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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원문]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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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

 

2014년 5월 7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기독교통일학회와 평통기연이 지난 5월 5일부터 6일까지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 ‘통일 before & after’를 주제로 개최한 ‘제3회 기독청년대학생 통일대회’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제공 단체(자)와의 협약에 의해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제공하지만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편집자 주>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 / 최현범 박사(부산중앙교회 담임)

 

1. 통일에 대한 환상 깨뜨리기

동구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우리에게는 한반도의 통일도 임박했다는 기대가 컸었다. 물론 그런 기대의 이면에는 독일과 같은 방식의 흡수통일이 전제되어 있었다. 1993년에 집권한 김영삼 정권 당시는 북한 정권의 붕괴를 대세로 생각했고, 통일정책을 이 전제위에 세우려고 했다. 북한 역시 동구권의 몰락 가운데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를 갖고 보다 적극적으로 남한과의 대화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독일 통일 20주년을 넘긴 지금, 그것은 일종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기간 우리는 통일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고, 훨씬 많은 준비와 인내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독일의 통일을 숙고해보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행운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 통일의 터를 착실히 닦아온 길고도 지루한 수고와 인내의 과정이 있었다. 독일은 우리와 다른 상황이 많기에 독일통일이 우리에게 모범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와 비교할 수 있는 기준점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일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무엇보다도 우리는 북한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제적인 낙후와 세계적인 고립 가운데서도 북한은 나름대로 생존법을 터득해가고 있다. 핵무기개발도 그 중의 하나 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철저한 전제국가이다. 오렌지혁명, 튤립혁명, 재스민혁명 등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 다양한 혁명들이 성공하고 있지만, 북한은 끄떡하지 않는다. 북한사회 저변에는 그런 혁명의 기반이 전혀 조성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북한정권은 나름대로 주민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고, 사상교육으로 그들의 사고를 통제함으로 반체제 그룹형성이나 세력화를 어렵게 하고 있다. 가난과 기아 속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세뇌된 북한 주민들의 실상은 흡수통일의 가능성을 일축할 뿐 아니라, 통일이 된 후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독일의 경우 우리보다 훨씬 짧은 45년(베를린장벽부터 시작한다면 불과 30년 정도)의 분단세월이었지만, 막상 통일이 되어 뒤섞이니 '베시'와 '오시'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양 국민들은 이질감은 컸다. 뿐만 아니라, 통일 후 4년 뒤에 치러진 총선에서 옛 동독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이 동독지역에서 무려 18.2%의 지지를 얻으면서 독일전체를 놀라게 하였다. PDS는 그 후 사민당에서 분리된 WASG와 2007년 합당하여 좌파정당(Die Links)으로 개명하면서 전국정당이 되고 현재는 제1야당으로 건재하고 있다. PDS의 건재와 약진은 동독주민들이 사회주의를 쉽게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독주민들이 이럴진대, 북한은 어떠하겠는가? 북한주민들 속에 배어있는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을 바꾸는 데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한다.

 

 

그러므로 일부사람들이 희망하듯이 북한정권의 갑작스런 붕괴의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혹시 그런 이변이 일어나 국가운영체계가 무너지거나 아예 무정부상태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다. 굶주린 수백만 명의 부인들이 아이를 업고 휴전선을 내려온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도 없거니와 주체사상으로 물든 이천오백만 북한 주민을 통제하여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 끌고 올 수 있을까?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 우리 정부가 보여준 위기대처능력의 현주소는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다. 더 나아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그저 손을 내려놓고 우리가 뜻하는 대로 끌고 가도록 방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국민의 감정 속에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통일은, 하루빨리 북한이 붕괴되고 아무런 저항세력이 없는 가운데 평화롭게 북한 땅을 접수하며, 북한주민들이 그들의 공산주체 사상을 다 내버리고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얌전히 우리의 통제와 지시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의 자본과 기술력, 북한의 자원이 통합되어 세계 10위를 넘어서 5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과는 유리된 이상과 꿈에 불과할 뿐이다.

무력통일은 모두가 망하는 길이고 흡수통일 역시 우리에게 커다란 재앙이 된다면 남은 답은 평화적인 통일밖에 없다. 그리고 그 통일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많은 준비와 인내를 필요로 하고 나아가 많은 포용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가급적 빨리’라는 단어에 매달리지 말고 차근차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갖고 통일을 생각하자.
평화통일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서로를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와 협상에는 서로가 주고받는 것, 요구하고 양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일부를 비워서 상대방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이 공간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통일을 위한 중요한 준비 작업이다. 그러므로 변화는 북한과 우리에게 서로 필요하다. 북한 사회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남한 사회의 변화도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에 한국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 북한 사회의 변화를 위한 노력과 교회의 역할

평화로운 통일의 전제조건은 북한주민들의 변화이다. 북한이 지금의 이런 모양으로 남한과 합쳐지는 것은 통일이 아니라,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북한의 변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변화가 있었고, 또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다. 여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보다 적극적인 민간 교류이다.

남과 북은 7.4공동성명(1972)을 통해 분단이후 처음으로 통일의 기본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에 남한은 유신체제로, 북한은 수령체제로 돌아서면서 빛바랜 성명이 되고 말았다. 이후 각 정권마다 통일을 위한 별 차이 없는 선언이 반복되다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 남북정상이 만나고 6.15선언(2000) 10.4선언(2007)에 합의하였다.
이처럼 지금까지 통일운동은 국가기관과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어왔고 그로인해 명백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치논리를 앞세우는 정치인들의 경우 통일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고 심지어 통일을 자신의 정략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일도 많았다. 최근에 와서는 이전 정권의 통일정책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북한과 합의한 공동성명까지도 부정하는 등 통일에서 퇴행을 거듭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제는 통일의 주도권을 정치권에서만 쥐고 있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통일은 민족전체의 과제이면서 통일운동은 민족전체가 함께 참여해야할 일이므로 가급적 시민 참여의 외연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좌파나 우파를 떠나 장기적으로 남북한 모두에게 좋은 통일 밑거름이 될 것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이러한 교류를 통해서 식량을 비롯한 경제적인 도움을 받게 되고, 남한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류의 확대를 통해 북한의 밑바닥 민심이 바꿔지고 북한주민들의 사고가 변화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특별히 빌리브란트의 동방정책이후 정치적인 분야 이외에 광범위한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다. 특별히 지속적인 경제교류는 둘 사이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양측 간 경제교류 규모는 연 평균 75억 달러에 달해서 동독의 대서방 교역의 40~50%를 차지했다. 청소년교류도 빈번하여 서독청소년들이 동독으로 1년에 877회(1987), 1090회(1988) 보내졌다. 동독은 서독으로 많이 보내지 않았지만, 동서독청소년들의 만남은 동독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겠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1985년 이후에는 동서독 간 총 62개 도시가 자매결연 하였고, 이를 통해 주민간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우편통신은 1976년 이후 급격히 늘어나 연간 서신 2억 통과 1,500개가 넘는 전화회선이 유지되었다. 그 외에 방송 언론, 과학 기술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1973년 협상이 시작된 문화협정은 1986년에 체결되어 이후로 문화 각 분야에서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모든 교류의 과정에서 동독은 서독의 비공식지원을 합쳐서 연평균 23억 달러(2조4000억 원)의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민간교류가 동독인들로 결코 공산주의에 종속된 채로 있게 만들지 않았다.


독일과 우리의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변화된 여건이 있다. 북한은 이제 더 이상 완전한 폐쇄국가로 존재하기 어렵다. 휴전선은 막혀있지만, 중국과의 국경선은 열려있다. 중국은 정치적인 민주화 이외에는 자본주의와 자유의 나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런 사회변화에 점차로 익숙해지는 중국인들과 조선족들이 이 국경선을 넘어 북한을 왕래하면서 많은 정보들이 흘러가고 있다. 남한의 드라마와 노래 등 한류문화가 북한을 잠식해가고 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전화나 인편을 통해서 북한에 있는 그들의 가족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개성공단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한 상황으로 가장 모범적인 통일 사업이다. 여기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가 5만 명(2013년)으로 4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개성인구 38만 명(1999년)중 20만 명이 연계된 셈이다. 북한 전역에서 개성사람들이 가장 부유하게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고 개성공단드림이라는 말도 생기고 있다. 이러한 공단들이 북한 도시에 자꾸 확산이 되는 것이 필요하며 정부는 이를 위해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외에도 교회를 비롯한 민간교류들이 활발하게 일어나 북한에 대한 지원과 아울러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이후로 정부는 정치적인 갈등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민간지원과 교류를 볼모로 삼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 결과로 금강산관광을 폐쇄하고 5 24조치로 모든 교류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민간교류의 희생은 남북관계에서 현안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갈등의 골을 더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동안 쌓아온 통일의 중요한 기반들을 무너뜨리는 퇴행적인 통일정책이었다.

 

 

이제 정부는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 의료, 비료 등의 지원을 늘리고, 민간인 교류를 적극적으로 확대시켜가야 한다. 문화, 예술, 체육, 농업, 학술, 교통, 청소년, 구호단체, 시민단체 등 여러 분야 다양한 분야에서 북한의 유사 기관들과 교류하거나 연계를 가져서 만나고 활동하도록 도와야 한다. 금강산 관광도 재개하고 백두산관광도 의논하며 가급적 건수를 만들어서 남과 북이 서로 더 많이 교류하고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 정부는 사소한 신경전에 매달리기보다는 좀 대범한 태도가 필요하다. 정치적인 만남은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서 거절하거나 보이콧할 수 있겠지만, 민간교류는 정치사안과는 철저히 구별하여 어떤 경우에도 차단하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적극적으로 장려해서 열어주어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민간교류에 들어가는 돈을 낭비로 생각지 말고 통일을 위한 투자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이면서 유진벨 재단을 통해 오랫동안 북한에 의료지원을 했던 인요한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 정권의 햇빛정책은 '퍼주기 식'이라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경제 제재와 고립을 통해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 정책이 무슨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생각이 짧은 것 같아요. ... 그리고 '퍼주기'는 없어요. 서독이 동독을 도운 것에 비하면 그 36분의 1도 안 됩니다." (조선일보 2009-04-06) 옳은 이야기이다.


남북정상이 만나는 것이야 몇 달 준비해서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정파를 초월해서 꾸준한 인내를 갖고 추진해가야 한다. 그러므로 해가 갈수록 민간단체들의 교류와 구호활동의 폭은 더욱 확대되고 그 질은 더욱 발전해가야 한다.
여기 교회의 역할이 크다. 교회는 그 어느 단체보다도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갖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는 길이 열리기만하면 북한주민들을 돕고 섬기기를 원한다. 정부가 이러한 잠재력의 물꼬를 터준다면 장기적으로 통일을 위한 기반조성에 큰 힘이 될 것이다.

3. 우리사회의 변화를 위한 노력과 교회의 역할

우리나라는 여야의 정권교체를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보수당의 장기집권 때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사회정치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대립에 의한 사회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다. 이념의 극한 대립은 통일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한다. 과거 진보정권의 주도로 북한과 합의 된 것이 보수정권으로 들어와서는 거의 폐기처분되다시피 하는 현상에서, 오늘날 통일을 가로막는 장애가 남북갈등보다 오히려 남남갈등에 더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독일과 달리 이념에 의한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겪었다. 1953년 휴전 이후 북한은 말할 나위도 없고 남한 역시 40년이 넘는 독재정권 아래서 자유로운 사고와 의견개진이 불가능했다. 오랜 기간 비민주적인 정권들은 언론을 통제하고 진실을 왜곡하면서 국민들 속에 반공을 국시로 각인시켰고, 이를 위해 인권과 자유와 민주 그리고 나아가 통일의 가치를 희생시켰다. 특별히 군사독재정권에서는 권위와 명령에 의한 획일적인 문화가 사회전반을 지배하면서 우리 국민들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통합을 이루어가는 기술을 훈련받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자연히 우리 사회는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보수가 양산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진보정권하에서 소위 수구세력으로 결집되었다. 반대편에 서있는 진보세력들은 선명성과 투쟁성을 강조하면서 타협을 배타시하는 속성에 젖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중도 층보다는, 오히려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보수와 진보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올해 초 갤럽이 한국의 정치성향을 조사했을 때, 한국인 중엔 약 98%가 자신을 '진보' 혹은 '보수' 중 하나라고 명확하게 정의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우 자신을 매우 유연한 '중도'라고 일컫는 유권자가 국민의 절반 이상(50.7%)을 차지하는 것과 비교된다.

진영논리에 갇혀진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를 절대화하고 자기가 믿고 확신하는바 외에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들은 대체로 사건의 진실보다는 그 사건이 주는 이미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실을 진지하게 알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바를 뒷받침 해줄 정보만을 들으려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정보들은 또 다시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절대화하는데 악용되는 것이다. 정치인과 일부언론들은 이러한 속성을 잘 활용해서 이미지정치와 선정적인 기사로 오히려 국민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회는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전반에서 분열과 갈등이 일상화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 대단히 힘들다. 이것이 통일에 큰 영향을 미쳐 국민적 합의가 바탕이 되지 못한 채 중대한 사안이 추진되고 그것이 정권이 바뀌면서 백지화되는 등 어느 정도 유지되어야 할 정책의 일관성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평화통일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독일 사회는 히틀러의 나치시대를 거치면서 획일성의 위험을 보았다. 히틀러는 전제주의적 나치이념을 모든 사회영역에 주입시켜 획일화하려 했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거기에 잘 길들여졌다.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있어서 독일국민 전체가 집단범죄(collective sin)의 과오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전후 독일은 철저한 과거사정리와 참회를 통해 과거 전제주의의 폐해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어떤 이념에도 쉽게 종속되지 않는 비판력을 양성했다. 아울러 관용과 평화교육을 통해 서로 다른 인종, 민족과 서로 다른 사상이 뒤섞인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민의식을 키우고 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였다.

독일의 정치구조 역시 다수당인 기민/기사련과 사민당이 여당과 야당으로서 서로의 정책을 차별화하며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지만, 지금과 같이 두 당이 연정을 이루면서 함께 내각을 구성하여 동역자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적이면서도 동시에 동지의 관계가 되다보니 항상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함께 공존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 결과 독일은 과거에 끊임없이 갈등과 대결을 벌였던 민족, 국가들과 유럽공동체라고 하는 거대한 연합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주역이 되었다.


이러한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안목과 관용의 정신 그리고 평화교육은 독일통일에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정부가 통일정책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 특히 매년 천문학적인 재정이 동독으로 흘러감에도 사회적인 분열을 야기 시키지 않았고 분쟁 없이 평화롭게 통일하는데 보이지 않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또한 통일 후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를 갖고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구동독주민들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여유를 갖게 만든 것이다.

 

 

특별히 독일교회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차 대전 후 새롭게 형성된 냉전체제에서 또 다시 전쟁의 위험이 고조될 때에, 많은 지식인들과 신학자 목회자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일방적인 정치논리에 동조하지 않고, 동서화해와 이념갈등의 극복을 위해 힘썼다. 물론 루터주의자를 비롯한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미국중심의 반공논리에 충실히 서있었지만, 과거 나치에 저항했던 고백교회와 바르멘신학에 충실했던 자들은 맹목적인 반공주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바르멘선언은 독일 개신교의 사회윤리의 근간이 되었고 바르멘신학자들이 독일교회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핵심은 바로 이데올로기 비판이고 모든 정치적인 시스템이나 원리를 상대화시키는 것이었다.

가령 E. Brunner의 경우 동유럽의 공산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 반면, K. Barth는 동서갈등을 소련과 미국, 공산주의와 반공주의 사이의 이념적인 권력투쟁으로 이해했고 교회는 그러한 권력투쟁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교회는 결코 절대원리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영적으로 생각하고 상황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치적인 사건의 조직화나 그런데 참여하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Barth와 Brunner의 서신교환 1948-06-06) 교회가 하나의 정치 시스템 하나의 정치성향에 집착하는 것은 복음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정치이념이나 정치시스템의 상대화는 극심한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했던 서독과 동독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고 이것이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동독공산당의 핍박 속에서 교회가 축소되기는 했지만, 동독교회는 여전히 그 사회에 건재하고 있었다. 서독의 교회들은 이러한 현실을 적절히 잘 활용했다. 1949년부터 1969년까지 동서독의 교회는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EKD)이라는 하나의 조직 안에서 공존하면서 많은 교류를 추진하고 통일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독일교회의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동독정권은 1969년 동독교회를 동독개신교연맹(BEK)으로 묶어 EKD와 분리시켰다.

이후 동독교회는 사회주의와 공존과 비판을 겸하여 갖는 소위 ‘사회주의 안에 있는 교회’를 형성해갔다. 이때 서독의 교회는 이를 비난하지 않고 동독교회의 특수한 현실을 인정해주었다. 이것은 서독교회가 자신을 ‘자본주의 안에 있는 교회’로 생각지 않고, 자본주의라는 사회체계를 절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동서독교회는 서로의 관계를 ‘특수한 공동체’(Die besondere Gemeinschaft)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주어진 상황에서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했다. 성경과 예전을 일치시키고, 동독교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서독교회들이 동독목회자들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동서독교회는 독일에서 핵무기철거를 위한 운동을 함께 벌리는 등 정치적 사회윤리적인 분야에서도 동역의 끈을 이어갔다. 이러한 서독교회의 인내와 자기절제적인 노력은, 동서독정부에게서 신뢰를 얻어 프라이카우프(Freikauf)와 같이 양쪽 정부가 피차 드러내고 할 수 없는 일들을 은밀하게 진행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꾸준히 동역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동독의 교회들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고, 동독의 목회자들이 사회구석구석에서 반정부집회와 사회개혁의 리더가 되었다. 현 독일대통령 Gauk 역시 과거 동독의 개신교 목회자이며 인권운동가였다. 1983년부터 라이프찌히 니콜라이교회에서 매주 열린 평화를 위한 기도모임은 1989년부터는 무언의 촛불시위로 발전했고 이것이 통일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처럼 동독의 교회들이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서독의 교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어 그들을 품고 무언의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훈적으로 시사 하는 점이 많다. 한국교회는 과거 북한의 공산정권과 6 25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자연히 반공정신이 투철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많은 교인들이 공산주의를 정치의 한 이념과 형태로 이해하기보다는 마귀나 교회를 대적하는 영적원수로 영화(靈化)하면서 절대 악으로 치부했다. 언론인이면서 개신교인인 조갑제는 칼럼에서 “한국 교회의 다수 목사들은 김일성-김정일을 단순한 독재자나 원수가 아니라 '사탄의 세력'으로 봐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을 보인다. 원수나 독재자는 회개가 가능하므로 용서도 할 수 있지만 '사탄의 세력'은 척결 대상이지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고 썼다. (뉴데일리 2010-09-26)

 

우리나라의 많은 보수교회들 반공이념의 보루가 되고 많은 교인들은 반공을 하나님의 절대 진리로 믿고 있다. 이 상황을 분석하면서 강인철은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에서 우리나라의 ‘개신교 보수주의’는 신학적·정치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개신교 반공주의’의 틀로 보아야 깊고 넓게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개신교회는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보수 내지는 수구적인 정치세력의 후견인이 되어있다. 북한정권을 사탄의 세력으로 본다면 당연히 그들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저 무찌르고 없애야할 적일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평화통일의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특정 이념이나 특정 정치의 후견인의 역할에서 벗어나, 복음의 참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어떤 특정한 정치이념과 동일시되거나 종속될 수 없다. 그것이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종북이건 반공이건, 친미건 반미건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모두 시대적인 산물일 뿐이고, 세상정치의 작품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인 양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바르멘 선언 V는 모든 정치이론을 이성에서 형성되는 세상의 상대적인 원리로 선언한다. 교회는 한쪽에 이러한 세상 정치 이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주어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 둘 사이에 유비적 관계가 있으므로,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잣대로 하여 상대적으로 더 나은 정치를 잘 분별하고 그것을 선택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정치이론도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세상의 정치를 상대화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있고,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 정당이나 정치이념에 사로잡히거나 집착해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자리에 설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항상 무당파(無黨派)인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야말로 건전한 중도세력이 되어서 객관적인 판단을 좇아 때로는 진보 때로는 보수를 선택할 자유를 가진 자들이다. 나아가 완전한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나라에 속한 우리들은,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이 세상의 현실정치에 대해서 항상 사회비판적인 자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의 평화와 화해의 사도가 될 수 있는 힘이다. 교회는 합리적인 정치의식을 가지고 다양성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세워가야 할 책임이 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거절당하고 소외되었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사마리아인을 기꺼이 대화의 파트너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회 속에 실천할 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는 “너희가 서로 받으라”(롬15:7)는 말씀을 따라서 서로 다른 정치이념, 정당, 지역, 인종과 민족 앞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 사회적인 합의와 통합을 이루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통일에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한국교회가 이 시대에 평화적인 통일에 걸림돌이 아니라, 꼭 필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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