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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선교와 신학

[원문] 부산총회 이후 WCC의 영성:자연계에 대한 이해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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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박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2014년 5월 7일 기사

 

하단의 내용은 기독교학술원이 지난 5월 2일(2014년) ‘부산총회 이후 WCC의 영성’을 주제로 개최한 ‘제21회 영성포럼’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제공 단체(자)와의 협약에 의해 데오스앤로고스에서 독자들에게 제공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부산총회 이후 WCC의 영성:자연계에 대한 이해 
김명혁 박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부족한 사람이 주어진 제목에 대해서 제대로 발표를 할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저는 본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 저와 입장과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들을 심하게 비판하던 사람입니다. 1974년 귀국 후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비판을 했고 특히 WCC의 신학적인 입장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비판하던 사람입니다.

 

 

저는 1975년 12월에 “웁살라 총회 이후의 현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동향” 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 웁살라 총회에 모였던 WCC 총회가 “인간화를 선교의 목적으로 높이 주장한다” 라고 선언한 것은 심각한 과오를 범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저는 1976년 6월에 “나이로비 총회의 동향” 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존 스토트 박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WCC의 신학적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나이로비 총회가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강조했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1) 인간의 죄 가운데 있는 상태에 대한 깊은 인식, (2)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 (3)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구세주라는 확신, (4) 복음전파의 시급성, (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 그러나 나이로비 총회는 존 스토트 박사가 지적한 대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구세주를 인류에게 전하는 복음주의적 관심보다는 범 종교적 인도주의를 선양하는 일과 정치적 사회적 세상사 해결에 그 관심을 다 기울이고 말았습니다.

 

저는 1976년 9월에 “하나님의 선교 이후의 선교신학의 동향” 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 하나님의 선교 이후의 WCC 선교신학의 동향은 세속주의와 대화와 혼합주의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1979년 4월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변천과 그 동향 1” 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 WCC는 복음전도 보다는 사회봉사에, 구원의 선포보다는 대화에, 개종보다는 진리의 공동추구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저는 1979년 6월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변천과 그 동향 2” 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 뉴델리 WCC총회에서 보편주의적 내지 혼합주의적 선교의 개념이 표면화되었고, 보다 과격한 형명적 형태의 사회 봉사와 참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저는 1983년 9월 “세계교회의 동향: 휫튼, 암스텔담, 뱅쿠버 대회를 다녀와서” 라는 긴 글을 발표했는데 제가 세 국제대회에 차석해서 듣고 본 바를 바탕느로 뱅쿠버 WCC 총회가 “범종교주의적 하나님 추구”로, “땅의 신학”으로, “가난의 신학”으로 “여성신학”으로, “혼합의식”으로 흐르고 있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저는 뱅쿠버 WCC 총회를 참관한 참관기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습니다. “18일간의 WCC 총회기간 중 마지막 하루의 일정만 참석하지 못하고 비교적 충실하게 모든 모임과 행사에 참석하며 비교적 세밀하게 총회의 진행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미 지적한 대로 뱅쿠버 WCC 총회는 신학적 및 정치적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내포한 모임이었다. 물론 인류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을 낱낱이 파헤치며 가난한 자 및 억눌린 자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자는 극히 인도주의적 외침은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세계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

 

다문화, 다종교적 의식과 사회, 경제, 정치, 전쟁과 관련된 인도주의적 문제에 집착한 “땅의 신학”을 강화해 나아가는 WCC의 방향과 성경의 권위와 복음화의 시급성을 강조해 나아가는 복음주의적 방향으로 움직여 나아갈 것이다. 양자가 상호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WCC는 부분적으로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게 될 가능성도 있고 복음주의 운동은 WCC의 “땅의 신학”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저는 지금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주의교회가 그동안 등한시했던 사회 참여와 자연계 사랑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양자가 서로 건설적인 비판은 계속해서 주고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991년 3월 17일 기독교연합신문에 “정현경 교수의 WCC 주제 강연에 대한 평가” 라는 글을 실으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비판을 했습니다. “(1) 몸의 움직임으로 영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2) 무속적 정령 신앙을 내세웠다. (3) 성령을 관음보살과 연계했다. (4) 땅의 신학을 주창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시대를 바로 분별하여야 하겠다. 성령을 말한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의 성령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성을 말한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의 영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만을 강조하고 이 세상의 모든 종교(무당종교까지)를 포용하며 이 세상 안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의 불가피성을 말하지 않으며 천국의 소망을 말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세계복음주의 교회들의 신앙적 각성이 시급히 요청되며 한국복음주의 교회들의 시대적 사명이 어욱 더 중차대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또한 1991년 3월 24일 기독교신문에 “스텐달 교수의 WCC 주제 강연에 대한 평가” 라는 글을 실으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비판을 했습니다. 즉 성령을 인격이라기 보다는 에너지로 보고, 성령의 사역을 회개와 중생을 통한 영생이라기 보다는 우주를 새롭게 하는 사역으로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하나로 묶는다기 보다는 온 인류와 종교를 하나로 묶는다고 보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제가 WCC의 신학적인 입장을 전문적으로 비판하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는 언제부터인가 강원용 목사님을 이해하면서 존경하게 되었고 조용기 목사님도 이해하면서 존경하게 되었고 WCC에 속한 분들도 이해하면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단이 아닌 기독교 단체들이나 사람들과 서로 교제하면서 서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이 저의 이 말을 아주 재미있는 말이라고 여러 번 인용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로마 카톨릭이나 희랍 정교회나 WCC 와도 교제하면서 서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애정 어린 비판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번 부산 WCC 총회에 착석하면서 11월 5일 오후 “Unity of the church in changing ecclesial landscapes of World Christianity–Theological (and personal) perspectives from the Korea Evangelical Fellowship” 이라는 제목으로 강의까지 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타 종교인들과도 교제하고 협력하면서 사회와 민족과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3.1 운동을 일으켰던 민족의 지도자들인 이승훈 선생님과 길선주 목사님은 타 종교인들과 협력하면서 독립운동과 평화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WCC에서 배워야 할 점들 중의 하나는 사회적이고 세계적이고 생태적이고 우주적인 관심과 연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에게만 있지 않고 자연계 전부에게로 향하고 있는데 우리 개신교회 특히 보수교회들은 이 점을 소홀이 하며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로마 카톨릭교회와 WCC가 강조하는 아니 성경 말씀이 강조하는 자연계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산에서 열린 제10차 WCC 총회는 결의문을 발표했는데 자연계와 생태계에 대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온 피조물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신다(고전15:28)는 우리의 믿음을 천명한다. 피조물의 탄식과 가난한 자들의 애통함은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생태적 긴급 상황이 풍성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과는 얼마나 적대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경고해 주고 있다. 통제 없는 경제성장은 기후변화, 벌목, 대양산성화, 생태 다양성 실종 등 우리의 생태환경의 흐름을 교살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시24:1, 고전10:26) 이라는 관념은 이제 사라지게 되었다. 많은 교회들이 번영의 신학, 자기의 의, 지배, 개인주의, 편의성에 대해 계속 가르치고 있다. 생태 파괴의 현실이나 희생자들의 곤경을 외면하기도 한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모두를 위한 생명의 약속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 만들기에 헌신하는 교회와 운동에서 이런 부활 소망의 증거를 본다. 우리는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하나님의 온 창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증진시켜야 한다. 우리는 생명을 지속시키는데 필요한 공기, 물, 땅, 그리고 에너지 자원을 보존하는 모든 결정 과정에 모두의 참여를 증진시키는 생명 경제를 빚어 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자연계 사랑”에 대해서 제가 항상 생각하고 말하며 글을 쓰곤 하는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만 사랑하시지 않고 자연 만물을 세밀하게 섭리하시며 사랑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에 풍족하도다 저가 을 위한 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임이여 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여호와께서 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시104:10-19). “저가 으로 을 덮으시며 을 위하여 를 예비하시며 산에 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시147:8,9).

 

 

구약 성경은 자연계의 위치를 매우 높게 자리매김했습니다. 자연계를 마치 사람들처럼 말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사람들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살아있는 존재들로 묘사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은 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1-4). “와 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찌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찌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과 기는 것과 나는 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의 모든 사사며 청년 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에 뛰어나심이로다”(시148:3-13).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찬부께서 기르시나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6:26,30).

성 프랜시스는 늑대를 비롯한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어느날 프랜시스의 일행이 간나리오 라는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때 언덕 위 숲 속에서 참새 떼들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습니다.

 

프랜시스는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저 참새 자매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오겠습니다.” 프랜시스는 언덕으로 올라가서 참새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참새 자매들이여,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려고 합니다. 잠시 조용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요란스럽게 지저귀던 새들이 일제히 소리를 그치고 조용해졌습니다. “나의 작은 자매들이여, 여러분들은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매들을 만들어 이 땅에서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부드러운 깃털로 옷 입혀 주셨고, 두 날개를 활짝 펴서 푸른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며, 농사하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또 아름다운 숲 속을 보금자리로 삼고 살도록 편안히 자고 깰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 여러분들의 목소리처럼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새들은 프랜시스가 설교하는 동안 머리를 갸우뚱 하고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자, 아까는 여러분 마음대로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봅시다.” 그러자 그토록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듣던 참새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참새들을 작은 자매라고 부르며 사랑했고 특히 종달새와 비둘기를 귀엽고 순결한 자매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주역인 요나단 에드워즈는 자연 만물을 바라보고 명상하면서 하나님의 손길과 임재를 느끼곤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은 점점 증가되고 더욱 더 생생해졌다. 하나님 인식에 대한 내적 달콤함이 점점 더해갔다. 사물의 모습이 모두 바뀌어졌다. 모든 사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고요함과 달콤함이 나타나 보이는듯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지혜와 순결과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보이는듯했다. 나는 가끔 앉아서 달을 쳐다보곤 했고 낮에는 구름과 하늘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창조주와 구속주를 명상하곤 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자연계를 사랑하지도 돌보지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발을 빌미로 자연계를 학대하고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물과 식물과 공기와 물과 흙을 아프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처럼 시편 기자들처럼, 예수님처럼, 프랜시스처럼, 요나단 에드워즈처럼, 한경직 목사님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계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자연계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은퇴 후 남한산성에 가서 20여 평의 작은 집에서 사시면서 자연의 품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26년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시다가 하늘로 가셨습니다.

제가 2011년 7월 18일에 “동물 사랑, 식물 사랑, 자연 사랑, 사람 사랑” 이란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동물과 식물과 자연과 사람을 조금씩, 조금씩 사랑하며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곳 저곳에서 개들을 만나면 가까이 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을 것을 주곤 했다. 물론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다음 언제나 남은 음식을 비닐 봉지에 싸 가지고 다니다가 길가나 집 근처에서 만나는 개들에게 다가가서 먹을 것을 주곤 했다. 내가 만난 개들은 그들의 배경이나 신분이나 모양이나 성격과 상관 없이 내가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을 것을 주면 곧 부드러워져서 반가움을 표시하며 먹을 것을 받아 먹곤 했다. 좀 사나운 개들도 있다. 그러나 곧 태도가 바뀌어진다. 어느 곳의 개는 좀 사나워서 가까이 가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좀 사나워 보이는 개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을 것을 주면 곧 사나운 태도를 바꾸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다. 요사이 한국에는 전처럼 길가나 집 근처에서 개들을 많이 만날 수는 없지만 중국 연변 지역에는 지금도 개들이 길 거리와 집 근처에 많이 있다. 내가 거의 매년 연변지역을 방문하여 고아 아이들을 돌아보곤 하는데 그곳에서 만나는 개들에게도 음식을 주곤 했다. 최근에 내가 음식을 먹은 후 남은 음식을 비닐 봉지에 넣자 나와 동행한 조선족 현지인이 개들에게 주려고 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더니 작년에도 내가 개들에게 먹을 것을 주곤 해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훈춘의 어느 농장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식탁에 놓여있는 남은 음식들을 봉지에 싸 가지고 농장 이곳 저곳에 있는 크고 작은 개들에게 나누어준 일이 있었다. 그 개들이 내가 다시 지나가면 나를 바라보면서 더 달라는 애타는 모습과 소리를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최근에 내가 집 사람과 제자 목사 부부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수지 근처 광교 산에 오른 일이 있었다. 산 중턱에 오르자 큰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주변에는 집도 없었고 사람들도 없었다. 어디서 온 개인지 모른다. 나는 즉시 그 개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경계를 하는 듯 하더니 곧 안심하고 내 손에 자신을 맡겼다. 한 참 머리와 목을 쓰다듬어주니까 조금 후에는 자기의 온 몸을 나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아예 내 앞에 들어 누어서 내가 자기의 온 몸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앞에 들어 누운 개의 머리와 목과 가슴과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피차 즐거움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그 때 찍은 재미 있는 사진들이 있다.

“개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요사이 한국에는 전처럼 길 거리나 집 근처에서 개들을 많이 만날 수는 없지만 그 대신 길 거리나 집 근처에서 고양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식당에서 싸 가지고 나온 남은 음식들이 자연히 개들에게서 고양이들에게로 옮겨 가게 되었다. 고양이는 개와는 좀 다른 동물이라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모두를 경계하는 좀 예민한 동물이기는 하다. 그러나 먹을 것을 주면 아주 좋아한다. 달려 들면서까지 때로는 소리를 지르면서까지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수지 집 앞에 조그만 산이 있는데 그 산에 사는 고양이들 대 여섯 마리가 있다. 최근에는 새끼를 서너 마리 낳았다. 내가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시작했는데 내가 외출했다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차 소리를 알아듣고 고양이들이 달려온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비닐 봉지에 싸 가지고 온 고기나 생선 남은 것들을 고양이들에게 던져주면 모두 달려 들어 맛있게 먹는다. 음식 남은 것들이 없을 때는 차 트렁크 속에 넣고 다니는 참치 캔을 뜯어서 던져주곤 하는데 고양이들은 참치를 그 무엇보다 제일 좋아한다. 보통 음식을 던져주면 입에 물고 어디론가 뛰어 가서 먹은 다음 다시 와서 먹는데 참치를 주면 뛰어가지도 않고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이 그 자리에 함께 머물면서 국물까지 다 먹어 치운다. 몇 년 전에 일본에 며칠 다녀온 일이 있었다. 마지막 날 일본 교회의 목사님들이 나를 환송하며 식사 대접을 극진하게 했다. 일본에서 보통 때는 남는 음식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날엔 식탁에 남은 음식이 많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남은 생선들을 비닐 봉지에 싸기 시작했다. 일본 목사님들이 그것을 왜 싸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맛있는 일본 음식을 한국에 있는 고양이들에게 가져다 주려고 싼다고 했다. 그랬더니 코리언 고양이들이 자파니즈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남은 음식을 모두 다 싸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까지 무사히 가지고 왔다. 사실 음식물을 싸 가지고 비행기를 타면 안 되는데 일본 공항에서도 한국 공항에서도 무사히 통과되었다. 수지 집에 도착하자 마자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생선 음식을 한국 고양이들에게 건네주었더니 너무너무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닌가! 아마 무슨 잔치 날 음식인줄 줄 알고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개들과 고양이들뿐은 아니다. 나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새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곤 하는데 새들도 먹이를 주는 나에게 달려 든다. 남아공의 높은 산에서도 모스크바의 호텔 근처 나무숲에서도 제주도의 숲 길에서도 서해 바다의 뱃길에서도 부산의 해운대 해변에서도 아니 수서 사무실 근처에서도 새우깡 같은 새들의 먹이를 던져주면 새들이 떼를 지어 나에게 달려든다. 해운대 해변에 갈 때마다 새우깡을 몇 봉지씩 사서 해변의 갈매기와 비둘기들에게 던져주곤 하는데 해변의 갈매기와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나에게 달려들곤 한다. 해변의 비둘기들 두 세 마리가 아예 새우깡을 던져주는 내 팔 위에 함께 올라 앉아서 새우깡을 받아먹곤 한다. 그러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내 팔 위에 앉아서 새우깡을 받아 먹는 두 세 마리의 새들을 구경한다. 그 때 찍은 재미 있는 사진들이 여러 장 있다. 수서 사무실 근처의 고층 빌딩에 비둘기들이 머물고 있는데 점심 먹은 후 이따금씩 빌딩 근처에 가서 새우깡을 주려고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즉시 비둘기들 수 십 마리가 떼를 지어 날아온다. 그 때 찍은 재미 있는 사진들이 있다.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도 자기들에게 친절한 관심과 도움의 손길을 펴며 먹을 것을 주려고 하면 그것을 즉시 알아 차리고 달려드는 것이다. 나는 2010년 늦은 여름에 제주도 바다에서 재미 있는 경험을 한 일이 있다. 늦은 여름이라 바다에 들어가기가 좀 서늘했지만 산과 바다를 아주 좋아하는 나는 바다에 뛰어 들어갔다. 서늘한 제주도 바다에 들어가서 한참 수영을 하는데 손 바닥 크기의 물고기 한 마리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 옆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 물고기를 나의 두 손 안에 넣었다. 물론 물 안에서였다. 그 물고기는 내 두 손안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더니 옆으로 들어 눕는 것이 아닌가! 조금 후에는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았다. 하도 이상해서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고 나는 헤엄을 쳐서 한 10미터 이상 되는 곳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 물고기가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다시 그 물고기를 나의 두 손 안에 넣었다. 물론 물 안에서였다. 그 물고기는 내 두 손안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더니 다시 옆으로 들어 눕는 것이 아닌가! 조금 후에는 다시 잠을 자는 것과 같았다. 나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물고기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이러는가?” “지금 이 물고기가 엄마를 잃은 것은 아닌가?” “지금 이 물고기가 집을 잃은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 물로기를 두 손 안에 넣은 대로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해변 얕은 물에 그 물고기를 놓아주었다. 여기서 좀 쉬든지 엄마를 찾든지 집을 찾아가라고 타일렀다. 물고기도 친절하게 대하면 그렇게 순해지는가?

“그러면 이제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식물과 꽃들을 아주 좋아한다.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는 내 사무실에 각종 식물과 꽃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고 은퇴한 후 지금 있는 수서 사무실에도 식물과 꽃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는 란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와 꽃들이 내 사무실에서는 아주 싱싱하고 예쁘게 잘 자란다. 5, 6개월마다 란들이 꽃을 피우기도 한다. 나무와 꽃들에게 관심과 사랑의 손길을 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강변교회 사무실에 있을 때는 꽃을 피우기가 어려운 행운 목까지 꽃을 피웠는데 그 짙은 꽃 향기가 사무실 방안은 물론 사무실 주변에까지 한 주간 이상 진동했다. 나는 행운 목의 가지를 잘라서 행운 목 자녀들을 만들었고 그 행운 목 자녀들로부터 행운 목 손주들까지 만들었는데 지금 수서 사무실에 있는 행운 목은 손주 뻘이 되는 행운 목이다. 강변교회당에서 자라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행운 목은 자손들이 번성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흐뭇해 할 것이다. 나는 산들과 바다와 자연을 아주 좋아한다. 나는 은퇴 후 주일마다 또는 주중에도 전국의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여 예배 드리며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곳 저곳에 펼쳐져 있는 산들과 울창한 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했다. 충청도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와 강원도와 거제도 등지에 펼쳐져 있는 산들과 울창한 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했다. 나는 가끔 바람에 몸이 흔들려 춤을 추는 울창한 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울창한 나무 숲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곤 했다. 그래서 시편 148편을 속으로 읊기도 했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과 기는 것과 나는 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의 모든 사사며 청년 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시148:9-13).

 

 

“나는 산들과 해변을 거닐 때마다 거의 잊지 않고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산 속이나 해변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들을 주워가지고 오는 일이다. 산을 올라갈 때는 커다란 쓰레기 봉지들을 주머니에 넣고 올라간다. 설악산 비룡 폭포를 오르고 내릴 때도, 제주도의 해변이나 숲 속을 거닐 때도. 서해안 외목 마을의 산을 오르고 내릴 때도, 태국의 해변을 거닐 때도, 사할린의 숲 속을 거닐 때도, 나는 쓰레기를 주워가지고 오곤 했다. 설악산 비룡 폭포를 오르고 내릴 때 쓰레기를 담은 커다란 봉지를 가지고 내려올 때마다 산 아래 상점 주인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쓰레기를 주워가지고 오느냐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제주도의 해변이나 숲 속을 거닐 때 나와 함께 동행하던 합신의 제자들도 할 수 없이 쓰레기를 주웠다. 외목 마을의 산을 내려오면서 쓰레기를 담은 봉지를 산 아래 파출소 쓰레기통에 넣자 파출소의 경찰이 나에게 다가와서 고마워하면서 나의 이름과 직업과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알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어느 해 뜨거운 여름 태국 좀티엔의 해변을 거닐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해파리 이백 여 마리를 김종군 목사와 함께 잡아다가 근처 호텔 관리인에게 준 일도 있었는데 너무너무 고마워했다. 구 소련 선교대회가 열린 사할린의 숲 속을 날마다 고 이중표 목사님과 함께 거닐면서 친밀한 교제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그 때도 매일 쓰레기를 주워서 가지고 내려오곤 했다. 나는 쓰레기를 주워가지고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자연을 조금이라도 깨끗하고 아름답게 돌아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국내외의 호텔에 며칠 동안 묵을 때는 침대나 수건을 갈지도 말고 청소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Do not clean” 이나 “Do not disturb”라는 푯말을 반드시 문밖에 걸곤 한다.

사실 집에서는 침대의 이불이나 시트를 매일 갈지도 않고 수건도 매일 바꾸지도 않는다. 나는 집에서도 수건을 이틀 동안 쓴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수건들을 골고루 사용하면 삼 사일 정도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침대의 이불이나 시트나 수건들을 매일 세탁하면 그만큼 물이 오염될 것이고 지구가 오염될 것이다. 수년 전에 나의 제자인 최홍준 목사와 일본 어느 호텔의 같은 방에서 며칠을 잤는데 아침에 우리가 방을 나오려고 할 때 나보고 먼저 나가라고 했다. “Do not clean” 이나 “Do not disturb”라는 푯말을 걸지 못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치를 채고 제자보고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을 사랑하고 지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Do not clean” 이나 “Do not disturb”라는 푯말을 건다고 설명을 했더니 결국 내 말에 할 수 없이 굴복하고 말았다. 한 마디 더 하면 나는 호텔에서 나올 때는 반드시 팁을 놓는 데 좀 넉넉하게 놓으면 그 다음 날 방에 고맙다는 카드와 꽃이 놓여있는 경우도 있고 제네바의 어느 숙소를 나오려 할 때는 숙소를 관리하는 사람이 다음에도 꼭 오라는 말을 친절하게 했다. 조그만 친절이 친절과 고마움을 만들어낸다.” (사람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상 관계로 생략한다.)

사랑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사랑 특히 죄인들 사랑이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론 니느웨 사람들도 로마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이 귀중하고, 남한 사람들은 물론 북한 사람들도 모슬렘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자연만물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기도 물도 흙도 나무도 꽃도 풀도 새들도 동물들도 모두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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