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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감리교, 평양지역과 기독교의 ‘첫 만남’ 이루어냈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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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학회, ‘평양지역 역사와 한국교회’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 개최

 

2014년 11월 11일 기사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이진구 박사) 주관하는 2014년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 11월 8일 오후 2시 감신대 백주년기념관 중강당에서 ‘평양지역 감리교 역사와 한국 교회’를 주제로 진행됐다.

이번 학술 심포지엄은 남산교회(담임:이원재 목사), 성화교회(담임:김병태 목사), 시온교회(담임:임재식 목사)와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이덕주 박사) 주최로 진행됐으며, 유관지 목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가 주제강연자로 나서 기조강연을 진행했다.

 


# 평양과 기독교의 만남은 ‘감리교’에 의해 이루어져

유관지 목사에 따르면 평양지역과 기독교의 ‘첫 만남’은 감리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평양은 1866년 9월에 토마스(R. J. Thomas) 목사가 선교 목적으로 재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들어오려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을 통해 기독교와 첫 접촉을 가졌다. 이 때 토마스 목사는 힘써 성경을 전했다.

 

결국 1883년 5월에 복음서가 평양에 비공식적으로 보급됐다. 감리교의 첫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1887년 4월 23일에 평양에 처음 방문했다. 이것은 평양과 기독교의 세 번째 접촉이었지만 서구 교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된 이후로는 ‘첫 만남’이 된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의 첫 방문보다 몇 달 늦은 1887년 가을에 평양을 처음 방문했다. 그리고 1888년에 아펜젤러와 함께 다시 평양을 방문했고, 1890년 세 번째로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아펜젤러는 의주 출신 매서인 한 사람을 평양에 파송했는데, 이 매서인은 평양의 첫 한국인 개신교 전도인이었다.

유관지 목사는 “평양에 어느 교파의 선교사가 먼저 들어갔느냐는 것을 따지는 것은 무익유해(無益有害)한 일이 되기 쉽지만 사실(史實)은 기억되어야 한다”며 “평양선교의 시작을 논하는데 있어서 아펜젤러의 첫 번째로 평양방문 사실을 논외로 해서는 안된다. 평양의 중요한 감리교회 하나인 평양중앙교회는 ‘드류ㆍ아펜젤러 기념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교회는 아펜젤러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감리교의 첫 선교사를 기념하는 교호가 평양에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턴도 초기에 평양을 방문했고,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평양에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평양선교를 위해 힘썼다. 유 박사에 따르면 스크랜턴은 1889년 아펜젤러가 세 번째 평양을 방문할 때 동행했으며, 1892년 감리교 한국선교회의 관리책임자고 되면서 감리교의 선교영역을 지방으로 확장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홀을 개척 선교사로 평양에 파송하기도 했다.

유 목사는 “한국에 온 첫 번째 그룹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평양에 남긴 발자취는 감리교가 초기부터 평양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알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평양지역에서 교세가 매우 왕성했던 감리교는 평양을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갖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며 “평양지역 감리교 선교는 여러 분야에서 골고루 이루어졌다. 하지만 많은 감리교 지도자들의 수난과 희생도 뒤따랐다”고 강조했다.

 


# 평양지역 기독교 역사와 한국 교회의 과제

특히 유 목사는 평양지역 기독교 역사와 관련해서 한국 교회의 과제를 제시했다. 첫째, 장로교와 감리교 외 교파들의 역사연구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 목사는 “평양지역에서는 교세와 영향력 면에서 장로교가 월등한 우세를 보였고, 감리교가 그 뒤를 따랐지만 장로교와 감리교만의 도시는 아니었다. 장ㆍ감 이외 여러 교파들도 평양에 진출해 선교활동을 한만큼 다른 교파들의 역사도 연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든다면 성결고는 1925년 6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한 이건과 김제근을 평양에 파송해 교회를 설립했다. 성공회는 1920년 초에 평양 인근의 순천에서 전도를 시작했고, 평양전도구를 설정했다. 구세군의 호가드 사령관은 1911년 피그스와 맨톤을 평양 지방관으로, 김성찬 사관을 평양영(營) 담당자로 임명했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의하면 1940년 당시 평안남도에는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동양선교회, 구세군, 일본그리스도교, 일본조합교회, 조선회중교회, 하나님의교회, 조선예수교회, 성주교회, 일본일치기독교회, 일본기독교회 등 다양한 교파에 속한 교회들이 있었다.

평양지역 기독교 역사와 관련돼 한국 교회의 두 번째 과제는 연합정신을 승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 목사는 “평양은 선교초기부터 연합이 잘 이루어진 곳이었다”며 “교육사업에도 장ㆍ감이 연합으로 참여했으며, 평양지역의 3.1운동은 연합의 한 상징적인 모습을 보였고, 평양 YMCA의 연합도 잘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즉, 기독교가 평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평양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평양을 한국 초기 기독교문화의 최대 중심지가 되도록 하는데는 이런 연합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유 목사는 “한국 교회는 평양에서 이뤄진 연합과 협력을 승계해야 한다”며 “현재 북한 교회에 교파가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연합과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앞으로 북한 교회와의 협력 내지 북한 교회의 재건, 또는 통일선교 운동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따라서 평양지역의 기독교가 과거에 보여줬던 연합의 모습은 지금보다 더욱 강하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세 번째 과제는 평양을 한국 교회의 바람직한 미래상이 그려지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평양지역은 한국기독교의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 목사는 “한국 교회에서는 지금 통일선교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며 “통일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은 남한 교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교류가 주로 이루어지고, 대북지원의 집산이 행해지며 공동기도회 등 교회와 관련된 여러 행사들이 열리는 평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의 기독교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남한의 통일선교 활동 역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돼 통일선교의 중심지로 부각돼 있는 평양지역이 한국기독교의 바람직한 미래상이 그려지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한편, 이날 이덕주 교수(감신대), 고성은 박사(목원대 강사), 조이제 목사(여주소망교회)도 발제자로 나서 각각 △평양 남산현교회의 역사 △성화신학교의 역사와 성화파의 활동 △해방 후 평양 감리교인의 월남과 교회재건 등을 주제로 발표했다.

다음은 이날 발표된 연구논문의 목차

<평양 감리교 선교와 남산현교회 역사 / 이덕주>

1. 머리글
2. 선교초기 교회 설립과 부흥(1893~1909년)
 2.1 미감리회 평양 선교와 남산현교회 창립
  2.1.1 선교사들의 평양방문과 선교 개척
  2.1.2 평양 기독교도 박해사건과 청일전쟁
  2.1.3 교회부흥과 남산재 예배당 건축
 2.2 남산현교회 부흥과 선교사역 확장
  2.2.1 예배당 증축과 지교회 설립
  2.2.2 노블 부인과 홀 부인의 여성선교
  2.2.3 남산현교회 벽돌 예배당 건축
 2.3 북한지역 선교와 부흥운동 거점이 된 남산현교회
  2.3.1 지방 사경회와 지방 교회 개척
  2.3.2 보호여회 조직과 러일전쟁
  2.3.3 평양 대부흥운동과 성내 지교회 개척
3. 일제 강점기 교회 성장과 민족운동(1910~1929년)
 3.1 1910년대 교회부흥과 선교사역
  3.1.1 남산현교회의 ‘말씀과 기도’ 목회
  3.1.2 교육관 건축과 영아부, 유치원 설립
 3.2 삼일운동과 남산현교회
  3.2.1 평양 독립만세운동과 교회 수난
  3.2.2 애국단 사건과 애국부인회 사건
 3.3 1920년대 남산현교회의 회복과 부흥 목회
4. 일제말기 교회 시련과 저항(1930~1944년)
 4.1 남ㆍ북 감리교 합동과 남산현교회 주일학교
 4.2 남산현교회 엡웟청년회 활동
 4.3 일제말기 교회 수난과 폐쇄
5. 해방 후 분단과 교회 수난(1945~1950년)
 5.1 해방과 교회 재건
 5.2 전쟁과 순교, 그리고 월남
6. 맺음글

 

 

<성화신학교의 역사와 성화파의 활동 / 고성은>

1. 들어가는 말
2. 성화신학교의 설립 배경
 1) 사회적 배경
 2) 교회적 배경
 3) 학교적 배경
3. 성화신학교의 설립과 발전
 1) 성화신학교의 설립
 2) 성화신학교의 발전
 3) 성화신학교의 교풍과 제1회 졸업식
4. 성화신학교와 평양신학교의 합병 및 폐교
 1) 신학교들의 수난
 2) 성화파ㆍ평양신학교의 강제 합병과 기독교신학교의 출현
5. ‘성화’신학교의 이름을 차용한 ‘성화’파의 활동
 1) 성화파의 태동
 2) 성화파의 확장
 3) 성화파의 쇠퇴와 성화인들의 활동
6. 맺는 말

<해방 후 평양 감리교인의 월남과 교회 재건 / 조이제>

1. 들어가는 글
2. 서부연회의 재건과 수난
3. 평양지역 감리교인의 월남과 교회 설립
 1) 남산교회
  (1) 남산교회의 창립
  (2) 6.25 전쟁과 대교교회의 설립
  (3) 복귀 후의 남산교회
 2) 시온교회
  (1) 평양교회의 창립
  (2) 시온교회로 개명
  (3) 서울 시온교회의 창립
 3) 성화교회
4. 나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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