퇴가 아니다. 그 배후에 있는 우리의 탐욕과 불의와 무책임함과 직무유기다. 그리고 더 이상 예언자의 외치는 소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연세대 신학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이 지난 23일부터 신학관 예배실에서 ‘설교자가 묻고 성서가 답하다’를 주제로 진행하고 있는 ‘2014 미래교회 컨퍼런스’에 발제자로 나선 홍국평 교수(연세대)가 이같이 강조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21세기에 선포하는 구약성서’를 주제로 발표한 홍 교수는 “구약 시대 많은 예언자들이 전적 회개와 돌이킴을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며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보다 사람의 방법을 더 의지했다. 권력을 의지했고, 물질적 풍요를 섬겼으며, 안락함을 즐기고, 하나님보다 열강의 힘을 의지하는 왕의 정책을 지지했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모습이 한국 교회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돈과 권력이 한국 교회의 순수한 영성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 세상이 경쟁과 효율성의 논리가 뒤덮으면서 교회도 그 논리에 빠져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예수는 당시 막강한 종교권력을 구축한 종교인과 투쟁했고, 한 생명에 집중하고, 이사야를 위시한 뭇 예언자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실현을 외쳤다”며 “현재 교회는 침묵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 교회 쇠퇴보다 두려운 것

홍 교수는 두려운 것은 한국 교회의 쇠퇴 자체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 배후에 있는 우리의 탐욕과 불의와 무책임함과 직무유기라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예언자의 외치는 소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는 점”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는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쌓아놓은 종교 권력의 탑이 너무 높고 아름다워져서는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의 메시지를 알면서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말씀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까? 설교자가 침묵한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설교자가 침묵하고 있다니요? 우리는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라고 항변하고픈 분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러나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홍 교수는 한국 교회 설교자들을 향해 ‘우리 시대에 맞는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의 특징은 말씀의 부재 시대가 아니었다. 언제나 선포는 있었다. 문제는 ‘적실성’이다. 선포되는 말씀이 살아있느냐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오늘’ 나와 나의 청중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홍 교수는 “설교자의 사명은 이전 시대 설교자와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는데 있다”며 “그것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일이요 설교자로서 직무유기를 범하는 않는 것”이라고 피력했다.

# 새 술은 새 부대에

그렇다면 오늘날 설교자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까. 홍 교수는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각 시대가 요청하는 선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사야와 예레미야로 예를 들어 설명했다. 예레미야 시대에 유다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 있었다. 바빌론이라는 거대 제국이 세력을 확장해오고 있었다. 따라서 팔레스틴의 작은 나라 유다의 입장에서는 대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그때 예레미야는 “심판이 결정됐다. 하나님이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신다. 바빌린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을 배반한 ‘친바빌론주의자’라고 몰아세웠다. 물론 당시 예레미야만 예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라고 외쳤다. 하나냐를 비롯한 예레미야를 적대하신 예언자는 공히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예레미야만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소수의 무리만이 그를 따랐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 하나냐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전한 ‘구원’의 메시지는 다름 아닌 한 세기 전 이사야가 전한 구원의 메시지라는 점이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면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외쳤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 달리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그 결과 유다 역사를 통들어 가장 극적인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됐다.

 

 

# 자판기에서 뽑아낸 것과 같은 구원의 메시지

홍 교수는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난 후 그 ‘구원’의 말씀을 변질시켜 버렸다”며 “껍데기는 같은 말씀이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말씀이 됐다. 히스기야에게 주신 구원은 전적인 변화가 전제된 구원이었다. 고통 끝에 오는 것으로써 값싼 은혜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예레미야 시대에 예언자들은 마치 자판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듯한 구원을 외쳤다. 권력에 하수인 노릇하는 직업 예언자의 정치적 수사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이사야 시대에 나라를 구원한 메시지가 쓰레기보다 못한 공허한 외침이 되어버렸다. 결국 예레미야는 유명한 성전설교를 통해 그들의 잘못된 메시지를 통렬히 비판했다”고 역설했다.

분명히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전 세대에 이루어졌다고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의 메시지가 쓰레기로 전락한 것은 예레미야 시대의 선포자가 진실되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말씀을 구하지 않고, 자기 필요에 따라 이사야의 메시지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끼워 맞추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선포는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예언자의 선포와 다릅니까?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 죽은 말씀, 살아 역사하는 말씀

홍 교수는 이와 같이 잘못된 시각에서 선포된 말씀을 ‘죽은 말씀’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죽은 말씀이라고 말할 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잘못 사용해서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는 말씀이 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교자에게 외면당해 실질적으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본문이다.

역사 속에만 있는 본문, 오늘 우리의 삶에 역사하지 못하는 본문”이라고 설명했다.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해석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묵상하는 사람의 의무가 중요해진다. 설교자들은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의 해석에 의존해 말씀을 선포한다. 설교집을 보고, 책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그래서 어떤 본문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역사한다. 반면, 다른 본문은 읽어도 감동이 없다. 자신에게 죽은 본문인 것이다.

# 마태복음의 ‘임마누엘’

홍 교수는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기술한 ‘임마누엘’의 예언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는 말씀은 본래 이사야 7장에 나온 말씀이다.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이 예언은 당시 유다를 압박하던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위협으로부터 조속히 벗어날 것을 약속하는 정황에서 나왔다. 보호의 약속이다. 구원의 약속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호소다. 유다에게 내려준 생명줄이다. 하지만 아하스 왕은 그 생명줄을 잡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본문과 마태복음의 본문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통 마태복음의 렌즈를 통해 임마누엘을 접해 온 우리들은 임마누엘은 예수라는 공식에 익숙해 있다.

 

 

홍 교수는 “하지만 그 도식만 고집하며, 임마누엘 예언은 본래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것이며, 오랜 시간 후에 실현된 것이라고 보게 되면 본래 이 예언이 처음 사용됐던 이사야의 정황을 묵과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설명했다.

분명히 이사야 시대에는 임마누엘이 태어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아이가 태어났을 것이고, 그 아이가 자라기 전에 두 나라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징조가 실현된 것이다. 그것이 이사야 본문의 1차적 의미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홍 교수는 이 본문에는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나님 말씀의 신비다. 어떤 각도에서 조명하느냐에 따라 다채로운 의미가 생겨난다는 것. 수천 년 전에 생겨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런 다양한 의미의 가능성이 내포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 교수는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 안에서 ‘임마누엘’ 예언의 또다른 실현을 봤다”며 “당시 임마누엘 예언을 통해 유다를 구원하려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입해 그들의 ‘오늘’에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러면서 임마누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됐다고 선포한다. 이것은 이사야 본문에 대한 결정적 해석이다. 마태복음이 임마누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의해 실현됐다는 ‘영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임마누엘 예언의 뜻은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그대로 묻혀 있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즉, 아하스 시대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독자는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은 말씀처럼 묻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마태공동체에 의해 임마누엘 예언은 다시 살아났다.

홍 교수는 이것이 바로 해석자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청중의 마음속에 죽어 있는 말씀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다시 살려내는 것은 해석자의 책임”이라며 “이런 결정적인 해석을 통해 새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은 사람은 마태복음 기자만이 아니다. 성서 기자의 대부분이 이전 성경 말씀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 말씀을 자신의 상황 속에 해석하고,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 냈다”고 강조했다.

사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슬리, 바르트는 성서를 해석했다. 그는 “이들의 해석은 비단 많은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성경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결정적 해석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가 바뀌었다. 성경을 보고 이해하는 눈이 달라졌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시대 말씀의 선포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홍 교수는 “마태 기자가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 사건에 되살려 냈다면 우리는 이사야의 임마누엘과 마태복음의 임마누엘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되살려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말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설교자(해석자)의 의무이며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Copyright데오스앤로고스 / 무단 복제 및 전재,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