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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예배시간에서의 간증, 괜찮을까?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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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연구(3) * 


 

간증, 장로교회의 공예배에서 가능한가 / 김재윤 교수(국제신대, 조직신학)

 

예배신학과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장로교회 예배에서 멀어져
한국교회 초창기 간증 형태는 죄에 대한 회복과 자복, 고백
간증은 ‘나’의 경험 넘어 하나님의 일을 말하고, 권면과 위로로 교회 세우는 것

 

“찬양, 기도와 마찬가지로 간증도 성경적인 내용을 말함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 곧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간증은 공예배를 풍성히 할 수 있다.”

김재윤 교수는 “간증은 그 출발점이나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장로교회의 공예배를 바른 예배가 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간증은 공예배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며 “간증은 주관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기이한 일을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큰 일을 말할 수 있다. 즉, 복음과 복음에 해당하는 내용을 말해서 교회를 세우는 권면과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발표내용 중에서

1. 공예배에 대한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의 많은 장로교회의 주일 오전 ‘대예배’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드려지고 있다. 하지만 몇 차례 드려지는 ‘대예배’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더구나 ‘오후예배’는 예배 실험의 장이라 할 만큼 다양한 형식의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2. 열린 예배, 이머징 예배 등 일련의 새로운 예배 운동들이 등장하면서 주된 논쟁은 음악의 스타일이나 예배의 구성에서 어떤 순서로 예배가 드려지는가에 집중돼 있다. 개혁주의자들의 전통을 잇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공예배가 매우 성경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복하고,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과 교회 역사에서 공예배는 항상 사회문화 적응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공예배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 반복적으로 대립한다.

 

3. 사람들이 소통하고 삶을 나누는 사회와 문화현장이 예배에 들어와야 하고, 나아가 교회공동체 밖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생생한 정황들이 예배의 주된 흐름이 되어야 한다는 일련의 새로운 예배운동의 요구가 은연중에 공예배의 매우 중요한 일부가 된 ‘간증’으로 표현되고 있다.

 

 

4. 역사적으로 교회의 공예배는 세 가지 요소들에 의해 형성돼 왔다. 첫째, 성경에 대한 존중이다. 이것은 동시에 성경을 읽어왔던 앞선 교회와 교회들에 대한 존중과 회복을 의미했다.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예배 전통조차도 배우고 수용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과 함께 앞선 교회 전통을 깊이 존중해야 한다. 둘째, 교회에 주어진 자유와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 성경에서 공예배의 모든 구성과 순서에 대한 명백한 형식이 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예배 구성은 항상 교회의 자유에 어느 정도 맡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항상 화평과 질서 속에서 공예배를 구성해야 하는 의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 사회문화적 적응성이다. 이는 교회가 처한 현실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예배에 참석하는 참여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5. 우리는 이런 세 가지 측면들을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개혁주의자들이 구성한 공예배를 단순히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좀 더 풍성한 개혁주의적 공예배를 구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밀려오는 새로운 예배운동의 도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예배 전통의 확장과 풍성함을 추구하는 한 걸음으로 ‘간증’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6. 전통적인 개혁주의 혹은 장로교회의 공예배에서는 정해진 순서로서의 간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칼빈은 사도행전 4장 24절에 근거해서 초대교회는 그 집회에서 반드시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를 드리며, 성찬에 참여하며 구제하는 것을 정해진 규칙으로 삼았다고 증거한다.

 

7. (예배신학적 접근) 간증은 개혁자들의 공예배 구상에서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전통적인 장로교회의 공예배에 자리 잡을 수 없는 요소를 갖고 있는가? 첫째, 개혁자들이 생각한 ‘은혜의 방편’과 관련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8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은총의 외적 방편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서 그것은 그가 제정하신 말씀, 성례 그리고 기도이며, 이 모든 것들이 구원을 위한 효력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현재 공예배에서 간증이 주는 혼란은 마치 은혜의 방편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8. 생생한 삶의 나눔이 예배 참석자들에게 공감과 감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예배에서 은혜가 주어지는 통로처럼 인식될 수 있다. 더불어 교회의 다스림을 다룬 벨직 신앙고백 30장에서는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성례는 사역자들(ministers)과 목회자들(pastors)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개혁의 예배는 은혜의 방편들이 직분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직분자 아닌 회중 가운데 한 개인이 말하는 ‘간증’은 장로교회의 공예배에서 애매한 위치를 갖고 있고, 따라서 은혜의 방편으로서도 아니고, 회중전체의 응답도 아닌 간증은 장로교 공예배에서 낯설게 선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9. 둘째, 예배의 목적과 관련된다. 마르바 던(Marva Dawn)은 많은 목회자들이 어떻게 하면 예배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 흥미진진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것은 예배와 전도를 심각하게 혼돈하고 양자를 모두 크게 훼손한다고 여겼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무한한 광휘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라고 보기에 이 목적 외에 다른 중심을 갖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10. 자칫 현재 이루어지는 간증에서는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와 공감을 통한 사람들의 만족, 믿지 않는 사람도 동감할 수 있는 호소력에 중심을 두는 경향이 있기에 이는 원래 예배가 목적하는 바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간증자 개인에게서 일어난 일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예배의 초점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간증자나 간증 내용 자체, 혹은 간증이 주는 감화에 모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11. 셋째, 개혁주의자들은 예배에서 하나님 백성 전체로서 회중 모두가 하나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함을 강조했다. 개혁은 예배에 참석한 성도를 침묵의 늪에서 건져내어 언약의 실질적인 한 상대자의 자리에 앉혔다. 이런 점에서 개혁의 예배는 그 어떤 현대적인 예배보다도 회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의도했다. 더불어 개혁자들은 하나님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공동체성을 매우 강조했다. 이런 개혁자들의 예배에 비추어 현대 예배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12. 현대 예배는 자아를 풍성하게 하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나의 체험을 위한 자리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예배는 이 감정적 체험이 채워져서 은혜 받고 돌아가는 군중 속의 고독한 개인들의 임시적인 만남의 자리가 된 것이다. 현재 이루어지는 간증은 자칫 하나님 백성 전체로서의 한 회중이라는 공동체성보다는 예배의 이런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강화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갖고 있다.

 

13. (역사적 접근) 역사적으로 교회에 도입된 원래 간증은 회심 후 이루어지는 회개의 고백 성격이 강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간증이 시작됐는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간증의 단초는 죄의 고백과 회개의 장으로서 공적인 고백이라고 보여진다.

 

14. 1628년 북아일랜드의 Ulster지방에 살던 리빙스턴의 기억을 따른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는 Blair 목사를 찾아온 몇몇 사람들의 경우가 소개된다. 사악함을 숨겨온 이들이 설교를 듣고 양심이 깨어나 고백한 후, 새로운 여생을 살았다는 실례를 전한다. 여기에 소개된 ‘public profession’이 정확히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 는 없지만 자신에 죄에 대한 심각한 회개와 자백을 먼저 목사에게 밝히고, 그것을 공예배에서 간략하게 고백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5. 한국 교회 초창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등장한다. 하디는 1903년 9월 주일 아침에 원산교회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마음의 강퍅함과 참된 신앙의 부족에 대해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것이 몇 몇 사람들의 회개 간증으로 이어졌다.

 

 

16. 1907년 평양에서는 10일 간의 사경회가 이루어졌는데, 저녁 부흥집회는 간증으로 시작됐다. 간증순서에는 보통 공중고백의 형태를 취해서 집회 도중 한 사람이 들은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느끼고, 모든 사람 앞에 나아가 공적으로 죄를 고백하면 참석한 자들은 하나님께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눈물로 기도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미국 부흥에서 등장했던 유사한 내용과 형식의 간증이 한국 교회 사경회 안에서 정착했다.

 

17.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간증의 단초는 이와 같이 예배의 자리에서 공적으로 행해지는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자복, 고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한 찔림과 반응으로서의 회개와 자복의 성격이 강했던 이런 간증은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과 성결운동을 거치면서 내용과 형식 면에서 변화하게 된다.

 

18. 피니와 그의 측근들은 매우 실용적인 예배를 구성했다. 여기서 효과적인 일은 바로 회심이었고, 따라서 예배와 설교의 주된 목표가 회심에 맞춰졌다. 주일 공예배는 찬송, 설교 그리고 새로운 회심자들을 수확하는 세 부분으로 단순화됐다. 성례는 계몽운동과 도덕화를 위한 도구, 곧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선한 삶을 위한 운동의 동력으로 사용됐다.

 

19. 이런 간증의 목적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찰스 피니도 참여한 성결운동이었다. 1835년 뉴욕시에서 감리교 평신도인 사라 워랄 랭크포드가 제2의 체험을 하고 그것을 간증함으로써 시작된 집회는 성결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이 때 간증은 성화에 대한 개인의 체험을 공적인 예배에서 말하는 것이 됐다.

 

20. 하지만 부흥운동과 성결운동에서 행해진 이런 간증은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냈다. 가장 심각하게 교회에 어려움을 준 것은 간증자들이 너무나도 급속하게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간증자들의 체험을 도구 삼아 또 다른 회심과 제2의 체험을 고무하려고 했던 시도는 때로 간증자들이 타락하고 성숙한 자가 아니었음이 증명되면서 교회의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

 

21. 이와 같은 역사적인 추적은 간증에 대해 몇 가지 점을 되짚게 해준다. 첫째, 간증이 회심을 불러 일으키고, 주관적인 제2체험을 불러일으키는데 사용된 것처럼 소위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둘째, 간증의 초점이 간증의 지극히 내면적인 회개 감정과 자복에 모아질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셋째, 간증이 부흥을 일으키는 ‘인위적인’ 수단으로 사용되는데서 오는 신학적인 거부감과 간증자들이 과거의 패괴한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겨서 공동체를 어렵게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간증은 장로교 전통, 특히 구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22. 간증이 가진 이런 위험한 측면들 때문에 공예배 시간에 무분별한 간증이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간증을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보고 정의, 정리하는 작업 또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23. (간증의 가능성에 대한 성경적 논증) 시편은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말하는 일종의 간증이다. 시편은 예배를 전제한다. 다윗의 고백과 같은 시편들은 그야말로 회중 속에서 회중과 함께 이루어지는 예배 속의 ‘간증’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과 언어를 사용하지만 예배 중에 회중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과 신실함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일부 시편은 결국 모든 것을 ‘주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을 대대로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24.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통해 간증한다. 그는 사도행전 22장과 26장에서 자신의 회심 사건을 자신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첫 단추를 여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한다. 그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자신의 경험한 ‘개인’의 회심사건을 상세하게 간증한다.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회심 사건을 간증하되,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셔서 행하신 모든 일의 일부로 보고 있다.

 

 

25. 시편과 사도행전의 구절들은 간증이 지향해야 할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적인 언어로 구체적인 ‘나’의 곤고와 핍박을 말하고, 거기로부터의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경험’을 말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과 변화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기이한 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신 일로 보고 증거하며 찬송하고 있다. 간증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되,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하나님께 속한 일을 고백해야 한다.

 

26. ‘권면’으로서의 간증도 있다.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초대교회 공예배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권면하는 일이 일차적으로 사도에게 속한 것이지만 성도들 또한 서로서로를 권면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하나씩 하나씩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잠잠하면서 분별하는 예언은 교회를 세우는 교훈을 말하고, 권면과 위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경험이나 주관적인 계시, 개인의 운명에 대한 예측보다는 복음 그 자체나 복음적 내용을 공예배때 말함으로써 교회를 세우고 서로서로를 권면했던 순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27. 이와 같이 간증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면 공예배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간증의 ‘나’의 일, 상황, 아픔, 기쁨, 눈물, 고통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나’의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에 의존해 있고,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기이한 일을 말해야 한다. 곧 개인화되어 있지만 개인에 매몰되지 않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큰 일을 끌어안아야 한다.

 

28. 간증은 복음과 복음에 해당하는 내용을 말해서 교회를 세우는 권면과 위로가 되어야 한다. 한 마디로 복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함께 성취하신 일인데, 이는 시편이 말하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과 같은 것이다. 찬양과 기도와 마찬가지로 간증도 성경적인 내용을 말함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 곧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간증은 공예배에서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이상 행해질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예배운동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장로교회의 공예배를 풍성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내용은 개혁신학회가 지난 2011년 4월 9일 한울교회에서 ‘한국교회 예배, 이대로 좋은가?’를 주제로 개최한 ‘2011년 봄 학술대회’의 발표된 내용 중에서 일부 발췌 및 요약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경우 해당 단체에 문의하면 된다.

 김재윤, “간증, 장로교회의 공예배에서 가능한가:간증이 공예배에서 시행되는 일에 대한 시론적 접근”, 개혁신학회-봄학술대회, 2011년 4월 9일, 경기:한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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